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431. 황혼의 무도(9)

오늘의 쉼터 2014. 9. 4. 00:04

431. 황혼의 무도(9)

 

 

 

(1456) 황혼의 무도-17

  

 “원투, 원투, 원투스리 포.“

교습소에 들어온 지 열흘밖에 안되었지만 박선희는 춤을 잘 추었다.

 

몸이 부드럽고 자신있게 스텝을 밟는다.

 

그러면 좀 틀리더라도 멋지게 보인다. 춤이란 꼭 정해진 스텝에 따라 기계처럼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춤이란 즐기는 것이다.

 

본인도 즐기고 보는 사람도 즐거워야 한다.

 

그 자리만 밟으면 답답하게 보이고 나중에는 짜증이 난다.

 

잘추는 사람은 부드럽고 새로워야 한다.

 

새롭게 만든다.

그렇다고 과장된 제스처, 화려한 발놀림으로 두드러지려고 했다가는 웃음거리가 된다.

 

그런 선수는 오래 못가 질리게 된다.

 

질리면 만회하기 힘들다.

 

잘추는 춤꾼은 드러나지 않는다.

 

은근하다.

 

다시 함께 추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상대에게도 기쁨을 주니까.

김학술은 이제 탱고스텝을 혼자서 밟는 박선희를 물끄러미 보았다.

 

주민증 확인은 안했고 확인할 수도 없지만 박선희는 수강서류에 38세라고 적어내렸다.

 

직업은 주부, 그러나 실제 나이는 40 초반쯤 되었을 것이다.

 

피부가 팽팽해서 38세라면 다 믿겠지만 김학술의 눈은 못속인다.

주부라고 한 것도 그렇다.

 

교습소나 무도장에서 가장 환영받는 직업이 묘하게도 주부다.

 

만날 오는 건달들도 주부라면 제일 좋아한다.

 

아마도 바깥의 험한 세파에 닳아 까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었다.

 

김학술은 눈을 가늘게 뜨고 박선희를 보았다.

 

몸매도 괜찮고 얼굴도 저만하면 미인이다.

벌써부터 무도장의 건달들이 여러명 박선희를 찜해놓고 있는 것이

 

잘못하면 한바탕 쌈도 날 것 같았다.

 

오금주 때문에 이틀간 교습소를 비우고 오늘 출근했더니

 

벌써 세놈이 눈치를 보고 돌아갔다.

 

그때 음악이 그쳤으므로 박선희가 숨을 고르면서 다가왔다.

 

상기된 얼굴에 가쁜 숨을 쉬는 것이 꼭 몸이 합쳐질 때의

 

모습 같았으므로 김학술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니까 어제 새벽에 오금주와 마지막 정사를 나눈 후부터

 

김학술은 학질이 떨어진 것 같았다.

 

머리가 가볍고 자신감이 일어났다.

 

그래서인지 교습소의 여선생 노여사가 김학술의 춤을 보더니

 

자신감이 넘친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전혀 다른 분위기라는 것이다.

“선생님, 제가 저녁 살게요.”

다가선 박선희가 눈웃음을 치며 말했다.

“요즘 애기 아빠가 외국 출장을 가서 시간 많아요.”

이건 다 되었으니 수저만 들고 오라는 말이었다.

 

아니, 몸만 가면 되었다.

 

그러나 김학술은 머리를 저었다.

“아니, 오늘은 내가 약속이 있어서.”

그러고는 덧붙였다.

“난 학생하고 교습 끝날 때까지는 개인적으로 만나지 않아요.

 

어쩐지 리듬이 깨지는 것 같거든.”

거짓말이다.

 

그러나 방금 지어낸 말이었지만 제 귀로 들어도 그럴 듯했다.

“어머, 왜요?”

하고 땀이 송글송글 돋은 코를 바짝 드리대면서 박선희가 물었지만

 

김학술은 금방 대답할 수 있었다.

“사감이 개입되면 왠지 몸이 굳어져.

 

특히 박선희씨처럼 미끈한 미인을 보면 말야. 그래서 그래요.”

“그럼 교습 끝날 때까지 같이 식사도 못한단 말이에요?”

눈을 크게 뜬 박선희가 묻자 김학술은 쓴웃음을 지었다.

“나도 남자야. 아마 박선희씨가 두번째 청하면 넘어갈거요.”

“그럼 다음에요.”

활짝 웃은 박선희가 몸을 돌렸을 때 옆쪽 탁자에 놓았던 휴대전화가 진동을 했다.

 

전화기를 든 김학술이 발신자 번호부터 보더니 눈을 치켜떴다.

 

오금주였기 때문이다. 

 

 

 

 

 

 

(1457) 황혼의 무도-18

 

  

 휴대전화를 귀에 붙인 김학술이 입을 열었다.

“뭐야?”

그러자 저쪽은 3초쯤 가만있더니 대답했다.

“나 지금 언니한테 와 있어.”

“그래서?”

했지만 김학술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가슴이 뛴다든가 숨이 가빠지는 따위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금주의 하나밖에 없는 언니 오금순은 김학술 편이었다.

 

김학술한테 동네에 괜찮은 과부가 한명 있으니까 만나러 오라고 할 정도로

 

오금주의 행동에 대해서 미안해했다.

 

그런 언니한테 가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무도장에서는 별일이 다 일어난다.

 

그 별일들을 듣고 봐온 김학술이니 오금주의 속셈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람 심리가 어디 그런가? 마음 따로 입 따로, 내밀면 물러가고 주춤대면

 

쫓아가는 것이 젊으나 늙으나 같다.

 

그러나 김학술의 시큰둥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오금주가 말을 이었다.

“시간 있으면 언니한테 와 줄테야?”

“없는데, 시간이.”

해놓고 김학술이 덧붙였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바빠서 말야.”

교습장 안은 텅 비었다.

 

선생들도 틈만 나면 바로 복도 건너 무도장으로 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학술은 휴대전화를 입에서 조금 떼고 빈 교습소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박여사, 조금만 기다려. 김여사는 이따가 거기서 기다리고.”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다시 귀에 붙였다.

“이제 다 끝났으니까 나한테 전화하지 마, 알았지?”

이것은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나온 말이다.

 

얼마나 이렇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금주의 전화가 오면 꼭 이렇게 말할 것이라고 수십번 다짐했지만 못했다.

 

아예 전화가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저 이쪽에서 전화를 해놓고 이 대사를 뱉는다면 모양이 우습지 않겠는가?

 

마누라가 도망을 가서 아무리 경황이 없다고 해도 그쯤 사리판단은 하는 김학술이었다.

 

그때 오금주가 말했다.

“꼭 이야기할 것이 있어서 그래.”

“나는 꼭이 아니라 빈말도 할 건덕지가 없다.”

그렇게 말하는 김학술은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코가 다 찡했다.

 

만날 맞기만 하던 놈이 처음 쌈에서 이겼을 때의 기분이 이랬을까?

 

그러나 김학술은 더이상 휴대전화를 귀에 붙이고 있기가 힘이 들었다.

 

저쪽보다 먼저 끊어야겠다는 조급증이 일어났다.

“끊어.”

그러고는 전화기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열곡쯤 춤을 연거푸 춘 것만큼

 

지친 표정이 되어 긴 숨을 뱉었다.

 

언니한테 가 있다면 그 주유소놈하고는 끝이 난 것이 분명했다.

 

하긴 놈을 옆방에다 두고 무려 네시간반 동안이나 일을 치렀으니

 

그놈은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물론 그때 김학술은 그놈이 듣고 있는 줄은 알았다.

 

그러나 너도 한번 당해보라는 따위의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오직 섹스 때문에 떠났을지도 모르는 오금주에 대한 깊은 채무 성격의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것도 오금주 모르게, 스스로만 만족시키기 위한 행동.

 

그때 바지 속에 넣은 휴대전화가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문자 메시지가 왔다는 신호였다.

 

김학술은 얼른 휴대전화를 꺼내 펼쳤다.

 

예상대로 오금주가 보낸 메시지였다.

“난 내가 요물인 걸 이제야 알았어.”

처음에는 그렇게 써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졌다.

“내 몸도 내 것이 아냐. 하지만 마음은.” 

 

 

 

 

'소설방 > 강안남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433. 황혼의 무도(11)  (0) 2014.09.04
432. 황혼의 무도(10)  (0) 2014.09.04
430. 황혼의 무도(8)  (0) 2014.09.04
429. 황혼의 무도(7)  (0) 2014.09.04
428. 황혼의 무도(6)  (0) 201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