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24)
“실은 진작부터 문후도 여쭙고 육친의 정을 나누며 살고 싶었으나 만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죄인의 몸인지라 혹 형님께 누가 될까봐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하나 이제 나이가 들어 돌아보니 옛일은 모두가 바람에 날려간 먼지 같은 것이요,
남은 것은 젊어서부터 형님께 함부로 대한 태산 같은 허물뿐입니다.
세월이란 참 무상한 게지요.
지금 보니 형님도 어느덧 반백이 되었고 저 역시 그렇습니다.
젊어서는 인생이 짧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지 못했는데 그 홀연하기가 마치 풀잎에 매달린
이슬이 마르는 것과 같고, 말이 달리는 것을 문틈 새로 보는 것과 하나도 다를 게 없습니다.”
“아무렴. 중천을 넘은 해지. 사람의 일생이 과히 긴 것이 아니야. 허무하고말고.”
백반이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타고난 팔자가 기험하여 어린 나이로 부왕이 폐위되는 엄청난 난리를 겪었고,
그 바람에 한때는 세상과 족친을 원망한 적도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천지신명께 맹세코 역모 같은 것은 꾸민 일이 없습니다.
만일 그럴 마음이 있었다면 제 어찌 천명과 혼례를 올리고 한집에서 살겠습니까?”
뒤늦은 용춘의 변명에 그 내막을 누구보다 잘 알던 백반은 돌연 무참한 기분이 들었다.
“하하, 알지. 알다마다. 모다 사직을 위해 일을 하다 보니 그랬던 게지……”
백반이 돌연 겸연쩍게 웃으며 몇 마디를 내뱉고서,
“그때는 금상께서 보위에 오르신 지 얼마 아니된 때고, 다들 신임을 다투던 시기라
더러 근거 없는 오해도 있었을 거네. 게다가 조정의 중신들이란 게 쓸데없는 말을
물어내는 데는 명수들이니까.
그 뒤로 누가 그 얘기를 하면 나도 야단을 친다네.
부질없는 과거지사이니 과히 신경을 쓰지 마소.”
하며 자신과는 전혀 무관한 일처럼 둘러댔다. 용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젊어서도 그랬거니와 하물며 이제 늙바탕에 무슨 욕심이 따로 있겠습니까.
저는 예나 지금이나 금상 전하의 왕업이 번창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요,
또 하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어서 춘추놈을 성취시켜 손자를 무릎에 앉혀보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제가 무슨 불경한 마음이나 품고 있는 것처럼 자꾸 말들을 퍼뜨리니
형님께서는 그 연유가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정곡을 파고드는 질문에 백반은 잠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글세……”
백반이 대답을 미루자 용춘은 어제 자신을 해치려는 자들이 있었음을 차분한 음성으로 털어놓았다.
얘기를 들은 백반은 돌연 주먹으로 상을 내리치며 벼락같이 고함을 질렀다.
“저런 쳐죽일 놈들이 있나! 대체 어떤 놈들이 그랬단 말인가?”
백반이 한동안 노기등등해서 설쳐대는 것을 용춘은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을 따지자고 온 걸음이 아니었다.
“저의 충심을 의심하는 자들이나 심지어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생기는 것은
첫째는 저의 부덕한 탓이지만, 한편 그 까닭을 곰곰이 짚어보니 금상께 적자가 없는 때문인 듯합니다.
적자가 없으니 후사가 만인의 입초시에 오르내리는 것은 당연지사요,
그로 인해 전왕의 적자이자 부마인 제게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모양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씀드려 저는 보위에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형님께서 전하께 잘 말씀드려 저의 성골 품계를 거두고
대신 진골로 살 수 있도록 주선해주십시오.”
용춘의 느닷없는 제안에 백반은 꿈인지 생신지 모를 만큼 정신이 아득해졌다.
날이 밝으면 바로 그 일을 꾸미러 입궐하려던 판국에 용춘이 제 발로 찾아와 품계를 강등시켜달라니
백반으로선 호박씨를 심으러 나가려다가 다 자란 호박을 넝쿨째 얻은 격이었다.
하지만 당석에서야 어찌 좋은 표시를 낼 것인가. 짐짓 본심을 감추고 놀란 듯이 이르기를,
“거 무슨 당치 않은 말씀인가? 일국의 부마요 금상의 종제인데 품계를 깎아내리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일세!”
하니 용춘이 거듭 말하기를,
“형님께서 이 가엾은 아우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걱정하신다면 그렇게 해주십시오.
이는 위신과 체면의 문제가 아니라 저희 부자의 목숨이 달린 일입니다!”
하고서,
“어제는 요행수를 만나 명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저를 죽이려 했던 무리가 앞으로도
생겨나지 말란 법이 없고, 다음번에 같은 일을 당하면 필경은 비명횡사의 참혹한 신세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또 저에게 그러할진대 춘추 역시 그 같은 변을 안 당하란 보장이 있겠습니까?
성골이란 임금이 되지 못할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숫사슴의 뿔과 같아서 오히려 위험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입니다.
형님께서는 저희 두 부자의 앞날을 생각하셔서 부디 제 소원을 들어주십시오.
하면 그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않겠습니다.”
하며 재차 간곡한 어조로 설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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