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18)
신사년 7월,
춘추는 왕실에서 마련해준 방물을 싣고 눌최와 함께 중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왕은 못내 걱정이 앞서 선부에 명해 관선을 내려 하였으나 춘추가 그렇게 되면
은밀함이 없어진다고 굳이 당항포에서 떠나는 상선 편을 이용하겠노라 고집을 부렸다.
일은 결국 춘추의 고집대로 되어 먼저 방물을 실은 수레가 금성서 당항포로 떠났는데,
짐이 떠나고 닷새쯤 후에 금성을 출발한 사람은 모두 넷이나 되었다.
일행이 그처럼 불어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었다.
우선 왕명으로 춘추를 호위하게 된 눌최가 떠나기에 앞서 춘추를 보고,
“신에게 종놈이 하나 있는데 비록 그가 신분은 비천하나 활을 쏘는 솜씨가 꽤나 신통하여
옛날부터 종명궁이란 별칭을 얻은 자입니다.
만일 그 자를 데리고 간다면 도령님의 안위에 적잖은 보탬이 되지 싶습니다.”
하고 청하여 춘추가,
“아무렇게나 하세.”
하고 허락하니 종명궁 벌구가 따라 나서게 되었고,
나머지 한 사람은 알천 밤나무집의 설계두(薛?頭)였다.
눌최, 해론과 함께 용화향도의 일원이던 계두는 해론이 죽은 뒤부터 자주 세상사를 한탄하였는데,
그 뒤에 오랫동안 백정왕을 섬겨온 숙부 담날이 간신배의 탄핵을 받아 관직이 삭탈되고 연하여
아버지인 문보마저 벼슬을 내놓고 물러나자 크게 낙담해 여러 날을 주색으로 소일하였다.
그즈음 계두는 금성에서 수년째 상수(上守:볼모)로 숙위하던 용화와 자주 어울렸다.
그날도 해거름에 집을 나서서 역시 같은 낭도인 비녕자(丕寧子)와 함께 평소 용화가 잘 찾던
객줏집에를 가니 마침 친구인 눌최가 하직 인사차 와서 네 사람이 술판을 벌였다.
“어허, 자네마저 중국으로 간다고?”
시종 애운하고 섭섭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계두는 술이 몇 순배 돌고 나자
별안간 큰 소리로 외쳤다.
“까짓, 나도 함께 가세나! 이놈의 빌어먹을 나라는 인재를 등용할 때
오직 골품으로써만 논하여 처음부터 명문의 족속이 아니면
제아무리 큰 재주와 걸공이 있다 하더라도 태초의 한계와 족쇄를 벗어날 수가 없으이.
게다가 근년에 이르러 우리 설씨 일문이 줄줄이 백반에게 밉보인 마당이라
내가 여기 있어본들 앞으로 무슨 희망이 있고, 재미가 있을 것인가?”
계두는 취기를 빌려 평상에 자신이 품고 있던 제도에 대한 불만과 스스로의
신세 타령을 질펀하게 늘어놓은 뒤에,
“나는 차라리 이런 곳을 떠나겠네.
집에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전날 대세와 구칠이라는 어른은 진골 품계도 버리고 바다로 달아나
이제 중국에서 크게 성공을 했다는데,
나라고 그리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큰 뜻을 품은 자는 넓은 땅으로 가야 마땅하네.
지금 서쪽 중국에는 수왕조가 망한 뒤 여러 무리가 창업을 다투고 있다 하니
그곳에 가서 전도가 양양한 한 무리를 택해 비상한 공을 세우고 영화의 길을 닦는다면
나의 자손들은 한결 부귀와 복록을 누리게 될 것이 아닌가?”
하고 반드시 잠신패검(簪紳佩劍:귀인의 옷과 칼)을 갖추고 천자의 곁을 출입하는 사람이
되겠노라며 기염을 토했다.
계두의 돌연한 말에 눌최와 비녕자가 깜짝 놀라,
“부모형제를 저버리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이 친구가 술이 과하였구만.”
“행여 그런 소릴랑 마소. 집에서 알면 난리가 나겠소.”
하며 만류했지만 계두는 출가하는 사람들의 경우를 예로 들며 굳이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삼자가 한창 설왕설래하던 끝에 상석에 앉은 용화를 보고,
“도령님의 뜻은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지만 용화는 끝내 아무 대꾸도 없이 묵묵히 술만 마셨다.
자신의 송별연을 곁들인 이날 술판이 끝날 때까지만 해도
눌최는 계두가 취한 기분에 그러려니 하였는데,
막상 금성을 떠나는 날이 되자 계두가 정말로 바랑을 짊어지고 나타나서,
“금성에 있어봐야 주색밖에 벗할 것이 아무것도 없네.
내가 집에는 아우한테다 말을 남겼고,
꼭두새벽에 용화 도령을 찾아가서도 허락을 얻었네.”
하였다.
당나라로 가는 춘추 일행이 갑자기 넷으로 불어나게 된 사연은 이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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