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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중국손님 (20)

오늘의 쉼터 2014. 9. 2. 17:25

제17장 중국손님 (20)

 

 

 

 

염종은 백반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적이 실망했다.

그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마침 사랑채에는 사찬 절두와 그의 처남 진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염종이 투덜거리며 백반의 집에서 일어났던 얘기를 털어놓자 절두는 가만히 있는데 진제가

눈빛을 반짝거리며 말했다.

“그런 문제는 백반 나리께서 허락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백반 나리는 언젠가는 보위에 오르실 어른이 아닙니까?

그런 분이 뒤탈을 걱정하는 것은 당연지사요,

더욱이 자신의 족친을 죽이는 일에 어떻게 드러내놓고 앞장을 설 수 있겠습니까?”

“하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나리께서 앞장을 서셔야지요.

이런 건 죄 밑엣사람들이 알아서 해야 할 일입니다.

백반 나리께서 정말 마음이 없었다면 나리를 꾸짖었을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반승낙은 떨어진 걸로 봐야 합니다.”

진제의 말에 염종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을 때 절두가 그 처남의 말을 두호하여 이렇게 덧붙였다.

“듣고 보니 진제의 말이 옳습니다.

만일 나리께서 일을 독단으로 처리하여 용춘을 없애버리고 나면 누가 그 공을 덮을 수 있겠습니까?

앞길을 닦는 데 이보다 더 확실한 일은 없지 싶습니다.”

염종은 잠시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들의 말이 옳으이. 아, 내 비로소 오래전 비명에 가신 형님의 원한을 풀게 되었구나!”

사사롭게는 원수를 갚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의 출셋길까지 닦아놓게 되었으니

가히 일거양득이 아닐 수 없었다. 염종이 마음을 도슬러먹자

이를 보고 있던 절두가 자신도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났다.

“그 일은 소인에게 맡겨주십시오.

그야말로 귀신도 모르게 용춘을 해치우겠습니다!”

눈알이 유난히 불거져서 덫에 치인 쥐눈처럼 생긴 절두는 염종의 휘하에서도

그 무예를 상치로 꼽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염종은 절두의 나이가 많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같은 일은 두 번 할 것이 아니니 한번 손을 대면 단숨에 끝장을 봐야 하네.

내가 자네를 못 믿는 바는 아니지만 도개(陶芥)와 일수(佚首)를 데려가게나.”

도개와 일수는 병부의 무인으로 군사들에게 검법을 가르치던 당대 최고의 검객들이었다.

절두는 공을 갈라 세우는 듯하여 내심 성에 차지 않았지만 상명이 지엄하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나라 사신이 돌아가고 나서 달포쯤 흐른 뒤, 용춘은 혼자 산행에 나섰다.

다른 때 같았으면 출렵 장비를 갖추어 나갔을 테지만 때는 바야흐로 겨울이었고,

또한 사냥보다는 그즈음의 이런저런 단상(斷想)들을 정리하자는 마음에서 빈손으로 말에 올랐다.

그는 운문산으로 가서 원광을 만나본 뒤 김서현의 임지인 하주를 들렀다가 낭지가 있는

취산으로 해서 귀경할 계획이었다.

용춘이 집을 나서는 순간 이 소식은 곧 염탐꾼을 통해 절두에게 알려졌고,

절두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도개와 일수에게 급히 연락을 취했다.

이런 사실을 알 길 없던 용춘은 번잡한 경사의 경계를 벗어나 추화군의 첩첩한 산기슭에 다다랐다.

겨울이라지만 날씨는 포근한 편이었다.

군데군데 눈이 쌓인 한적한 산길을 따라 한참을 걷다가 물소리가 요란한 폭포수 옆 바위 위에

걸터앉아 막 이마에 맺힌 땀을 씻으려 할 때였다.

“거기 계시는 분은 혹 용춘 나리가 아니시오?”

산길을 타면서부터 귀에 자꾸만 누군가가 뒤를 밟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려와 수상하다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등 뒤에서 험상궂게 생긴 장정들이 나타나 목자를 검측스레 부라리며 물었다.

순간 용춘은 자신에게 닥쳐온 살의를 직감했다.

그 또한 오래 무예를 익힌 몸이었다.

“그렇네만, 뉘신가들?”

하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고 태연히 반문했다.

장정들은 모두 셋이었고 언뜻 보기에도 하나같이 몸에 칼들을 지니고 있었다.

셋 가운데 눈알이 튀어나오고 제일 나이 들어 보이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초면에 퍽 유감스럽지만 나리께선 그만 이승을 하직하실 때가 되었소.”

하고 야릇한 웃음을 흘렸다.

용춘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나를 치겠단 말인가?”

“그렇소.”

“누가 보냈는가?”

“그거야 알 거 있소?

모두가 사직의 평안함을 위한 일이니 일국의 부마답게 조용히 칼을 받으시오!”

말을 마치자 사내는 동행한 두 젊은 검객에게 눈짓을 보냈고 신호를 받은 두 사람은

번개같이 칼을 뽑아 용춘을 좌우에서 에워쌌다.

용춘은 호신용 칼을 지니고 나오지 않은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이제 도망갈 데라곤 한 길 높이에서 세차게 떨어져 내리는 폭포수뿐이었다.

“허허.”

그래도 용춘의 태도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죽음을 코앞에 둔 사람이라곤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허공을 향해 두어 번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던 그가 문득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다 운명인 모양일세. 그래, 세상을 하직할 운이라면 가야지.

다만 장부로 태어나 싸움터에서 죽지 못하는 것이 천추의 유한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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