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28)
“전하께서 지난 건복 2년 을사(585년)에 3궁의 각 재소(在所)에 왕실의 예손으로
사신(私臣)을 삼은 이래로 유독 이 관직만큼은 제아무리 벼슬과 품계가 높다 하더라도
덕망이 있고 훌륭한 족친이 아니면 오르지 못하는 자리요,
또한 전하의 자별한 신임을 얻지 않고는 넘보지 못하는 벼슬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양궁의 사신을 지낸 수을부는 상대등에까지 오른 전례가 있었거니와,
이제 이것을 하나로 통합하여 용춘으로 하여금 3궁의 사신을 겸장하게 한다면
뉘라서 감히 그를 얕잡아볼 수 있을 것이며, 비록 성골이 아니라 할지언정
무엇이 부족한 것이 있겠습니까?
하물며 전하께서 거처하시는 대궁(大宮)도 결국은 그의 수중에 놓이는 셈이니
언제든 곁에 가까이 부르시어 국사를 의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소 신료들이
대궐을 드나들 적에도 반드시 그의 허락을 얻어야 하므로 세도로 쳐도 상대등이나
병부령에 결코 덜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 또한 용춘이 3궁을 지키고 있다면 비로소 근심을 덜고 베개를 높이하여 잠들 수 있겠습니다.”
그래도 왕의 안색은 그다지 밝아지지 않았다.
백반은 여전히 고민하는 왕에게 목소리를 낮추어 이렇게 속삭였다.
“용춘은 성골이란 감투가 위태롭고 거추장스럽다고 신에게 말했습니다.
이는 성골로 일생을 허무하게 보내느니 차라리 진골일지언정 벼슬살이를 하는 것이
그에게도 낫다는 뜻입니다.
임금을 도와 견마지로를 다하는데 성골이면 어떻고 진골이면 어떻습니까?
그가 원하고 신하들이 바라는 대로 해주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그제야 왕도 하는 수 없다고 느꼈던지,
“성골이건 진골이건 용춘은 하나뿐인 나의 사위다.
마땅히 상신에 버금가는 관작을 내려 대신들을 통솔하고 조정의 대소사를 도맡게 하리라!”
하니 백반이 만면에 득의양양한 웃음을 띤 채로,
“여부가 있겠나이까. 뜻대로 하시옵소서.”
하며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이튿날 왕은 용춘과 천명 내외를 대궐로 불러들여 그 뜻을 확인한 뒤
즉시 탑전하교(榻前下敎)로써 만조에 고하기를,
용춘 한 사람으로 3궁의 사신을 겸하게 하고 그 직명을 일컬어 내성사신(內省私臣)이라 하니,
사신이란 왕실 족친의 일원으로 신하를 삼는 것이요,
비록 그 권한이 3궁을 살피는 일에 한정되었다고는 하지만 종묘에 제사를 받드는 일에서
어전을 출입하고 왕명을 출납하는 기밀사무에 이르기까지 궐내의 만사를 두루 관장할 뿐 아니라,
대궁에서 어전 회의가 열릴 때에도 왕의 좌우에 상신과 나란히 앉아 국사를 논하여
그 권위와 세도가 백공의 윗자리에 놓이게 되었다.
이로써 부마 용춘은 기나긴 은둔 생활을 마감하고 벼슬길에 오르니
때는 바야흐로 임오년(622년) 2월, 그의 나이 쉰여덟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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