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25)

오늘의 쉼터 2014. 9. 3. 11:43

제17장 중국손님 (25)

 

 

 

 백반은 홀연 만시름이 걷히면서 아울러 자신이 당장 임금이라도 된 듯한 황홀감에 빠졌다.

하지만 금세 정신을 가다듬고 안타깝기 그지없는 낯을 해보였다.

“자네의 뜻이 정 그렇다면야 하는 수 없지만 우정 그래야만 하겠는가?”

그러면서도 그가 더 이상 만류하지 않은 것은 어렵게 결심한 용춘의 마음이 혹시라도

변할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다.

“부탁입니다.”

“나중에라도 후회하지 않겠는가?”

“그럴 일은 없을 겝니다.”

백반은 꽤나 시간을 끌며 앉았다가 이윽고 길게 한숨을 내질렀다.

“알었네. 아우님이 오래 고민해서 내린 결정인 듯하니 내가 힘 닿는 데까지 돕지.”

“고맙습니다, 형님.”

그러자 백반은 문득 자세를 고쳐 앉으며 호탕하게 소리치기를,

“자, 그건 그렇고 아무튼 잘 오셨네!

우리 종형제가 이처럼 만나 좁게는 육친간의 회포를 풀고 넓게는 계림 왕실의 번듯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마당인데 어찌 술 한잔이 없을손가?”

하고서,

“아우님, 오늘은 우리 둘이서 밤새 마셔보세나!”

하며 용춘의 손을 굳게 그러쥐었다. 용춘도 이를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지요. 오늘 같은 날 마시지 않으면 언제 또 마시겠습니까!”

이리하여 용춘과 백반은 그날 밤이 깊도록 권커니잣거니 술을 마셨다.

백반으로선 뜻하지도 않은 복이 절로 굴러들어온 셈이라 마음이 날아갈 듯했고,

평생 맞수였던 용춘을 마침내 꺾어 눌렀다는 묘한 승리감도 느꼈다.

승자의 여유였을까, 그러구러 진심으로 용춘을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용춘은 용춘대로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밤이었다.

자신의 당대에서 일이 끝날 것만 같으면 모함을 받건 자객이 설쳐대건 개의치 않을 용춘이었다.

또 이왕지사 그렇게 한평생을 살아온 사람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발로 백반을 찾아와

굴욕을 감수하고 머리를 조아린 것은 아들 춘추 때문이었다.

용춘은 춘추가 당나라로 떠나며 했던 말을 듣고야 비로소 자신이 죽고 없어진 후

 춘추가 살아갈 일을 짐작해보게 되었다.

그 오랜 번민의 끝에서 마침내 그는 자식을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진골이 된다면 춘추는 더 이상 자신과 같은 인생을 살지 않아도 되리라.

이것이 용춘이 내린 결론이었다.

백반은 술자리에서 내내 용춘을 위로하다가 나중에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걱정말게나 아우님. 내 주상께 말씀을 드려 설혹 자네와 춘추가 진골이 되더라도

나라의 법제에 구애받지 않고 살도록 힘써보겠네.

아무렴,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일국의 하나뿐인 부마요,

무엇보다 이 백반의 귀한 아우가 여느 진골과 같은 취급을 받는대서야 말이나 되는가?

하니 성골이니 진골이니 하는 것에 너무 개의치 마소! 자네와 춘추의 앞날은 금상이 아니더라도

내가 책임을 지겠네!”

하며 입찬소리를 늘어놓았다.

사실 진골이 되면 당장 왕권에서 멀어지는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여러 가지 제약과

불편함이 뒤따르게 마련이었다.

나라에서 주는 녹읍도 그만큼 덜 받게 되고, 사는 집이며 입는 옷,

타는 수레와 심지어 집안에서 쓰는 자잘한 가재도구에 이르기까지 법에 정해진 제한과 금기가

따로 있었다.

신라에서는 오직 성골만이 무한한 자유를 누렸으며 진골부터는 신분에 따라 차등을 두었으므로

진골이 된다는 것은 국가가 허락한 모든 특권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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