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19)
그러나 이 일은 용춘과 춘추 부자에게 예기치 못한 곡절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화근이 되었다.
그해 초겨울이 되자 춘추 편에 방물을 받은 당고조(唐高祖) 이연이 이를 크게 기뻐하며
금성으로 사신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연은 답례로 친히 쓴 서찰 한 통과 그림이 그려진 병풍,
그리고 3백 필에 달하는 비단까지 함께 보냈는데,
이때 이연의 심부름으로 당에서 온 사신이 통직산기상시(通直散騎常侍) 유문소(庾文素)란 이였으니,
그는 전날 구칠과 더불어 용춘의 집에 머물다 갔던 유광의 형이었다.
왕을 배알한 유문소는 백정왕과 신라 조정에 대한 당고조의 각별한 우의를 전하면서
특히 춘추의 성품과 자질을 침이 마르도록 극찬했다.
그는 춘추를 시종 왕자(王子)라고 칭하면서,
“저희 황제께서는 춘추 왕자의 인물됨을 일컬어 천하에 보기 힘든 기재라 하시며,
동방에는 여러 소국들이 있으나 이로 미뤄볼 때 신라는 과연 대국이라 하였습니다.
왕자께서는 장안에 오신 이래로 본조의 많은 사람들과 서회하였는데,
유불선의 삼교를 논하시고 군신의 도리와 생사의 이치를 두루 말씀하시매 만사를 통섭하여
어느 한 군데에서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춘추 왕자의 식견과 학문은 오히려 경사의 늙은 신하와 학인들을 가르칠 정도였습니다.”
하고서,
“신이 이처럼 급히 대왕 전하를 뵈러 온 것도 황제께서 춘추 왕자의 인품에 크게 감복하신 때문이올시다. 왕자께서는 매양 대왕 전하를 하늘처럼 높이 말씀하시고 또한 본조에는 춘추 왕자의 부친인
용춘공의 명성이 자자하므로 황제께서는 특별히 신을 보내어 현자가 다스리고 영걸이 가득한
신라를 샅샅이 둘러보고 오라고 하였나이다.”
하고 말하기까지 하였다. 유문소를 만나본 백정왕의 입은 있는 대로 벌어졌다.
그는 만조의 백관들이 보는 앞에서 시종 웃음을 감추지 못하고 크게 기꺼워하였다.
그러나 사신의 말 가운데 용춘의 명성이 당나라 조정에 자자하다는 것이 언뜻 납득하기 어려워,
“과인의 사위 용춘은 비록 덕망이 높고 장부의 기개가 뛰어난 인물이나 오랫동안 관직을 맡지 않아
밖으로 알려질 기회가 없었는데 어찌하여 수만리 떨어진 대륙의 신생 조정에서
그 이름이 널리 회자된다는 말이오?”
하고 물으니 유문소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매혹적인 사향의 냄새는 겹겹이 싸서 감추어도 그 향기가 집안에 진동하는 법입니다.
금성의 하늘에 뜨는 달이 장안의 밤을 밝게 비추는 것을 어찌 수상하다 하오리까.
다른 사람은 다 그만두고 신의 경우만 해도 오래전부터 용춘공의 존함을 우레같이 듣고 있었나이다.”
하였다.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아니하였다.
유문소는 왕이 영객부에 말해 정해준 숙소를 굳이 마다하고 우정 용춘의 사저에서 묵기를 소원했다.
이 사건은 대신들의 입을 통해 즉시 왕제 백반에게 전해졌다.
그는 날로 자신의 앞날을 위협하는 용춘과 춘추 부자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잖아도 왕실 내부의 든든한 후원자이던 만호 태후를 잃고 한창 예민해져 있던 백반이었다.
“나리께서는 무엇을 그토록 근심하십니까?
용춘이란 자는 젊어서부터 계림의 우환이었습니다.
그를 처치하지 않고는 결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니
차제에 자객으로 하여금 고민하시는 후사 문제를 말끔히 매듭짓도록 하십시오.”
그렇게 권한 사람은 서른을 갓 넘긴 나이로 병부령과 사량궁 사신직을 겸하고 있던 파진찬 염종이었다. 물론 염종의 그같은 주장은 백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의 형 역부를 죽인 용춘과의 해묵은 감정
때문이었지만 백반에게는 솔깃한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하명만 내리신다면 이 일은 제가 맡아서 감쪽같이 처리를 하겠습니다.”
“뒷말이 나면 곤란해. 탈없이 해치울 만한 사람이 있는가?”
“저에게는 수족처럼 부리는 뛰어난 검객들이 많이 있습니다.
용춘은 성정이 포악하여 사냥을 즐겨 나가므로 이들에게 가만히 뒤를 밟게 하였다가
깊은 산중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버린다면 무슨 뒷말이 나겠습니까?
사냥터에서 목숨을 잃는 일은 특별한 게 아니올시다.”
하지만 백반은 선뜻 동조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숙부 진지왕을 독살한 일도 나이를 먹어가며 가끔 후회스러운 때가 있는 판국에
용춘마저 죽인다는 게 젊어서처럼 흔쾌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나이도 어언 육순 고개를 넘어서고 있었다.
“차차 궁리를 해보세. 꼭 그 방법밖에 없는지……”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7장 중국손님 (21) (0) | 2014.09.03 |
---|---|
제17장 중국손님 (20) (0) | 2014.09.02 |
제17장 중국손님 (18) (0) | 2014.09.02 |
제17장 중국손님 (17) (0) | 2014.09.02 |
제17장 중국손님 (16) (0) | 2014.09.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