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39)

오늘의 쉼터 2014. 9. 3. 19:18

제17장 중국손님 (39)

 

 

 

 

그날 밤에 유신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몸이 아직 시원치 않아 그런지 몸이 무겁고 등줄기가 오스스했다.

이부자리도 안 깐 아랫목 맨구들에 등짝을 붙이고 눕자 곧바로 졸음이 쏟아졌다.

꿈에 유신이 백석과 함께 골화천인가 싶은 곳에를 나갔더니

저만치서 세 낭자가 바구니에 능금을 가득 담아 걸어오다가 유신을 보고,

“저기 뵈는 저 숲 속에 들어가 긴히 드릴 말씀이 있는데 어떠세요? 따라오시렵니까?”

하며 묘한 웃음을 흘렸다.

백석이 유신에게 급히 속삭였다.

“도련님, 가지 마시오. 저 여자들이 아무래도 수상합니다.”

“수상하다니?”

“이런 곳에 여자들이 있을 리가 없지요.

혹 요망한 것들이 사람의 탈을 뒤집어쓰고 도련님을 홀리려는 수작인지 어찌 압니까요?”

“인석아, 골화는 본래 성스러운 땅이다.

나라의 대사를 지내는 곳에 어찌 요망한 것들이 있겠느냐?”

둘이서 한참을 티격태격하는 중에 문득 한 낭자가 앞으로 나서더니,

“우리가 먼저 숲에 가 있겠으니 마음이 동하면 오세요.

하지만 반드시 도련님 혼자 오셔야 합니다.”

하는데 그 얼굴이 어디선가 본 성싶었다.

이에 유신이 백석의 만류를 뿌리치고 앞서 간 세 낭자를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갔더니 저만치 세 낭자가 걸어가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리곤 돌연 유신의 눈앞에 낭자들이 신형(神形)을 드러내며 말하기를,

“우리는 나력, 혈례, 골화의 세 호국신인데 지금 도령은 사악한 자의 꾐에 빠져

위험한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부디 전후 시말을 잘 따져서 내막을 소상히 알아보세요.

도련님 곁에 있는 자는 필경 믿지 못할 자입니다.”

말을 마치자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유신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깨어나니 백석은 코를 골며 윗목에서 잠들어 있고

문으로 흘러든 달빛만이 방안에 흥건했다.

되짚어볼수록 이상한 꿈이요,

여운 또한 예사롭지 않았다. 백석의 포악한 일면을 보고 곧바로 잠이 들어

그런 꿈을 꾼 거라고 생각했지만 종내 석연찮고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꿈에서 깨어난 뒤 한동안 새 잠을 이루지 못하던 유신은

급기야 자리에서 일어나 객관 바깥으로 나왔다.

엊그제 보름을 넘겨 기우는 달이지만 아직도 만월이었고,

골화천 수면 위에 실린 월광도 쉴새없이 반짝였다.

달 넘어가는 것으로 보아 삼경도 훨씬 지난 달구리 무렵쯤 된 모양이었다.

유신은 꿈에 본 듯한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겨놓았다.

한갓진 개천 길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 때였다.

“저기요.”

뒤에서 돌연 인기척이 나서 돌아보니 달빛을 어깨에 받고 한 여인이 다소곳이 서 있었다.

유신은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듯한 착각에 휩싸여 잠시 몽롱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잠시 드릴 말씀이 있어 이렇게 나왔습니다만……”

늙은 소경을 인도하고 와서 함께 객관에 들었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아담한 중키에 눈썹이 짙고, 눈매가 선하면서도 안색과 몸가짐에

함부로 범접하지 못할 기품이 서려 있었다.

유신이 여인에게로 걸어가 가볍게 목례를 건네자

여인은 조심스레 사위를 살피며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같이 오신 분은 잘 아시는 분인가요?”

여인의 질문을 받자 유신은 뭐라 딱 부러지게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되물었다.

여인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윽고 결심이 선 듯 말했다.

“저와 같이 온 분은 저의 시어른입니다.

시부께서는 비록 앞을 잘 못 보시는 분이나 선도를 닦아 귀신과 혼백의 말을 알아듣고

사람과 땅에 서린 기운을 읽는 탓에 젊어서부터 여러 크고 작은 제사를 주관하셨습니다.

눈이 안 보이는 대신에 다른 능력을 가지신 게지요.

그런데 어젯밤 객사에 들자 제게 하시는 말씀이 귀한 도령 하나가

이제 곧 죽게 되었다고 하더이다.

그리고 도련님과 같이 온 사람의 앞을 지나칠 때 무서운 요기와 살기를 느꼈노라며

그는 반드시 흉악한 마음을 품은 무당일 거라 하셨습니다.

도련님께서는 비록 장사꾼 복색을 하셨지만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가 틀림없는 듯하고,

그렇다면 장차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 싶어 결례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그 말씀을 전해드리고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행여 소피나 보러 나오실까 하고요.”

여인은 유신의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보고서 분명하고 나지막한 말투로 얘기했다.

보면 볼수록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얼굴이었다.

유신은 여인이 말을 하는 도중에 자신이 꿈에서 만난

세 낭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

그러자 그가 어쩌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야릇한 신비감에 휩싸였다.

“생면부지의 처지로 그처럼 걱정을 해주시니 고맙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 또한 바로 그 일을 생각하느라 잠을 못 이루고 있었소.

이제 부인의 말씀까지 들었으니 내가 알아서 처리를 하리다.”

유신은 공손히 머리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시어른을 모시고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금성 천경림의 달낭구집이라는 곳에 인척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달낭구집이라면 색주가가 아니오?”

금성의 색주가를 훤히 꿰뚫고 있던 유신이 뜻밖이라는 듯 물으니

여인도 유신의 말이 뜻밖인지 잠시 놀라는 눈치였다가 이내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소상한 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시부께서 가자고 하셔서 뫼시고 나왔을 뿐입니다.”

여인은 자신의 말을 다 전했다고 느꼈던지 유신을 향해 인사를 건네고서,

“하면 무사하시길 빌겠습니다.”

하고는 객관 쪽으로 걸어갔다.

유신은 잠시 골똘한 궁리에 잠겼다.

설혹 꿈의 암시나 여인의 언질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백제와 고구려를 염탐하려던 뜻은

싹 달아났고 백석이란 자에 대한 새삼스런 의문과 궁금증만 불일듯이 일어났다.

얼마 뒤에 날이 밝자 유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윗목에서 눈이 퉁퉁 붓도록 실컷 자고 일어난

백석을 보고서,

“금성으로 가야겠다.”

하고 말했다.

 

밑도 끝도 없는 소리에 백석이 깜짝 놀라,

“엊그제 금성을 떠나왔는데 다시 금성에를 가다니요?”

크게 당황하여 물으니 유신은 그런 백석의 태도를 유심히 관찰하면서도

 

겉으로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기를,

“내가 하도 서둘러 오느라고 집에 중한 것을 두고 왔구나.

너와 함께 집으로 가서 다시 가져오자꾸나.”

하였는데, 그 말투에는 이미 거역하지 못할 위엄이 서려 있었다.

백석은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지만 유신의 위엄에 눌려

차마 소상히 물어보지 못하고서 대신에,

“말씀을 하시면 제가 한달음에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예서 금성이 꼬박 하룻길인데 공연히 도련님까지 다리품을 팔 까닭이 있습니까요?”

생각해서 말하는 척 둘러댔더니 유신이 고개를 단호히 저으며,

“네가 가져올 물건이 아니다.”

말을 자르고 주섬주섬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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