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6)

오늘의 쉼터 2014. 8. 27. 10:30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6)

 

 

 

이 같은 일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부지기수였다. 실혜(實兮)의 일도 그 중의 하나였다. 실혜는 역시 도비, 담날 등과 함께 등관했던 대사 순덕의 아들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사량부의 사인(舍人) 벼슬에 다녀 이때는 상사인(上舍人)이 되어 있었는데, 뒤에 사인이 된 자 가운데 진제(珍堤)라는 이가 있었다. 진제는 전날 추화군 군주로 있다가 한돈의 손에 맞아죽은 백명(伯明)의 아들로, 사람됨이 간사스럽고 구변이 좋으며 눈치가 비상한 인물이었다. 그는 한때 백명의 원수를 갚으려는 복수심에 가득 차서 한돈의 임지를 쫓아다닌 적도 있었으나, 막상 한돈이라는 사람을 눈으로 보자 그 기굴한 체구에 압도되어 허약한 제 완력으로는 결코 당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벼슬을 높여 권세로써 복수할 방법밖에 없었다.

진제가 그 길로 찾아간 곳은 금성에 살던 제 누나 춘경(椿景)의 집이었다. 인물이 해반주그레하여 미색 소리를 듣던 춘경은 백명의 뜻에 따라 노리부의 아들인 역부에게 바쳐졌다가 진작에 과부가 되었지만, 절두(切斗)라는 역부의 낭도에게 새로 시집을 가서 이때 금성 남쪽에 살고 있었다. 6두품인 절두는 곧 처남인 진제를 죽은 역부의 아우인 파진찬 염종에게 데려갔고, 서른을 갓 넘긴 젊은 나이로 사량궁 사신과 병부령을 겸직하며 막강한 지위에 올라 있던 염종은 백반의 허락을 얻어 그를 자신이 맡고 있던 사량궁의 사인으로 두게 되었다.

사량궁에서 하사인(下舍人)이 되어 창예창(唱츄倉:곡식창고)을 돌보는 일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진제는 곧 타고난 언변으로 상사인인 실혜를 구워삶아 친분을 쌓고 동료가 되었으나, 걸핏하면 잔꾀를 부리고 일을 건성건성 눈가림으로만 하여 자주 실혜의 책망을 들었다. 한번은 진제가 실혜를 보고 은근히 말하기를,

“대궐 창고에 묵은 곡식이 있으나 아무도 이를 쓰지 않아 날마다 썩어가고 있으니 안타깝기 짝이 없네. 곡식이야 사람이 먹지 않으면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아닌가? 그런데 올해 작황이 그다지 좋지 않아 굶는 사람이 많으니 만일 자네와 내가 이를 내다 팔면 어렵잖게 많은 재물을 모을 수가 있을 것이네.”

하고서,

“만일 그렇게 한다면 아까운 곡식을 버리지 않아서 좋고, 백성들은 배를 불려서 좋고, 우리는 모은 재물로 앞날을 닦고 벼슬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니 가히 일석삼조가 아닌가?”

하고 제안하였다. 충절을 귀히 여기는 명문의 자손으로 기질이 강직하고 옳지 않은 일과는 상종하는 법이 없던 실혜가 진제의 말을 들을 턱이 없었다. 곧 얼굴빛을 근엄히 하고 준엄하게 꾸짖기를,

“나는 자네가 그따위 생각이나 하는 위인일 줄은 차마 몰랐네. 설혹 궐에 묵은 곡식이 있다면 이를 나라에 말해 백성을 구제하는 일에 쓰도록 해야지 어찌 몰래 내다 팔 궁리를 한단 말인가? 이제 보니 자네는 참말 몹쓸 사람이구만. 내 앞에서 또다시 그같 은 망발을 입에 담는다면 위에 고변하기 전에 내 손으로 먼저 혼구멍을 낼 테니 그런 줄 알게!”

주먹을 흔들며 매섭게 으름장을 놓으니 진제가 돌연 무참한 기분이 들어,

“알었네. 공연히 한번 해본 소릴 갖고 무얼 그처럼 화를 내나?”

하고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감추었는데, 그 후로 실혜의 앞에서는 전과 다름없이 싹싹하게 굴어도 뒤에서는 앙심을 품고 호시탐탐 해칠 기회만을 엿보았다. 진제는 자신의 검은 심보를 성급하게 내비친 일로 크게 후회했지만 그런 만큼 실혜가 부담스러웠고, 또한 실혜가 궁에 있는 한은 마음먹은 일을 저지를 수가 없으니 여간 답답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백정왕이 나인들을 거느리고 사량궁으로 행차하였다. 진제는 황급히 왕이 지나는 길목을 지키고 섰다가 부복하여 아뢰기를,

“신은 사량궁의 창고를 지키는 사인 진제라 하옵는데, 대왕 전하께 감히 한 말씀 여쭙습니다. 지금 창고의 곡식은 모두 묵은 것이옵고, 그 중에는 작년의 것도 있지만 수삼 년이 지나서 빛도 바래고 냄새가 심해 거의가 다 왕실에는 밥을 지어 올릴 수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저자의 백성들 중에는 굶는 사람이 허다하니 만일 이를 풀어서 허기진 자들을 구제한다면 여러 사람의 배를 불릴 뿐만 아니라 대왕 전하의 덕업이 만인의 입에 오르내릴 것입니다. 부디 하찮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신의 외람된 청을 가납해주소서.”

하였다. 왕이 진제의 말에 문득 감동하여,

“너의 말이 옳다.”

하고서,

“네가 누구라 하였느냐?”

하며 되물었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8)  (0) 2014.08.27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7)  (0) 2014.08.27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5)  (0) 2014.08.27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4)  (0) 2014.08.27
제16장 부여헌(扶餘軒) (33)  (0) 2014.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