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4)
용춘이 설명하는 것을 다 듣고서도 구칠은 못내 의구심을 감추지 못했다.
“어쨌거나 지혜는 안흥사에 가서 만나보면 되는 것이고, 그래 이제는 자네 살아온 얘기나 털어놓게나.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가? 자네와 같이 떠난 대세와 지선은 또 어찌 되었구?”
용춘의 재촉에 이번에는 구칠이 신라를 떠나서 산 30여 년 세월을 더듬는데,
남해 갯가의 해류를 따라 당도한 곳이 전날 오, 월이 있고 외백제가 있던 중국 땅이요,
그로부터 한동안 천하를 주유하며 지내다가 대흥과 낙양에서 비단과 곡물 장사로
큰 재물을 모았노라 하였다.
대세는 구칠의 큰누이 지선과 결혼하여 아들 둘을 낳았고,
구칠은 하북에 살던 중국 여자와 혼인하여 딸 셋을 두었는데,
구칠의 장인이 진양(晉陽) 땅에서 덕망이 높던 사마공(司馬拱)이란 사람이었다.
그 후 수나라 양제 말년에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진양 땅의 사령(司令)으로 있던
유문정(劉文靜)과 진양궁 궁감(宮監) 배적(裵寂)이 이연의 차자인 이세민을 도와 난리를 평정하고
당을 건국하는 데 대공을 세웠다.
이때 사마공이 물자를 내어 군비를 보조했는데, 거기에는 구칠과 대세가 헌탁한 재물도 적지 않았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사마공은 당나라 조정에서 자사(刺使) 벼슬을 받았지만
스스로 나이가 많음을 들어 사양하였고, 대세는 수도 장안(長安:대흥의 본래 이름)에서
위국공(爲國公)에 봉해져 대궐을 상시 출입하는 높은 지위에 올랐으며,
구칠 역시 당을 건국한 공신의 한 사람으로 작위를 받았으나 관직에 얽매이기 싫어하는 기질 때문에
한사코 고사하고 다만 대세와 함께 벌여놓은 장사 일에만 전념하고 있노라 하였다.
용춘이 구칠의 말을 대강 듣고서,
“자네들이 장사를 벌였다는 소리는 전날 수나라에 사절로 다녀온 만세에게서 전해들은 바가 있다네.
땅 설고 물 선 곳에 맨주먹으로 가서 그처럼 대성하였다니 놀랍고 용하구먼. 참으로들 장하네!”
하며 치하하였다. 대충 얘기를 끝마친 구칠이 곁에 앉은 중국인을 가리키며,
“이 사람은 우리와 오랫동안 장사를 같이 했던 유광(庾廣)이란 사람인데 저의 처가와는
먼 인척지간입니다.
또한 그 백씨가 저의 장인과 대세의 도움으로 당나라 황제를 보필하는 높은 지위에 올라 있습니다.”
하고서,
“오래전부터 신라를 구경하고 싶어하여 이번에 유관 삼아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하니 그때껏 잠자코 있던 중국 사람 유광이 새삼스럽게 용춘을 보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서,
“용춘공의 말씀은 하도 귀가 아프게 들은 터라 처음 뵙는 분 같지 않습니다.”
신라말을 꽤나 유창히 하였다.
용춘이 뜻밖인 중에도 잘 왔다며 크게 반가워하면서,
“우리나라에 머무는 동안에는 내 집서 유하고 두루두루 원하는 만큼 구경을 하고 가오.
내 비록 국사에 아무 권한은 없지만 일국의 국서요,
금왕의 부마이니 귀공의 안전쯤은 능히 책임을 질 수 있소.”
하니 구칠이 짐짓 대경실색을 하며,
“나리의 지난 30성상도 실로 기구하고 만장했던 모양이올시다.
아직까지 백면서생으로 지내는 것도 놀라운 바이지만 어찌하여 원수처럼 여기던
금왕의 사위가 되었더란 말씀이오?”
눈을 둥그렇게 뜨고 물었다.
“허, 어찌하다 보니 그리 되었다네.
말을 하기로 들면 장황하지만 세상만사 모든 것이 그저 팔자요,
운수 소관쯤으로 생각해두시게나.”
우선 그렇게 말막음을 했으나 그 뒤로 구칠이 하도 꼬치꼬치 캐묻는 데다 용춘 또한 속에 맺힌 것이
많아서였는지, 밝았을 때 만난 사람들이 꽤나 밤이 깊도록 얘기가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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