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21)
아무리 살펴봐도 살아날 길이 없었던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을 끝없이 위협하던 세상의 추악함에 환멸을 느낀 탓일까.
용춘은 스스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감았다.
젊은 검객 중 성질이 급한 일수가 막 칼날을 휘두르려 하자 절두가 황급히 손을 들어
일수를 막고 자신이 칼을 뽑아 들었다.
칼질 한 번이면 천하에 다시없는 대공을 세울 판인데 그 중대한 일을 남에게 뺏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승에 가서도 나를 원망하지 마오.”
“알았네. 단번에 끝내주시게나.”
절두의 말에 용춘이 눈을 감은 채로 대답했다.
그런데 용춘의 그 대답이 미처 끝나기도 전이었다.
떨어지는 폭포 물길 아래에서 갑자기 무엇인가가 맹렬한 기세로 하늘을 박차고 튀어올랐다.
순간 칼을 든 세 사람은 동시에 그 물체를 바라보았다.
“악!”
그렇게 비명을 지르며 폭포수로 굴러 떨어진 자는 벼랑 가까이 서 있던 일수였다.
물에 빠진 일수가 양팔을 허우적거리며 무자맥질을 하는가 싶더니
이내 무거운 돌이 가라앉듯 수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절두가 불거진 눈알을 굴리며 도개를 바라보았으나 어리둥절하기는 도개도 매한가지였다
.
“무언가 물에서 튀어나온 것은 분명한데 그게 무언지를 모르겠습니다.”
“무슨 짐승 같지 않더냐?”
“폭포에 무슨 짐승이 살겠습니까?”
두 사람은 잔뜩 경계하는 자세로 고개를 조심스레 내밀고 일수가 휘어박힌
가파른 벼룻길 근처를 기웃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두 사람의 얼굴이 비치던 벽계의 수면이 잠시 일렁이는가 싶더니
그곳에서 다시 방금 전의 그 물체가 쏜살같이 튀어올랐고,
이번에는 절두가 비명을 지르며 첨벙 물 속으로 이끌려 들어갔다.
혼자 남은 도개가 기겁을 하며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어떤 놈이냐!”
당대 제일의 검객인 도개도 정체불명의 상대 앞에서는 겁에 질려 목소리가 둘로 갈라졌다.
하지만 대답은 없고 도개 자신의 음성만 폭포 물소리에 섞여 불길한 메아리로 돌아올 뿐이었다.
이제 도개는 용춘을 죽이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셋이 있다가 둘이 사라졌으니 다음 차례가 자신인 것은 너무나도 뻔한 일이었다.
도개가 물 속을 향해 눈이 벌개서 설쳐대고 있을 무렵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숲길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러자 도개는 자신의 얼굴이 알려질 것을 두려워하여 칼을 든 채로 길도 아닌 숲 속으로 내달았다.
용춘은 그때까지도 폭포수 벼랑의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난데없는 소란에 눈을 뜨고 두 자객이 물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을 보기는 했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용춘의 그때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눈에서는 까닭 모를 눈물마저 왈칵 솟구쳤다.
도개가 숲으로 달아나고 조금 있으려니 갈건에 여우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은 사람이
활을 들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바위 위에 망연자실 걸터앉은 용춘을 발견하고는 가까이 다가왔다.
“혹시 여기서 도망치는 숫사슴을 보지 못했소?”
사내가 대뜸 물었다.
용춘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그는 원통하다는 듯 발로 땅을 치며 중얼거렸다.
“그놈 참 뿔이 멋들어졌는데. 하긴 그런 뿔을 가지고 운문산,
가지산을 돌아다니다간 언제고 내 손에 붙잡힐 날이 반드시 있을 테지.”
사내는 말을 마치자 다시금 용춘을 힐끔 훔쳐본 뒤 내처 산자락을 타고 아랫길로 내려갔다.
용춘은 낯선 사내가 남기고 간 말에서 별안간 한줄기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것은 무슨 화두와도 같이 용춘의 뇌리에 박혔고, 이어 캄캄하던 시야가 한꺼번에
환하게 열리는 듯한 희열에 사뭇 경미한 전율마저 일었다.
한참을 그렇게 목불처럼 앉아 있던 용춘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폭포수 아래로 내려와 섰다.
“비형이더냐……”
용춘이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물 속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고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 소리만 더욱 요란하게 들려왔다.
“진골로라도 살아란 말이지……”
그래도 여전히 아무 대꾸가 없었다.
용춘은 한참 동안 벽계의 푸른 물빛을 내려다보고 섰다가 가만히 발길을 돌렸다.
그리곤 원광을 만나려던 생각을 바꾸어 다시 금성으로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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