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37)

오늘의 쉼터 2014. 9. 3. 17:56

제17장 중국손님 (37)

 

 

 

 

그러나 이런 풍경들은 모두가 10여 년 저쪽, 지금은 기억마저 아련한 옛일들이었다.

국선의 영예도 화려한 검술도 부질없이 자신은 그저 금성에 볼모로 붙잡힌 한심한 처지로

쓸모 없는 보검만 맥없이 바라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달빛이 드리운 청룡검을 바라보며 지난 일을 회상하다 말고 유신은 새삼 죽은 해론이 떠올라

마음이 언짢았다.

누구보다 유신을 잘 따랐던 해론이었다.

그만 해도 몸이 좀 나았는지 술 생각도 간절하고,

그러구러 하주에 있는 부모님과 아우들도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도련님 주무시는지요?”

바깥에서 백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다. 들어오너라.”

유신이 죽여놓았던 등촉의 심지를 돋우고 문을 열자 백석이 잠시 무춤거리다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료하실 것 같아 왔습니다만 병환이 좀 어떠하신지요?”

“이제 살 만하구나. 다 너의 덕택이다.”

“언제쯤 출입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왜, 너도 술 생각이 나는 게냐?”

그러자 등촉불을 품에 안고 앉은 백석이 사뭇 목소리를 죽였다.

“술도 좋지만 도련님을 뫼시고 큰일을 한번 해보고 싶어 그럽니다.”

“큰일이라니?”

“저는 도련님의 뜻이 백제를 멸하고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 있다는 걸 잘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볼모로 붙잡혀 하릴없이 시일만 축내고 있으니

그 답답한 심정이 오죽하오리까?”

백석은 유신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어보고 또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다정한 말투로 얘기했다.

“낭도 중에는 술로 소일하는 도련님의 괴로운 심정을 모르고 더러 원망하는 축들도 있지만 저는 압니다. 술이 아니면 도련님이 과연 무슨 낙으로 사시겠습니까?

그래도 도련님이나 되니까 이렇게라도 견디시는 게지요.”

유신은 새삼스런 눈길로 백석을 쳐다보았다.

소천과는 달리 나이도 제법 들어 말하는 품이 어딘지 노숙하였고,

반듯한 이목구비에 기품 있는 허우대가 누구에게라도 호감을 살 만한 인물이었다.

유신이 잠자코 있으려니 백석이 잠깐 사이를 두었다가 더욱 비밀스럽게 말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이제 한동안 말미를 얻었으니 이 천금 같은 기회에

몰래 금성을 빠져나가 백제와 고구려의 강역을 은밀히 정탐하고 오는 게 어떻겠습니까?”

순간 유신의 눈빛이 강렬하게 빛났다.

백석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급히 무릎을 당겨 앉았다.

“저는 조실부모하고 어려서부터 백제와 고구려의 경계를 자주 넘나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을 두루 다 파악하고 있습니다.

또한 어떻게 변복해야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압니다.

백제의 마동 임금도 젊어서는 계림에 살며 우리나라의 강역을 샅샅이 정탐한 덕택에

그 허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겁니다.

그 바람에 그가 보위에 오른 후로 싸움만 벌어지면 신라군이 당최 맥을 추지 못하는 겁니다.”

백석의 말에 유신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병법을 쓰고 군사를 부리는 데 지형 지세를 알고 모르고는 가히 천지 차이지.”

“만일 도련님께서 뜻이 있다면 제가 쾌히 앞장을 서겠습니다.

안전은 조금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도련님의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보필하여 무사히 금성으로 되돌아올 자신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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