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22)
이튿날 아침,
용춘은 그 아버지 진지대왕의 능이 있는 영경사 북봉을 다녀와서 해거름에는
난생 처음으로 백반의 사가를 찾았다.
한편 백반은 이즈음 또 한 사람의 병부령인 꾀보 칠숙의 제언에 귀가 솔깃해져 있었다.
“용춘공을 죽여 없애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후에 금왕 전하의 마음이 어디로 흐르리라는 것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나리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전조에 진흥대왕께서 나리의 선친으로 하여금 왕태자를 정하여
세운 선례가 아닙니까?”
칠숙은 과연 뛰어난 책사답게 백반의 우려하는 바를 정확히 꼬집었다.
아닌게 아니라 용춘과 춘추 부자의 일로 고민을 하면서부터 백반은 갈수록 자신의 조부인
진흥대왕의 처사가 원망스러웠다.
그 이전까지 국법에는 국상이 나면 선왕의 장례를 치른 뒤 오직 화백에서 후왕을 결정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이것을 뜯어고쳐 금왕이 생전에 왕태자(王太子)를 정한 선례가 바로 진흥대왕 시절에 있었다. 비록 몸이 병약하여 일찍 죽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신라 역사에서 최초의 태자가 되었던
인물이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아버지 동륜(銅輪)이었으니,
백정왕이 이제 그 선례를 밟아 용춘이나 춘추로 후왕을 결정해버리면 그걸로 그만이었다.
물론 용춘이나 춘추가 왕의 적자(嫡子)가 아니므로 중신들의 입을 빌려 이의를 제기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게 따지자면 아우인 자신도 자격이 없기로는 매한가지였다.
백반의 당황하는 기색을 알아차린 칠숙은 한층 차분한 소리로 말을 보탰다.
“이는 금왕께서 언제라도 결심만 선다면 하루아침에 후왕을 정할 수가 있고 그럴 경우 나리께서
믿고 계신 화백은 아무 쓸모가 없는 무용지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만일 용춘이 죽는다면 그러잖아도 춘추를 귀애하는 전하의 마음이 과연 어디로 쏠리겠습니까?
더욱이 아버지를 잃은 춘추가 세간의 동정심마저 불러일으킨다면 전하께서는 틀림없이
이를 핑계 삼아 춘추에게 보위를 물려주려 할 것입니다.
따라서 용춘을 죽여 없애는 것은 하책 중에도 하책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하면 공에게 다른 상책이 있는가?”
“나리께서는 용춘공 부자를 아예 왕통에서 멀어지게 만들 손쉬운 방법이 있는데
어찌하여 이것을 쓰지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체 그것이 무어란 말인가?”
“용춘공에게 적당한 벼슬을 내려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이는 방법입니다.”
칠숙의 돌연한 대답은 백반을 잠시 의아하게 만들었다.
“용춘이 물외한인으로 지내도 그 존재가 나를 끊임없이 위태롭게 하는 판국에
그를 조정으로 불러들여 벼슬을 내리자니 나는 아무래도 공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겠네.
이는 철창에 갇힌 맹수를 울안에 풀어놓고 날개까지 달아주자는 격이 아닌가?”
백반이 미간을 찌푸리며 되묻자 칠숙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조용히 일렀다.
“신이 어찌 아무런 대책 없이 용춘공에게 벼슬을 주자고 하겠습니까.
나리께서 오랫동안 용춘공을 배척하시고 이제 또 춘추의 일로 근심하시는 까닭은
오직 왕통 때문이올시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 부자가 아예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만 해둔다면 나리께서
걱정하실 일은 하나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는 맹수의 이빨과 발톱을 뽑고 거세까지 해버리자는 뜻이옵니다.”
“좀 소상히 말해보오! 어떻게 왕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한단 말이오?”
백반은 무릎을 당겨 앉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벼슬을 주는 대신 품계를 아예 진골로 낮추는 것입니다.”
칠숙이 눈빛을 빛내며 나지막이 대답하자 일순 백반의 두 눈이 왕방울만하게 벌어졌다.
그것은 여지 껏 단 한 번도 생각해본 바가 없던 계책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야 당장에 먹는 것이 모두 살로 가겠네만……”
그는 금세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칠숙을 빤히 노려보았다.
그러나 스스로도 황당하다고 여겼는지 이내 고개를 맥없이 가로저었다.
“하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용춘은 임금의 사위요, 일국의 부마일세.
국서의 품계를 무슨 재주로 깎아내린단 말인가?”
“물론 처음부터 그런 주장을 편다면 일은 성사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격식을 갖추고 순서를 제대로만 밟아간다면 능히 그럴 수가 있는 일입니다.”
칠숙은 못미더워하는 백반을 상대로 비로소 계책을 소상하게 털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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