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7장 중국손님 (9)

오늘의 쉼터 2014. 9. 2. 15:40

제17장 중국손님 (9)

 

 

 

 

청년의 말에 사내는 비로소 꽤나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아까와는 달리 청년의 행색을 관심 있게 훑어보았다.

“가실사에서 내려온다면 원광의 문하생이오?”

“그렇습니다.”

“법사의 문하생이 불전을 읽지 않고 어찌하여 중국의 경서들을 섭렵한단 말이오?”

“석언(釋言)과 석훈(釋訓)도 고승대덕의 설법하는 것을 졸지 않고 들을 만치는 귀동냥을 했지만

일찍이 내마 벼슬을 지낸 설담날 선생을 은사로 모시고 유자의 가르침도 배운 바가 있습니다.”

그러자 사내가 빙그레 웃음을 머금었다.

“담날에게서 배웠다면 헛공부는 아니했겠구먼.”

청년은 사내의 말투에서 그가 적어도 평인은 아니구나 하고 짐작했다.

“저의 스승이신 담날 선생을 잘 아십니까?”

“알지. 알다마다. 담날도 잘 알지만 그의 백씨가 사는 알천 밤나무집도 잘 알지.”

사내가 설문보를 들먹이자 청년은 문득 그의 신분과 이름이 궁금해졌다.

“제가 원체 어리석어 귀한 어른을 뵙고도 그 존함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뉘시온지 가르쳐주시면 항상 마음에 새겨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청년의 깍듯한 청에 사내가 돌연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이름이 없어. 소싯적에야 부모가 지어붙인 이름이 있었을 테지만

양친이 구몰한 뒤론 그런 건 죄 잊고 살지.

전에 살매현 북산에 초암을 짓고 살 때는 그곳 사람들이 저희들 마음대로 두두리(豆豆里) 거사라

부르기도 했다네.

그러나 자네가 굳이 나를 기억하려거든 이름을 새겨두지 말고 지금 보는 내 형상을 새겨두게나.”

두두리라면 사람이 아니라 귀신을 일컫는 속언이었다.

사내의 말투는 언제부턴가 반말투로 바뀌어가고 있었지만 청년은 그런 일 따위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청년이 반말투에도 여전히 공손함을 잃지 않자 사내는 흡사 혼을 들여다보듯 빤히 청년의 눈을

쏘아보고 나서,

“심성에 덕을 가지고 나서 다행이야.”

하고 뜻 모를 혼잣말을 내뱉었다.

청년이 재차 가르침을 구하자 사내가 비로소 입을 열었다.

“흔히들 지금 나라가 어려운 것은 금왕이 정사를 마음대로 펴지 못하고

난신들이 어지럽게 날뛰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나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매사에는 다 근원과 까닭이 있게 마련이지.

물론 작금의 일도 여기까지 이르게 된 원인이 여럿 있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자면 나라의 근본인 치도가 화목과 융화에 있지 않고

불화와 간쟁에 있기 때문일세.

자네 같은 젊은이들의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대로 가다간 계림의 7백 년 사직이

송두리째 망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네.

법흥, 진흥 양조의 그 성성하던 국운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때가 벌써 반백 년이 아닌가?

왕실에서는 조카들이 작당해 숙부를 몰아내고 보위를 탐하였으니

그 아래 신하들이 서로 시기하고 모함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은 극히 당연지사이고,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신라 사람, 가야 사람이 당을 지어 배척하고 그러다 저희네들끼리도

또 반목을 일삼는 게야.

왕실이 하나로 화합하지 않으니 태후들간에도 아름답지 못한 일이 생기는 게고,

한배에서 난 형제들도 제각기 딴 마음들을 품고 산다네.

그런 판에 사촌, 육촌이 넘는 족친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

심지어 불구대천의 원수가 된 사람들도 있지 않은가?

금왕에게는 딸이 셋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백제로 건너가 적국의 왕후가 되지 않았는가?

백반과 용춘의 일은 또 어떠한가?

임금과 왕실을 따라 신하도 백성도 변하는 것은 고금의 이치일세.

자벌레란 놈은 누런 잎을 먹으면 몸이 누렇게 되고 파란 잎을 먹으면 파랗게 되는 법이거든.

나무가 뿌리에서부터 갈려 나왔으니

그 줄기와 잎사귀가 제멋대로 뻗어가는 것을 뉘라서 탓할 수 있겠나?

이 모든 것이 바로 치도가 황폐하기 때문일세.”

한번 시작한 사내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7장 중국손님 (11)  (0) 2014.09.02
제17장 중국손님 (10)  (0) 2014.09.02
제17장 중국손님 (8)  (0) 2014.09.02
제17장 중국손님 (7)  (0) 2014.08.31
제17장 중국손님 (6)  (0) 2014.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