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5)
삼자가 석반에 주안상을 곁들여 늦도록 담소하다가 옛말이 비로소 동이 날 즈음에
구칠이 문득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하기를,
“나리, 내가 이렇게 금성을 찾아온 것이 지혜의 일도 지혜의 일이지만
실은 대세의 부탁으로 나리께 심부름을 왔소.”
하고는,
“나리는 당나라를 어찌 보십니까?”
하며 물었다.
용춘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당의 세력이 제법 성렬한 데가 있다고 이야기는 들었네만 아직 중원을 모조리 수중에 넣었다고는
보기 힘든 것 아닌가?
대륙에선 여전히 칭제건원하는 무리가 다투어 일어나 천하가 심히 어지러운 걸로 알고 있네.
결국은 당도 그 가운데 하나일 테지.”
용춘이 그렇게 회의조로 대답하자 구칠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그렇지를 않습니다.”
“하면 당이 능히 수나라의 뒤를 이을 만하다는 말인가?”
“당고조 이연은 사려가 깊고 덕이 있으며 마음이 바르고 순리를 읽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저도 수나라가 고구려에 패하여 자멸한 뒤로 과연 중원을 아우를 만한 세력이 나타날 수 있을까
의심했지만 지금 당나라의 기세는 수의 뒤를 잇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항차 이연도 이연이지만 이연의 아들 중에 세민이란 이는 성군의 자질과 영웅호걸의 기백을
두루 갖춘 불세출의 걸물이올시다.
그는 비록 고조의 둘째 아들로 이제 막 스물을 넘긴 약관의 청년에 불과하나 수를 멸하고
당을 건국시킨 일등 공신이요,
언젠가는 제위에 오를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합니다.
당의 건국은 순전히 세민의 공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습니다.
하물며 그는 인재와 범부를 구별할 줄 아는 남다른 혜안을 가졌고,
그것으로 주변에 사람을 끌어모으는 재주도 벌써부터 만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정평이 났습니다.”
구칠은 제가 아는 당나라 내부의 사정을 낱낱이 털어놓았는데,
특히 이세민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잠시 말허리를 끊고 용춘을 바라보다가 사뭇 정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대세와 제가 어찌 신라를 잊을 것이며,
신라를 잊지 않는데 어찌 나리의 소식을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그간 장안과 낙양에서 만나는 신라 장사치만 보면 붙잡고 물어보는 것이 나리의 안부요,
근황이었습니다.”
“하면 내 사정이 어떠하다는 것을 다 알고 왔더란 말이 아닌가?”
“물론입니다. 아니지요, 다 알고 온 것이 아니라 다 알기 때문에 왔다고 해야 옳습니다.”
“다 알기 때문에 왔다니?”
“나리.”
“말을 하게나.”
“대세도 마찬가지지만 제 생각에도 지금 신라의 국세는 과거와는 견주지도 못할 만큼
몰락과 쇠잔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안에서 보는 것과 나라 바깥에서 보고 느끼는 것은 또 다르지요.
법흥, 진흥 양 대왕 시절의 신라가 하늘의 해라면 작금의 신라는 한낱 그믐달이요,
힘없이 깜빡거리는 반딧불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지경을 마주하고 있는 양 적국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북적 고구려의 강성함이야 다시 말할 것이 없고, 근년에 와서는
백제마저도 현군을 만난 덕택에 그 매서운 기세가 가히 일어나는 들불과 같고,
동해를 치솟아오르는 아침해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당대에 신라의 말로를 보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북방에서 강성한 고구려를 끊임없이 위압하던 수나라마저 망했으니
신라의 앞날은 더욱 불안하고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말을 하는 구칠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고 용춘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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