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8)
봄바람 화창한데 인적은 없고
들살구 산복사꽃만 어지러이 빛나누나
성문은 열려 하루종일 한가한데
갈포(葛布) 짜던 노인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네
대어는 작은 못에 노닐지 아니하고
홍곡은 고인 물 따위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황종(黃鐘)과 대려(大呂)는 언제쯤 울 것인가
아이야 다투지 마라 백룡(白龍)과 예차(豫且)의 일은 백룡의 잘못이라네
중국에서 온 구칠 일행이 아직 용춘의 집에 기숙하고 있던 때였다.
운문산 가실사(加悉寺)에서 내려오던 말쑥한 차림의 작달막한 청년 하나가 산자락이 끝나고
민가가 시작되는 어름, 얼기설기 지어놓은 허름한 초막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청년은 조심스레 뒷걸음질을 쳐서 초막 입구에 다시 귀를 대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한 노래에 주의를 기울였다.
천년 숲에 흐르던 향기 홀연히 끊어지고
붉은 말은 큰 울음을 토하며 서역으로 떠났노라
스러지는 사직을 다시 세울 자 누구인가
아서라 농부들아 팽나무꽃이 늦게 피면 늦게 모를 낼 뿐이라네
이따금 가야금 줄을 튕겨 음을 잡아가며 부르는 노랫소리는 티없이 맑고 낭랑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비창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청년은 그 묘한 목소리의 주인이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차리고 문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일순 노랫소리가 뚝 끊기더니 안에서 고개를 내민 이는 남루한 베옷에 견포 복두를 쓴
마흔줄의 사내였다.
“뉘시오?”
그는 이목구비가 단아하고 눈빛에 날카로움과 당당함이 실려 있어 과연 예사로운 인물은 아닌 성싶었다.
“저는 가실사에서 겨울 한 철을 보내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서생입니다.
선생께서 부르신 노래를 듣고 필경 깊은 뜻이 숨어 있는 듯하여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잠시 들어가 가르침을 구하고 싶습니다만.”
청년은 그가 비록 평인 복색을 하고 있었으나 말을 공대하였다.
사내는 흥이 깨어진 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눈치가 역력했으나 마지못해 청년을 안으로 청하여 앉았다.
“방금 전에 부르시던 노래에 담긴 뜻을 알고 싶습니다.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에게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청년은 특유의 깊고 잔잔한 눈빛을 반짝이며 허리를 굽혀 공손히 물었다.
“그저 하도 심심하여 불러본 것일 뿐 별뜻이 없소.”
사내가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로 퉁명스레 대꾸했다.
이에 청년이 더욱 자세를 낮춰 말하기를,
“외람되오나 저는 유복한 집에서 태어난 덕택에 일찍이 중국의 경서들을 두루 접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리저리 뻗은 칡 들판에 가득하네, 훌륭한 기술자 이를 모아 멋진 갈포 만들지,
그러나 그 기술자 만나지 못하면 들에서 말라죽네, 라 하였으니 이는 시경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또한 백룡이 연못으로 내려와 물고기로 화하였다가 일개 천한 어부인 예차에게 봉변을 당하자
하느님이 이를 물고기로 변한 백룡의 잘못이라고 꾸짖는 대목은 오월춘추(吳越春秋)에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오자서가 왕의 방탕함을 꼬집었던 비유가 아닙니까?”
하고서,
“이런 연유로 짐작컨대 선생께서 부르신 노래에는 필시 심오한 뜻이 숨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부디 귀찮다 마시고 저를 좀 가르쳐주십시오.”
하며 간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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