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423. 황혼의 무도(1)

오늘의 쉼터 2014. 9. 3. 23:39

423. 황혼의 무도(1)

 

 

 

(1440) 황혼의 무도-1 

 

 

 

 

 

  

 김학술이 눈을 떴을 때는 오전 10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온몸이 찌뿌듯했지만 오늘은 쉬는 날이다.

 

이윽고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원기가 조금 일어났다.

 

이제는 이 원기가 머릿속에서 발동이 되면서 단전으로 옮겨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모두 계룡산에서 18년간 도를 닦았다는 대호도사로부터 수련을 받은 덕분이다.

 

화장실에서 씻고 나왔을 때 전화벨이 두번 울렸다가 끊어졌다.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막 전화를 받으러 가는데 끊어진 것이다.

 

끊어지고 나서야 김학술은 그 전화를 도망간 마누라 오금주가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받기를 잘한 것이다.

 

그쪽도 신호가 두번 울렸을 때 끊는걸 보면 이쪽과 비슷한 감정 상태일 것이다.

 

지금은 그렇다. 이틀전에 해먹은 김치찌개는 상했기 때문에 김학술은 맨 밥에다

 

간장과 참기름을 넣고 비벼 먹었다.

 

밥통 타이머가 49로 나와있는 밥이라 돌덩이 같아서 김치 국물을 많이 넣었더니 짰다.

그래서 서너술 먹다만 밥을 개수대에 버리고 식사를 끝냈다.

 

식사를 마친 김학술은 서둘렀다.

 

검정 양복에다 검정 티셔츠, 그리고 잘 닦여진 구두를 신고 아파트를 나왔을 때는

 

11시10분, 차를 몰고 장안평의 무도장에 도착했을 때는 12시5분이었다.

 

5분 늦었다.

“오빠, 윤희씨가 기다려.”

무도장 입구에서 만난 복희가 눈으로 교습장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도장 옆은 웰빙춤 교습장이다.

 

요즘은 웰빙이 유행이라 사교춤도 웰빙춤, 야채만 섞여도 웰빙식단,

 

방에다 숯한덩이 놓고도 웰빙룸이다. 김학술이 교습장 안으로 들어서자

 

벽쪽 의자에 앉아있던 천윤희가 일어섰다.

 

군계일학이다.

 

천윤희의 모습을 본 순간 김학술의 머리에 떠오른 문자였다.

 

닭속에 섞인 학 한마리, 딱 맞는 표현이다.

 

천윤희는 은행 지점장으로 퇴직한 남편과 함께 웰빙춤을 배우러 왔다가

 

두달만에 남편은 떨어지고 지금 넉달째 배우고 있다.

 

말이 웰빙춤이지 차차차, 탱고, 삼바에다 지르박, 블루스까지 섭렵하다보면 끝이 없다.

“선생님 30분만 해요.”

천윤희가 웃음띤 얼굴로 말하더니 김학술 앞으로 다가와 섰다.

 

날씬한 몸매에 나긋한 목소리, 거기에다 미모와 교양까지 갖췄으니

 

옆쪽 무도장의 건달들이 침을 안흘릴 수가 없다.

 

그러나 교습소 강사인 김학술이 맡은 호구인 것이다.

 

무도장 출입을 안할 작정이라면 모를까 손을 댈 수는 없다.

 

김학술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교습장과 무도장,

 

거기에다 아래층 식당까지 운영하는 강동호 때문이다.

 

강동호는 장안평의 올림픽파의 간부이기도 해서 이곳 무도장에서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오늘은 무도장에서 놉시다.”

김학술이 말하자 천윤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도장에서요?”

“그래요, 이젠 이틀에 한번꼴로 옮겨가서 실전을 익힙시다.”

그러자 천윤희의 얼굴이 상기되었고 눈빛이 강해졌다.

 

천윤희의 몸을 보면 50대 중반이다. 얼굴은 화장과 성형수술로 숨길 수 있지만 몸은 못속인다.

 

김학술은 30년 경력의 이른바 춤꾼이어서 여자의 몸을 보고 나이를 알아맞췄다.

 

여인의 손, 목, 발, 드러난 부분만 봐도 대충은 맞췄고 돌아가는 허리, 엉덩이의 탄력,

 

뻗는 다리의 힘은 춤을 추면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천윤희는 54살이나 55살이다.

 

김학술이 천윤희와 함께 복도 건너편의 무도장 입구로 들어서자

 

경비로 서있던 윤태권이 방긋 웃었다.

 

윤태권은 김학술의 의도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1441) 황혼의 무도-2

 

  

무도장은 남자들만 입장료를 받는다.

 

그러나 김학술은 무료 입장이다.

 

천윤희와 함께 육중한 무도장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환호성을 지르는 것 같은 음악이 귀를 울렸다. 삼바다.

 

이백평쯤 되는 홀 안은 남녀로 가득 찼는데 모두가 활기에 찼다.

 

돌고 돌고 또 돌고 비틀면서 흔든다.

“자, 우리도”

팔을 벌려 포즈를 잡으면서 김학술이 말하자 천윤희가 다가왔다.

 

삼바는 템포가 빠르다. 천윤희가 넉달째 일주일에 세번씩 빠지지 않고 배웠지만

 

익숙해지려면 조금 더 공부해야 한다.

 

그러나 김학술은 부드럽게 리드하면서 천윤희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고수는 상대방을 무아지경으로 이끌어야 한다.

 

지금 춤을 추는지 꿈속을 헤매는지 모를 정도로 상대방을 황홀경에 빠뜨렸을 때

 

그때 비로소 고수 자격증을 받는 것이다.

 

물론 그 자격증은 상대방으로부터 받는다.

 

증서는 없다.

 

하지만 그 경험을 해본 상대방은 평생 동안 고수를 존경하게 될 것이다.

 

물론 돈을 떼어먹거나 더러운 제비 노릇을 한 놈들은 빼고.

“아유, 잘 추시네.”

김학술의 어깨를 툭 치고 옆으로 가면서 이용근이 천윤희한테 말했다.

 

천윤희의 사기를 올려주려는 것이다.

 

오늘 첫 무대이며 졸지에 머리를 올리게 된 천윤희의 동작에 점점 자신감이 붙는 것을 보면서

 

김학술은 심호흡을 했다.

 

홀 안은 열기로 가득 찼다. 옆을 지나는 여자 중 열에 다섯명은 김학술에게 눈인사를 했다.

 

생긋 웃는 아줌마도 있다. 인사를 한 여자 중 절반은 김학술의 제자인 것이다.

 

삼바가 끝나고 지르박, 그리고 차차차까지 추고 났을 때 천윤희의 얼굴엔 땀이 돋아났다.

 

그러나 흥이 오른 천윤희는 더 추고 싶은 눈치였다.

“오늘은 이만.”

김학술이 손을 떼면서 말하자 천윤희가 가쁜 숨을 뱉으며 물었다.

 

생기를 띤 얼굴은 30대 같았다.

“저 괜찮았어요?”

“훌륭합니다.”

정색한 김학술이 천윤희를 벽 쪽으로 이끌면서 말했다.

“한두달만 더 하시면 어디 가서도 빛이 날 겁니다. 몸이 아주 유연해서요.”

“정말요?”

마치 교사로부터 칭찬을 받은 초등학생처럼 천윤희의 얼굴이 기쁨으로 환해졌다.

 

천윤희의 실력은 보통이다.

 

박자가 많이 틀렸고 손발의 동작이 어색해서 김학술이 보기에는 낯이 뜨거울 정도였다.

 

그러나 첫 무대에서 이 정도면 상급이긴 하다.

 

이렇게 해서 실력이 느는 것이다.

“선생님, 제가 오늘 저녁 사도 되죠?”

천윤희가 물었으므로 김학술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제가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요. 다음에 제가 먼저 청하면 안될까요?”

바짝 다가선 김학술이 정중하게 묻자 천윤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 선생님. 언제든지요.”

김학술은 천윤희와 함께 무도장을 나왔다.

 

입구에 서있던 윤태권이 다시 빙긋 웃었는데 그 웃음이 의미심장했다.

 

한건 했느냐는 웃음이다.

 

윤태권도 무도장 경비만 10년째인 능구렁이다.

 

저놈은 여자건 남자건 한번만 보면 직업에서부터 지갑에 얼마나 들었는지,

 

혼자 사는지를 다 알아맞히는데 언젠가는 수배자까지 집어낸 적이 있었다.

 

한번 출입을 한 남자가 분명히 수배자라고 했던 것이다.

 

며칠 후에 경찰서에 들렀던 누가 그 작자의 사진이 찍힌 수배범 전단을 가져와

 

모두 감탄한 적이 있다.

 

김학술은 천윤희와 헤어져 식당으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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