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31)

오늘의 쉼터 2014. 9. 3. 16:53

제17장 중국손님 (31)

 

 

 

 

그 뒤로 유신은 소천의 당부를 잊어버리고 살다가 불기 없는 냉골에서 고생을 톡톡히 했다.

생사를 같이하자던 벗이 죽거나 떠나도 자신은 기약 없는 볼모 신세로 개보다도 값없이

사는 판에 장작 패어 불 땔 마음 같은 건 애당초 없었는데, 하루는 느지막이 취기에서 깨어나니

사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돌연 몸에 마비가 와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불을 키대로 덮어쓰고 한참을 턱이 빠지도록 이장단을 치고 났더니 얼마쯤 지나자

이번에는 전신에 땀이 흐르고 얼굴과 가슴에선 화기가 치밀어 참을 수가 없었다.

병앓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신은 비몽사몽간에 피를 흘리며 나타난 해론을 만났다.

해론이 앓고 있는 유신을 우두커니 내려다보고 섰다가 가만히 이마를 짚으며 말하기를,

“어서 일어나시오. 우리 부자의 원수를 갚아줄 이는 천하에 오직 용화 도령뿐이오.”

하여 유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런 말 말아라. 내 볼모로 붙잡혀 술이나 먹으러 다니는 처지로 누구의 원수를 갚는단 말이냐?”

하고서,

“이렇게 살아 무엇하리. 해론아, 너 잘 왔구나. 차라리 나를 너 있는 곳으로 데려가자.”

했더니 해론이 눈을 지그시 감고 오래 답이 없다가,

“내가 사람을 잘못 보았소.”

싸늘하게 한마디를 남기고는 곧 연기처럼 사라졌다.

또 한번은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 힘든 자들이 여럿 무리를 지어 나타나서는

유신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고서,

“열훈이 도져 궐번하였구먼. 몸이 불덩이네.”

“어휴, 이 땀 좀 보게나. 병태가 예사롭지 안해.”

“상전이 이 지경이 되도록 소천이놈은 뭘 하구 있었나? 이놈, 소천아!”

하며 한동안 난리를 치기도 했다.

그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눈치였지만 고열에 시달리던 유신은

그들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른다.

유신이 제법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는 방이 훈기로 그득하고 어디선가 탕제 달이는 냄새도 났다.

언뜻 드는 생각에 소천이놈이 다시 왔나 싶어 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나갔더니

낯익은 얼굴 하나가 대접에 약을 짜고 있다가,

“어이쿠 도련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요?”

하며 잰걸음으로 달려왔다.

유신이 보기에 그가 낯은 익은데 이름이 얼른 떠오르지 않아,

“자네가 누구던가?”

하니,

“백석입니다요.

연전에 용화향도에 어렵사리 이름을 올린 백석이를 모르시겠는지요?”

하며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유신이 용화향도란 소리에 입맛을 쩍쩍 다시며,

“그래, 이제 알겠구먼. 부모 형제가 아무도 없다던 소경사람 백석이?”

하고 백석이 거짓으로 둘러댔던 얘기를 용케 기억하고서,

“그런데 자네가 어째 내 집에 있나?”

하였더니 백석이 그간의 경위를 쭉 늘어놓는데,

국원에서 부순과 석체, 호숙과 절숙 형제가 낭도들을 이끌고 다녀간 것과 금성의 상수 일패가

두어 차례 왔던 일을 말하고, 또 상수들의 연통을 전해들은 병부에서 규찰이 의원을 대동하고 와서

유신의 아픈 것을 직접 확인한 일도 아뢰고, 자신은 부순을 따라 낭도들이 올 때 휩쓸려 왔다가

병수발을 자청해 뒤에 처졌노라고 덧붙였다.

유신이 백석의 얘기를 통해 저간의 사정을 대충 헤아리고 나서,

“그새 며칠이나 지났는가?”

하자 백석이 자기가 온 지는 나흘째라 하고서,

“병부에서 나온 사람 얘기로는 지난 초이렛날부터 점고를 결하였다니

아마도 일고여드레는 착실히 고생을 하셨나 봅니다.

오늘이 보름날입니다요.”

하였다.

 

유신은 청명하게 개인 쪽빛 하늘을 눈이 부신 듯 상을 찡그리며 한 차례 치바라보고 나서

마루에 걸터앉아 백석이 짜가지고 온 약을 단숨에 들이켰다.

“병부서 나온 규찰이 뭐라 하더냐?”

“규찰은 송장 치게 생겼다는 상수들 얘기에 지레 겁을 먹었는지

저만치 대문 앞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이 제 눈에는 혹 몹쓸 질역이나 옮을까봐

그러는 것 같습디다.

또 그가 데려온 의원은 도련님을 진찰한 뒤에 젊은 사람이 음황(陰黃) 기가 있다며 혀를 찼습니다.”

“음황이라니?”

“음황이란 양기가 빠지고 음기가 성해져서 일어나는 병인데 주로 허약한 노인들이 앓는 수가 흔하지요.”

“그래서?”

“우선 처방을 하고 약첩을 지었는데, 의원 말이 족히 달포는 조섭을 해야 차도가 있을 거라 하였더니

규찰은 그제야 비딱하게 뻗정다리를 하고는 방안을 기웃거린 뒤에 저를 보구서 다 낫고 나거든

관에 연락을 하라구 그럽디다.”

백석의 말을 들은 유신의 얼굴에 돌연 희색이 번졌다.

“하면 앞으로 달포는 그놈의 병부에를 맥없이 바장이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 아닌가?”

“그렇습니다. 족히 스무날 소수는 한만스럽게 생겼습니다.”

“허허, 내 진작에 좀 아플 것을 그랬구나!”

유신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7장 중국손님 (33)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32)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30)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29)  (0) 2014.09.03
제17장 중국손님 (28)  (0) 2014.09.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