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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중국손님 (38)

오늘의 쉼터 2014. 9. 3. 19:07

제17장 중국손님 (38)

 

 

 

 

백석의 입찬소리가 아니더라도 유신의 마음은 이미 그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볼모로 붙잡혀 값없이 보낸 지난 몇 해를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날마다 꿈을 죽이고 뜻을 꺾으며 살아온 유신의 황폐한 가슴속에서 모처럼 뜨거운 불길이

활활 치솟아올랐다.

“지금 당장 갈 수 있겠느냐?”

유신이 다짜고짜 물었다.

“저야 언제고 떠날 수 있지만 도련님이 쾌차를 하셔야지요.”

“그럼 됐다. 나는 이제 다 나았으니 어서 채비를 해라.”

“오늘은 밤이 너무 늦었으니 내일쯤 떠나시는 게 어떨는지요?”

“하루라도 허송할 까닭이 없다.

더군다나 몸이 아파 궐번까지 한 처지라 금성을 빠져나가자면 어차피 밤이 아니고선 어렵다.

아직 초저녁이니 어서 서둘러라!”

이리하여 두 사람은 장사꾼 복색을 한 채로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백석은 유신에게 먼저 백제로 갈 것을 제안했고 유신도 쉽게 동의했다.

금성을 떠난 지 이틀째 저녁,

두 사람은 골화천(骨火川:영천시 완산동 금호강)변에 당도하여 한 여관에를 들게 되었다.

골화는 금성의 나력(奈歷), 혈례(穴禮)와 더불어 나라의 대사(大祀)를 지내는 3산(三山) 중의 하나여서

신라인들이 특히 신성하게 여기는 지역이었다.

유신과 백석이 골화관(骨火館)에 이르러 주인을 찾자

눈매가 곱상한 아낙 하나가 쪼르르 나와서 양인의 행색을 힐끔 살핀 뒤에,

“묵을 방이 없으니 딴 데루 가보오. 고개 하나를 더 넘어가면 주막이 있소.”

하고는 이쪽의 말은 들어보지도 않고 다시금 바삐 들어가려 하였다.

아무리 두 사람이 장사치처럼 보이기로서니 너무하다 싶었다.

유신은 마음이 불쾌했지만 그렇다고 아낙과 시비를 하랴 싶어 그냥 돌아서려는데

밖에서 젊은 여인이 늙은 소경을 부축한 채 지친 듯한 걸음걸이로 들어오더니,

“보세요, 묵어갈 방이 있지요?”

하며 묻는 것이 유신과 백석을 객관 사람쯤으로 안 모양이었다.

유신은 비록 범골 장사치로 변복은 했어도 근본이 다른지라

어쩔 줄을 모르고 난처해하는데 백석이 대신 나서서,

“우리도 손이우.”

하고는 돌연 고함을 질러 저만치 들어가려던 주인 아낙을 다시 불러 세웠다.

“이보게나, 길손이 묵는 객관에 방이 어째서 없는가?”

백석이 못마땅한 투로 두 눈을 부릅뜨고 물었더니 아낙이 절반쯤 몸을 돌리고서,

“미리 든 사람이 있어 없지 왜 없겠소.”

뻔한 걸 무엇 때문에 묻느냐는 투로 냉랭히 쏘아붙였다.

아낙의 건방지고 박정한 태도에 백석이 은근히 골이 났다.

“이년아, 아직 초저녁인데 무슨 손이 그리 많아?

그러고 설혹 손이 많다손 쳐도 객인 묵어가는 객방이야 항시 먼저 드는 사람이 있고

나중 드는 사람이 있지,

먼저 든 사람 때문에 나중 드는 사람이 쫓겨난다면 그것이 무슨 객관이냐?

골화관에는 사첫방만 있고 봉놋방은 없단 말이냐?”

욕설을 섞어가며 여럿이 함께 묵는 데가 없느냐고 다그쳤더니

아낙이 홀연 눈을 살천스레 치뜨고서,

“누굴 보고 년이래?”

하며 귀찮다는 듯 팔을 휘휘 젓더니,

“없다지 않소? 없어! 재 하나만 넘어가라는데 웬놈의 말이 그렇게 많어!”

하고는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유신이 백석을 보고서,

“피곤하구나, 그냥 가자.”

하니 백석이 골이 잔뜩 나가지고,

“저 빌어먹을 년이 지금 젊은 놈 하나를 꿰차고 간통을 하느라 여념이 없소!

도련님은 예서 잠시만 계시오.”

돌연한 소리를 뱉고는 미처 붙잡을 겨를도 없이 냉큼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있으려니 안에서 투닥투닥 다투는 소리가 나고 간간이 여자 비명 소리도 들려왔다.

그사이에 유신은 소경을 부축한 젊은 여인과 두어 보쯤 거리를 격하고 섰는데,

초면의 남녀가 말을 섞기도 어렵지만 말없이 멀뚱멀뚱 눈만 맞추고 있는 것도 고역이라

공연히 어험, 어험, 잔기침만 터뜨렸다.

한참 만에 안에서 문이 열리고 백석이 절반은 벗은 젊은 놈 하나를 질질 끌고 나오더니,

“바로 이놈 때문에 오늘 골화관 찾는 과객들이 몽땅 헛걸음질을 할 뻔했소.

온 방이 다 비었는데 방이 없다니!”

하고는,

“어디 붙어먹을 데가 없어 제 형수랑 놀아난단 말이냐, 이눔!”

끌고 온 사내에게 목자를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끌려나온 사내는 이미 백석에게 혼구멍이 났는지

두 손을 이마에 붙이고서 연신 죽을죄를 지었다고 빌어댔다.

소경이야 본래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

그대로 서 있었지만 젊은 여인은 망측한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고,

유신도 무참한 기분이 들어 상을 찡그리며 등을 돌렸다.

백석이 저 알아서 하면 좋으련만,

“이놈을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관아에 연락을 해 동네방네 조리돌림을 시킬까요,

여기서 제가 그냥 요절을 내버릴까요?”

하며 유신을 향해 꼬치꼬치 물었다.

죄인을 겁주자고 하는 말인 줄을 유신인들 모를 턱이 없었으나 젊은 여인이 앞에 있으니

말이 날수록 난처한지라,

“엇다, 그만하면 됐으니 어서 방에나 들자.”

하고는 먼저 그곳을 떠나 안으로 들어갔더니

좀 전의 그 방색하던 객관 아낙이 고개를 푹 떨군 채 나와서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안내한 뒤에,

“나리님, 그저 죽을죄를 지었으니 용서해주시오.

저는 사통할 마음이 없었는데 엊그제 저치가 다짜고짜 들이닥쳐

그만 해괴한 일을 벌이고 말았습니다요.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없을 것이니 부디 이번 한번만 눈을 감아줍시오.”

갑자기 나긋나긋한 태도가 되어 손이야발이야 죄를 빌었다.

유신이 두어 차례 혀를 차고서,

“알았으니 그만 나가보게.”

하였다가 아낙이 일어나 나가려 하자 다시 불러세우고,

“좀 전에 밖에 있던 소경과 여인에게도 어서 방을 내어주게. 행색에 노독이 완연해.”

하고 덧붙였다.

 

조금 후에 백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들어와 손을 툭툭 털고서,

“저놈의 여편네가 비록 금수 같은 짓을 했지만 아주 몹쓸 것은 아닌가 봅니다.

하긴 서방이 군역에 나갔다가 죽었다니 그럴 만도 하지요.

어쨌거나 내일 관아에 들러서 고변을 하겠다니까 겁을 잔뜩 먹구서

눈물을 질금질금 흘려대는 품이 꽤나 순박한 구석이 없지 않습디다요.”

하며 객관 여주인 을러댄 일과 젊은 놈 다리를 발로 밟아 부러뜨린 것을 자랑하듯 늘어놓고 나서,

“오늘은 잠을 공으루 자게 생겼습니다.”

하였다.

 

유신은 백석에게 포악한 일면이 있음을 깨닫고 내심 적이 놀랐다.

게다가 어떻게 보지도 않고 간통한 사실을 알았는지 의심쩍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하여,

“네가 어디서 신통술을 배웠더냐?”

하고 물으니 떠들어대던 백석이 잠시 멈칫하다가,

“여편네 달아오른 얼굴을 보구서 직관으로 알아차렸지 신통력은 무슨 신통력입니까.

제가 어려서부터 산지사방 안 돌아다닌 데가 없어 눈치 하나는 비상합니다.

절간에서 젓국 얻어먹을 정도는 되지요, 허허.”

하며 바쁘게 너스레를 떨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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