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26)
어쨌거나 용춘은 이런 과정을 거쳐 백반과 벌인 오래고 지난한 싸움을 끝냈다.
백반도 더 이상 자신의 적수가 아닌 용춘에 대해 예전 같은 경계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자신의 입으로 용춘의 품계를 거론한다는 것이 어딘지 께름하여 칠숙이 낸 계책을 쓰기로 했다.
용춘이 다녀간 이튿날 백반은 대궐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사뭇 진심 어린 말투와 표정으로
용춘을 중용할 것을 간청했다.
누구보다 두 사람의 불편한 사이를 알던 왕은 난데없는 백반의 제안에 어리둥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우가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다 했던가?”
이에 백반은 사뭇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신은 오래전부터 이런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이 평생을 바쳐 오로지 근심하고 걱정해온 것은 국사요 또한 전하의 왕업입니다.
젊어서 용춘을 경계한 까닭은 그의 불경한 마음 때문이지 어찌 다른 이유가 있었겠나이까?
그러나 이제는 용춘도 나이가 들어 반백을 넘겼고, 오랫동안 죗값을 치르며 근신하였으므로
더는 딴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며, 그렇게 본다면 용춘만한 인재도 흔하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게다가 춘추의 자질이 영특하고 비범한 데가 있어 바다 건너 중국에서까지 칭송이 자자하다고 하니
이 어찌 전하와 왕실의 홍복이 아니겠는지요?
이제 그만 지난날의 허물을 용서하시고 그들 두 부자에게 벼슬길을 터주어 안으로는
내정의 어지러움을 다스리고 밖으로 실추된 국위를 선양케 한다면
이는 신이 전하를 도와 왕업을 일으켰던 소싯적부터 초지일관 일념으로 바라던 일이올시다.
왕실의 위엄이 예전 같지 아니한 때에 신이 없는 조정에 용춘이 있어 전하를 성심으로 보필한다면
신은 비록 조석으로 문후를 여쭙지 못하더라도 마음이 절로 편안하겠나이다.”
백반은 시종 온화한 표정과 부드러운 말투로 늙은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백정왕은 무엇보다 춘추를 칭찬하고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백반의 제안에 크게 감동했다.
기실 춘추의 장래를 남모르게 걱정하면서부터 사위 용춘에게 벌써부터 벼슬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았던 왕이었다.
“그대의 충절과 근친을 위하는 마음이 실로 아름답기 그지없도다!
내 어찌 아우의 고매한 뜻을 저버리겠는가!”
왕은 크게 기뻐하며 용춘에게 파진찬 벼슬을 내리기로 하고 대신들을 탑전에 소집해
마땅한 직책을 물었다.
그러나 이러한 날이 올 것을 미리 알고 때를 기다리던 대신들이었다.
상대등 임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용춘공으로 말하면 전날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어 벼슬길에서 쫓겨난 사람입니다.
그가 비록 오랫동안 은둔하면서 매사에 조신하고 깊이 뉘우쳐온 점은 신 등도
익히 들은 바가 있으나 아무리 그렇기로 이제 다시 불러내어 조정의 대사를 맡기는데
어찌 뒷날에 대한 방책이 없으오리까?
관작을 내려 벼슬길을 잇게 하는 것은 신도 반대하지 않겠지만 그러자면 마땅히
그의 품계를 진골로 낮추어 차후로는 두 번 다시 불경한 마음을 품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줄로 압니다.”
임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리의 위계 사무를 맡아보던 위화부 대신 대일이 간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상책은 용춘공에게 나랏일을 맡기지 않는 것이나 굳이 대왕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병권과는 무관한 직책을 찾아야 할 것이요,
무엇보다 보위를 넘볼 수 있는 성골 품계로 국사에 참여하는 것만은 막아야 할 것입니다.
진골로 낮추심이 천 번 만 번 지당합니다.
통촉하여줍시오.”
대일의 뒤를 이어 간한 자는 국가의 기밀사무를 맡아보던 품주대신 월종이었다.
“시조대왕께서 계림에 나라를 여신 이래로 골품제를 둔 까닭은 골제로써 왕실의 적통을 유지하고
두품으로써 조정의 위계질서를 삼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오직 우리 신라에만 있는 아름다운 제도로서 사람의 종자와 근본을 가려 달리 쓰기 위함인데,
세월이 흐르며 더러 격에 맞지 않은 집을 짓고 살거나 신분에 어긋나는 세도를 부려 국법을 문란하게
하는 자들이 없지 아니하므로 나라에서는 수시로 이들을 적간하였고, 만일 위법한 사실이 드러나면
그 품계를 깎아내리는 것은 고금에 매양 있어온 일이옵니다.
전날 용춘공의 일도 결국은 국법을 어지럽힌 것이므로 이에 따라 처리하시면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대신들의 한결같은 진언에 왕은 기가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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