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장 중국손님 (1)
한편 국운이 쇠락해가던 신라는 경진년(620년)과 신사년(621년)에 접어들어 두 가지 중대한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는 노회한 만호 태후가 경진년 가을, 마침내 세상을 떠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젊어서 오(吳), 월(越)을 향해 떠났던 구칠(仇柒)이 신사년 초입에 중국 사람 하나를
대동하고 금성에 나타난 것이었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에게 용춘의 집을 물어 찾아갔다.
이때 용춘은 거의 스무 해 가량을 철저히 은둔 생활로 일관하고 있었다.
비록 춘추를 낳고 나서 자신에게 내려졌던 금족령은 풀렸으나,
그는 매사에 생마처럼 굴던 과거의 용춘이 아니었다.
백반 일패가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서 여전히 가장 위험한 인물은 바로 그였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던 용춘으로선 나이를 먹어갈수록, 또 춘추가 커갈수록
차츰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고 나름대로 현실과 타협하는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일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역모 사건이 일어난 시초에만 해도 그는 분을 삭이지 못해 가슴을 치며 통탄하는 날이 많았고,
눈에서는 새파란 독기가 이글거렸으며, 침식을 등한히 하는 바람에 몸에는 병색마저 감돌았다.
본디 시류를 따라 조석으로 변하는 것이 속세의 인심이라곤 해도 그가 겪은 신산은
이루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
자신과 맺은 친분의 정도가 탄압의 척도가 된 지는 이미 오래요,
남을 모함할 때 흔히 써먹는 것이 용춘과 가깝다는 풍문이었다.
그리하여 정작 보지도 못한 사람이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유배를 떠난 일도 있었다.
또 길에서 우연히 마주쳐 몇 마디 안부를 묻고 헤어진 이가 뒷날 아무 까닭도 없이
관직에서 해임되기도 했다.
사정이 이러니 궐에서 심부름을 온 나인들조차도 소태 씹은 얼굴로 왔다가 볼일을 마치면
부랴부랴 도망치듯 사라졌고, 한번은 죽을 병을 얻었다는 소문을 듣고 전날 낭도의 집에 문병을 갔더니 그 자식들이 대문 앞을 막아서서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한 적도 있었다.
사냥을 나갔다가 지방 관아의 앞이라도 지나칠 양이면
그 수령들이 약속이나 한 듯 문을 닫아걸고 현형하지 않았다.
한때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던 용춘의 사저가 문객의 발길이 뚝 끊어져 심산유곡의
이름 없는 절간처럼 소적하니,
폐위된 진지대왕을 위해 지은 웅장한 옥사(屋舍)가 나날이 황량하고 을씨년스럽게 변해갔다.
그사이 설상가상 모친상까지 당했는데, 초상을 치는 동안에 문상이라고 찾아온 사람은
한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이에 용춘은 한 많은 일생을 마친 어머니 지도부인의 시신을 부여잡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으며 마음에 더욱 사무친 원한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천하의 김용춘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지도부인의 장례를 치른 뒤 어느 날 용춘은 자신을 찾아온 법사 원광에게 밤새 울분을 토하며
흥분하다가 급기야 목에서 피를 토하며 혼절한 일이 있었는데,
그렇게 앓고 일어난 뒤부터 사람이 그만 판연히 달라져서 예전처럼 분개하거나 격노하는 일이 없고,
여간한 것을 보거나 들어도 그저 심상히 넘기곤 했다.
낙뢰를 맞고 일어난 사람 가운데 더러 돌변하는 이가 있다더니 김용춘이 꼭 그랬다.
그 뒤로 용춘은 점점 더 생판 딴 사람이 되어갔다.
어찌 보면 만사를 포기한 사람이요,
달리 보면 매사에 달관한 사람이었다.
유사 이래 처음으로 폐위된 부왕을 두고 살아온 그의 특수한 환경은 타고난 기질과 성정까지도
송두리째 바꿔놓을 만큼 가혹한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다시금 10여 년 세월이 흘러가고 적막한 용춘의 사저로 다시 문객들의 발걸음이
간간이 이어진 것은, 춘추가 자라면서 대왕 내외의 귀애를 독차지한다는 소문이 나라 안에
퍼지면서부터였다.
이때부터 전날의 낭도들이나 알던 사람들이 간혹 예전의 친분을 내세우며 심심찮게
고개를 들이밀곤 했다.
그러나 용춘은 무슨 뜻에서인지 찾아오는 자들을 피하고 일체 상면하지 않았다.
대문은 열어두었지만 바깥채에서 안채로 통하는 중문에는 상시 하인들을 배치시켜
사람과 물건의 출입을 막았으며, 더러 하인으로선 어찌할 수 없는 지체 높은 이가 찾아오면
중문 안의 별당까지 안내해 술과 밥을 대접했지만 나중에 천명 공주가 나와서 이들에게 양해를 구해
되돌려보내곤 했다.
특히 내당으로 통하는 소문(小門)은 늘 굳게 잠겨 있어 한집에 사는 하인들조차도 함부로 드나들지
못했다.
이곳을 상시 출입하는 사람은 천명과 춘추 모자뿐이었다. 집 주인 용춘은 주로 내당에 칩거하며
한가롭게 서책을 읽거나, 낮잠을 자거나, 정 소일하기 무료하면 사냥을 나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다시 수년 세월이 더 보태어졌다.
중국에서 온 구칠 일행이 찾아갔을 때는 바로 그럴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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