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7)

오늘의 쉼터 2014. 8. 31. 21:26

제17장 중국손님 (7)

 

 

 

 

이튿날 날이 밝자 구칠은 유광을 데리고 지혜가 있는 안흥사로 갔다가 사흘밤을 묵고 돌아왔다.

구칠은 지혜를 만나 함께 중국으로 갈 것을 말하였지만 지혜는 도리어 구칠에게 신라에 와서 살 것을

권하여 모처럼 만난 두 남매가 티격태격 언쟁을 했는데, 헤어질 무렵에는 서로 왕래나 자주 하며

살자고 뜻을 모으고 구칠이 지혜를 향해,

“일간 중국에를 한번 다녀가도록 해라. 너의 언니 지선이가 하루도 네 말을 안할 때가 없다.”

하여 지혜가 그러마고 약조를 하였다.

구칠은 안흥사를 떠나 거타주의 부모 산소를 들러 금성으로 돌아왔다.

그사이에 용춘은 모처럼 대궐을 찾아갔다.

당초에는 천명을 보낼 생각이었지만 밤새 마음을 고쳐 직접 입궐하고 백정왕에게

중국의 정세를 설명했다.

이에 왕이 구칠과 유광이란 자를 친히 만나보고자 하므로 용춘은 안흥사에서 돌아온 두 사람에게

왕의 뜻을 전하였고, 왕은 두 사람을 위해 소연을 베풀며 온화하고 부드러운 말로 장안의 사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무렵 구칠과 유광이 신라에 와서 들려준 얘기들은 당시로선 상당히 귀한 고급 정보였다.

대개 배를 타고 오가는 장사꾼의 입을 통해 대륙의 사정이 어느 정도 알려진 터였으나

아직도 내란이 종결되지 않아 누구도 앞일을 장담하지 못했고, 당연히 당 왕조의 앞날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예측이 모두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한수(漢水) 이북의 장안을 다녀온 사람들은 당의 세력이 성성한 것을 말하는 반면

그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한수 이남을 보고 온 자들은 형주(荊州:襄陽) 지방을 장악한 소선(蕭銑)의 무리가 우세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당고조 2년인 기묘년(619년)에 이연은 왕세충(王世充)의 반란을 토벌하여 대공을 세운 명장

이정(李靖)에게 형주를 평정토록 명했으나 실패하였고, 그 바람에 이연은 크게 노하여

협주 도독 허소(許紹)란 자에게 이정의 목을 베도록 지시한 일까지 있었다.

물론 이정은 그의 재주를 아까워한 허소의 간청으로 가까스로 죽음을 면했지만

이 사건은 소선의 세력이 결코 이연의 세력에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개주(開州)에서는 염조칙(?肇則)이 반란을 일으켜 기주(夔州)로 진격하는 중이었고,

북방의 돌궐도 수시로 남하하여 일진일퇴의 공방을 계속하고 있었다.

구칠과 유광이 아직 금성에 머무르고 있을 때 왕은 중신들을 불러모으고 당나라와 수교 문제를 거론했다. 그러자 대부분의 중신들은 예측과 전망이 불투명한 것을 들어 반대하면서,

“만일 성급히 사절을 보냈다가 훗날 다른 세력이 나타나 대륙을 평정한다면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니

조금 더 기다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며 만류하였다.

백정왕은 이번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고민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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