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32)

오늘의 쉼터 2014. 9. 3. 17:00

제17장 중국손님 (32)

 

 

 

 

그날은 초저녁부터 달이 유난히 밝았다.

문틈으로 봄날 노랑나비 떼와 같은 달빛이 스며들어 방안을 신비롭게 비추는데

유난히 강렬하게 달빛을 반사하는 물체가 있었으니 바로 중악에서 얻어온 보검, 청룡검이었다.

찬덕이 죽던 해이니 벌써 1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때 유신은 가잠성에서 아버지를 잃은 해론과 함께 영험하기로 소문난 중악의 석굴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목욕재계하고 하늘에 빌기를 나흘째, 그런데 홀연 사방에 운무가 자욱히 깔리더니

갈의를 입은 한 노인이 석굴 안으로 불쑥 들어섰다.

흑색 바랑 하나를 짊어지고 나타난 노인은 안색이 잘 익은 감처럼 불그스레하고 얼굴은

말대가리와 흡사한데, 기골이 장대하고 목이 학처럼 길어 한눈에 이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석굴이 마치 자신의 집인 듯 익숙한 몸놀림으로 바랑을 한쪽 구석에 훌쩍 집어던지더니

비로소 유신을 발견했는지,

“이곳은 독한 벌레와 사나운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위험한 곳인데 어린 소년이 혼자 무얼 하는가?”

하고 물었다.

 

유신이 되묻기를,

“어른께서는 어디서 오셨으며 존명이 무엇인지요?”

하니 노인이 던져놓은 바랑 옆에 털썩 주저앉으며,

“내 이름은 난승(難勝)이다.

지금은 이 석굴이 내 집이지만 여기서도 언제 떠날지 모르지.

가고 오는 것은 오로지 인연에 따를 뿐이다.”

하였다.

 

유신이 찬찬히 살펴보니

그의 모습과 언행이 보면 볼수록 예삿사람이 아닌 듯했다.

어쩌면 하늘이 자신의 기도에 감응하여 신인을 내려 보내준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노인을 향해 두 번 절하고 공손히 말했다.

“저는 신라 사람으로 나라의 원수를 보고 비분강개하여 이곳에 왔습니다.

지난 일을 돌아보건대 백제와 고구려는 틈만 나면 우리 강토를 마구 침범하여

성을 빼앗고 무고한 백성들을 함부로 죽이는 것이 마치 들판의 야수와 조금도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 시호(豺虎)와도 같은 양적의 무리 때문에 신라의 강역은 유사 이래 단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나이다. 저는 아직 어리고 용렬한 몸으로 재량과 용력이 없사오나 나라의 오랜 환난을 없애고 양적을 토벌하여

천하의 근심과 우환을 없애고 싶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어른께서는 저의 정성을 불쌍히 여기시어 이 두 손에 힘을 실어주소서!”

유신의 청에 노인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제법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유신은 다시 노인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말했다.

“어른께서는 보아하니 흔히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구적을 토평할 방술과 비법을 지닌 분이 틀림없으니 부디 저를 도와주십시오.

어른께서 가지신 힘을 빌려주시면 결코 망령되이 쓰지 않겠습니다!”

유신은 식구들을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된 해론의 일이 떠올라 눈물을 글썽였다.

그래도 노인은 묵묵부답이었다.

하지만 그쯤에서 물러날 유신도 아니었다.

그는 대꾸 없는 노인의 태도에서 그가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신비로운 인물임을

더욱 확신하고 한층 머리를 숙여 간곡히 애원했다.

그런 일이 예닐곱 차례에 이르자 요지부동 석불처럼 앉았던 노인이

마침내 천천히 눈을 뜨고 그윽한 눈길로 유신을 내려다보았다.

“어린 몸으로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는 뜻이 참 가상하구나.”

노인은 문득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

“한두 가지만 물어보마.”

“네, 어르신.”

“대개 한 해 농사를 짓는 일에도 가뭄과 장마가 갈마들고 때로는 황재(蝗災)와 심한 풍우를 만나기도

하는 법이다.

사직을 보전하고 일국을 경영하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성기와 쇠기가 끊임없이

바뀌게 마련이거늘,

이는 구름이 흐르고 절기가 순환하는 이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어찌 성쇠지리(盛衰之理)를 계림에만 있는 특별한 일이라 할 것이냐?

비록 근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을 자주 침범했다고는 하나 법흥, 진흥 양대에는

신라 또한 그들의 강역을 빼앗고 무수한 성과 백성들을 짓밟았다.

한즉 셋 가운데 하나가 성하여 나머지 둘을 괴롭힌 일은 춘추(春秋)와 한서(寒暑)가 돌고 돌 듯이

7백 년 삼한 역사에 매양 있어온 일이다.

그런데 이제 네게만 특별한 비책을 가르쳐준다면 너는 신라의 이름난 장수가 될 것이지만,

또한 백제와 고구려의 무고한 백성들은 너의 칼에 무참히 죽어갈 것이 아니냐?

이를 어찌 아름다운 일이라 하겠느냐?”

노인의 물음에 유신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대답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7장 중국손님 (34)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33)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31)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30)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29)  (0) 201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