432. 황혼의 무도(10)
(1458) 황혼의 무도-19
그것으로 메시지는 끝났지만 김학술은 한참 동안이나 그 조그만 글자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윽고 휴대전화의 덮개를 닫은 김학술이 중얼거렸다.
“흥, 이제야 제 분수를 알았구만.”
말하다 보니까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았으므로 덧붙였다.
“웃기지 말아, 아무나 요물이 되는 줄 알어? 넌 요물도 아니고 짐승이여.”
그때 교습소 문이 열리더니 이용근이 머리만 들여놓고 소리쳤다.
“형님 제자가 지금 무도장을 휘젓고 있어요.”
박선희다.
그게 기어코. 눈만 치켜뜬 김학술에게 이용근이 말을 이었다.
“여자들은 눈에 칼을 붙이고 있지만 남자들은 줄을 섰어요.”
김학술은 서둘러 교습소를 나왔다.
당연한 일이다.
초짜가 무도장에 들어오면 남자들은 대환영이다.
더구나 박선희 같은 영계는 몇달만에 한명이 나올까 말까한 것이다.
무도장 안으로 들어선 김학술은 수백명의 인파 속에서도 금방 박선희를 찾아 내었다.
입으로는 시치미 딱 떼고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무도장의 몸뚱이들은 그렇게 못한다.
다른 곳은 휑하게 비었는데 구석쪽에 구더기떼가 모인 것처럼 바글거리는 중심이 박선희였던 것이다.
박선희를 중심으로 놈씨들이 돌고 돌고 또 돈다.
정신이 딴 데 가있는 놈씨들이 끌고 왔기 때문에 여자들의 표정도 사나워져 있었다.
그러다보니 춤도 사납다.
삼바를 추는데 박선희를 힐끗거리면서 건성으로 여자를 돌리다가 여자끼리 부딪치는 사고도 일어났다.
인파를 헤치고 박선희에게 다가간 김학술이 불문곡직하고 팔을 잡아 끌었다.
파트너가 되어있는 놈은 무도장 근처 부동산 사장이었다.
김학술한테서 춤을 배운 제자여서 아무말 못했지만 똥 밟은 표정이 되었다.
“왜요?”
순순히 끌려나오던 박선희가 웃음띤 얼굴로 김학술에게 물었다.
“그냥 구경만 하려고 들어왔더니 이사람 저사람이 막.”
“춤 추는 건 상관없지만.”
무도장 밖 복도로 나온 김학술이 정색하고 박선희를 보았다.
그때 남녀 서너명이 옆을 지나면서 둘을 힐끗거렸다.
그중 여자들은 노골적으로 박선희를 흘겨 보았다.
벽쪽으로 박선희를 끌어 붙인 김학술이 말을 이었다.
“분위기를 깨면 안돼, 박 여사는 방금 무도장에서 장난을 치고 나온거야.”
“장난이라뇨?”
놀란듯 박선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에요, 장난 안쳤어요.”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스텝도 엉키는 데다 리듬을 타지도 않았어,
남자들은 그런 박 여사를 갖고 논거라구.”
박선희가 입을 벌렸다가 김학술의 눈치를 보더니 다물었다.
그러나 남자들 입장에서 보면 이런 청량제가 없을 것이었다.
분위기를 깬다니 이런 헛소리가 없다.
오직 여자들만이 문제다.
김학술이 소리죽여 숨을 뱉고는 말을 이었다.
“박 여사는 일단 튀지 말아야 돼,
그러러면 좀더 매끄럽게 리드하는 상대를 만나 분위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춤은 그렇게 배우는 거야.”
튀면 여자들의 공격을 받는다.
아주 대놓고 싫어하는 원수까지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 박선희가 갑자기 얼굴을 펴고 웃었다.
“그럼 선생님하고 추면 되겠네요, 그쵸?”
김학술의 시선을 잡은 박선희가 바짝 다가섰다.
“어쨌든 저녁 같이 먹어요, 선생님.”
(1459) 황혼의 무도-20
“다음에.“
김학술이 박선희의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내일 저녁이 좋겠구먼. 내일 합시다.”
“좋아요. 내일까지 기다리죠 뭐.”
선선히 응낙한 박선희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웃었다.
“내일도 제가 혼자니까요.”
김학술은 무도장 건물 앞에서 박선희와 헤어지자 갑자기 가슴이 허전해졌다.
오후 5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보통 무도장에서 여섯 시가 조금 넘어서 나와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10시쯤 되었다.
식사는 대개 교습소 선생이나 제자들과 함께 했는데 혼자 먹으면 식욕이 일어나지 않았다.
섹스는 일주일에 한 번꼴이었고 상대는 주위에 얼마든지 있었다.
무도장에 나오는 여자들 중 같이 잔 여자를 스무 명까지 세었다가 골치가 아파서
그만 세었을 정도였다.
같이 잤는지 어쩐지 헷갈리는 여자도 서너 명이나 되었고 실제로 처음인 줄 알고
같이 잤다가 2년 전에 했다는 당사자의 말을 들은 적도 있었으니까.
그것은 곧 김학술이 질질 끄는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 증거로 김학술은 두 번 이상 섹스를 한 여자가 아주 드물었다.
김학술은 지금까지 여자에게 빠져 본 적이 없다.
섹스에 빠지다니.
어불성설이다.
밖에서는 하룻밤에 두번 세번 깃발을 꽂으면서 기염을 토했지만 본인은 만족하지 못했다.
싸지 않았는데 만족할 리가 있겠는가?
그럼 무슨 재미로 여자 섭렵을 하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할지 모른다.
여자가 있기 때문이라고.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그렇게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김학술은 30년 직장생활을 기술직으로만 지냈기 때문에 그 흔한 계장도 못해보았다.
오늘은 박선희 덕분에 일찍 나와서 혼자 저녁을 먹어야 되었으므로 김학술은 심란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팔목시계를 보고 나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김학술이 조철봉과 마주 앉았을 때는 그로부터 한 시간 반쯤이 지난 후였다.
조철봉은 단골로 다니는 한정식집으로 김학술을 모셨는데 옆에는 시중드는 여자까지 붙여 놓았다.
“삼촌, 거시기.”
김학술을 외면한 채 조철봉이 말했다.
“어머니한테는 집안 이야기 말씀 안 드렸어요. 그러니까 염려 놓으시고.”
그러자 김학술이 히죽 웃었다.
“말씀 드려도 내가 벌 받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시원해 하실 거다. 상관없어.”
”에이, 어디 그러실라고요.”
“내가 너무 속을 썩여 드려서.”
“놀러 오시고 그러세요. 겉으론 그래도 어머니가 반가워하실 텐데.”
“쓸데없는 소리.”
정색한 김학술이 술잔을 들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너도 걱정하지 마라.
내가 조카한테 사기칠 만큼 썩지는 않았다.
너한테 그런 부탁도 이제 안 할 테니까.”
“아니, 삼촌.”
이제는 조철봉도 정색했다.
“저한테는 뭣이든 부탁하셔도 됩니다. 저, 그럴 능력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내가 널 보자고 한 건.”
얼굴을 일그러뜨린 김학술이 시선을 들더니 조철봉을 보았다.
“넌 좀 이해를 할 것 같아서 그런다.
너, 여자하고 몸 따로 마음 따로 하고 같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니?”
조철봉은 눈만 껌벅였고 김학술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구체적으로 말하지. 잠자리 따로, 마음 따로 주는 여자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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