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30)
이와 같은 일이 몇 차례 있고 나서 용화향도들 사이에선 한동안 의견이 분분했다.
유신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다른 화랑을 찾자는 쪽과 이미 생사고락을 함께할 서약을 하였으니
시일을 두고 지켜보자는 이들로 패가 나뉘었는데,
반드시 그렇지는 않았으나 대개 뒤에 입도한 신라 토박이들은 전자에 속했고,
후자를 택한 이들은 주로 가야제국의 후예들이었다.
그리하여 70여 명에 달하던 용화향도의 무리는 한 차례 내분을 겪은 뒤
고작 30명 남짓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서도 유신의 태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는 늘 같은 처지의 상수들과 어울려 폭음을 일삼으며
오로지 술과 여자로 세월을 허송할 따름이었다.
유신은 본래 금성에 상수로 붙잡혀오면서 성보의 아들 소천을 몸종 삼아 데려왔다.
그런데 유신이 술집을 전전하며 방탕한 생활을 그치지 않자
이를 가장 불만스럽게 여긴 사람이 소천이었다.
“상수 노릇을 도련님과 같이 할 양이면 뒤에 무엇이 남소?
지금 도련님이 하는 짓을 보면 과연 생각이 있는 사람인지 없는 사람인지 분간이 서질 않소.
누구에게나 청춘은 유한하고 왕성한 날은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거늘
어찌 그토록 날짜를 헛되이 보내신단 말씀이오?”
“왕경에 온 후로 도련님의 행실을 볼라치면 조상 망신과 집안 우세를 시키기에 그저 그만이오.
누가 지금의 도련님을 일컬어 백제왕의 목을 친 무력 장군의 장손이요,
가락국을 세우신 수로대왕의 예손이라 하겠소?
만일 이런 일을 하주 어른들이 아시는 날엔 무어라고 하실는지 바이 궁금하오.”
소천이 이때 열일곱으로 나이는 어리나 유신의 행동을 꼬집으며 늘 직언을 서슴지 않자
유신은 언제부턴가 이를 귀찮게 여겨 하주로 쫓아 보낼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그럴 즈음 8월 명절이 돌아와 소천이 유신을 대신해 하주에 인사를 다녀오면서
갖추갖추 싼 음식 보자기 속에 만명부인의 걱정하는 함봉서찰을 봉박아오자,
“이눔아, 대체 집에 가서 무어라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인 게냐?”
드디어는 왈칵 참았던 역정을 내었다.
유신은 만명부인의 서찰이 소천의 고자질 탓이라 믿었다.
어려서부터 유신을 집안의 맏형처럼 따르던 소천은 억울한 심정을 가눌 길 없었다.
“도련님은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신통이 터졌소,
보지도 않고 어찌 그리 잘도 아오? 거 술도 자주 먹을 만한 게요.
나는 도 닦다가 달통한 사람 말은 더러 들었어도 술 먹다가 영물이 된 사람은 도련님을 처음 보오.”
소천이 입에 잔뜩 바람을 물고 빈정대는 대꾸에 유신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긴말 필요없다! 당장 하주로 돌아가라!”
그러자 소천도 그동안 맺힌 것이 많았던지,
“가라면 가지요!
저도 도련님이 허구한날 주색에 빠져 지내는 꼴을 더는 보지 못하겠소.
집에 가면 이 소천이도 끔찍이 귀한 자식인데 밤마다 무엇하러 나보덤두 배나 무거운
술동이를 들쳐 업고 순라를 피해 천날 만날 같은 길을 바장여야 한단 말이오?”
하고는 그 길로 주섬주섬 짐을 챙겨 문을 나섰다. 소천이 저만치 가다가 다시 돌아오더니,
“믿거나말거나 할말은 해야겠소.
나는 천지신명께 맹세코 집에 가서 아무 소리도 하질 않었소.”
하고는 잠시 무춤거리다가,
“날이 찹니다. 술을 먹을 때 먹더라도 집에 군불 지필 사람은 들여놓고 먹으오.
술 자시고 남의 등에 업혀와 아궁이 들여다 보구서 불 때겠소?”
말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휭하니 떠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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