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7

오늘의 쉼터 2014. 8. 28. 07:57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7  

 

 

그렇게 해서 만난 항구였다.

김두한은 실제로 그를 동생으로 삼고 싶었다.

싸움의 기술은 모자란다고는 하지만 그만한 담력,

그만한 완력을 갖고 있다면 그를 받아들여 같은 패거리로 삼고 싶었다.

그러나 항구 편에서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김두한과의 실력 대결에서 완전 패배를 자인한 그는 김두한을 형으로 모시는 것에는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부하가 되어 같은 패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보다도 자존심이 용납치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김두한의 수많은 부하들이 싸움 현장을 직접 보았고,

종로 바닥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김두한의 부하가 된다면, 다른 부하들이 얼마나 자기를 멸시할 것인가,

얼마나 경멸할 것인가.

그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그의 부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용의 꼬리가 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뱀의 머리가 되는 것이 낫다 싶어

그는 인천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결국 그는 김두한에게 ‘용명’ 하나를 더 얹어,

종로 바닥에 화려한 화제만을 뿌려주고 돌아간 셈이었다.

그 이후, 항구는 종로 바닥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김두한은 그를 수소문해 찾지도 않았고, 그의 기억을 거의 잊어가고 있었다.

그런 터에 인천 바닥에서 딱 마주친 것이다.

그것도 인천의 많은 주먹패들에게 에워싸여,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는 바로 그 순간이었던 것이다.

“오오! 항구!”

김두한은 커다랗게 웃었다.

위기에 처해 있을 때에 항구가 시기를 맞추어 나타나준 것이 고마웠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일이 이쯤 벌어지게 된 이상,

한번 난장판을 벌여 어린 시절의 앙갚음도 하고 콧대 높은 인천패들의 기를 꺾어주고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항구가 우연히 나타났다는 것은 오히려 방해뿐인 셈이었다.

그러면서도 활짝 웃어준 것은 김두한의 순수한 반가움이었다.

항구는 김두한패를 둘러싼 무리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서면서,

에워싼 무리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들 까불지 마. 서울 김두한 형님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뼈다귀도 못 추려. 하지만 그래도 성이 안 풀리면 한번 붙어봐.”

항구는 무리들을 둘러보면서, 싸움을 부추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손짓을 해 보였다.

물론 아무도 대들려는 자가 없었다.

무리들에게 출렁거림만큼의 동요가 있었을 뿐이었다.

김두한이란 이름만 듣고도 질겁을 한 것이다.

그의 얼굴을 모르는 자는 있어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들은 속으로 중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김두한패가 아니고서는 뭇 인천패를 상대로 맞싸우려들 자들도 없었겠지만,

인천의 내로라 하는 악어를 상대로, 그를 납작한 오징어처럼 만들어놓을 자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러닝셔츠의 사나이가 바로 인천의 왈패 악어였던 것이다.

그러나 어찌 됐든 항구가 우연히 나타남으로써,

극장 앞의 상황은 자연 끝난 것이 될밖에 없었다.

 

이 무렵, 인천 주먹패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김관우가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전인천을 석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미 밝힌 대로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쌍밤·악어 등을 거느리고 세력을 잡고 있었다.

이를테면 비교적 강력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뿐,

이 밖에도 만만치 않은 실력자들이 많았다.

다소 얘기가 중복되지만, 역도와 씨름 선수 출신의 심상호,

거기에 심상호와 절친한 사이인 미남 김구범,

만능 운동 선수이며 호인이고 후에 부평 지방을 장악하게 된 이기만,

여기에 이들과는 라이벌 관계라기보다 주로 만주·중국 땅을 누비고 다녔던

선배 격인 단게(丹下) 윤봉산 등 군웅이 할거하고 있었다.

얘기는 비약되지만 인천에서 가장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김관우는

광복 후 좌익이 되었고, 6·25 전쟁이 일어나자 괴뢰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인천 상륙 작전 때 아군에 대항하다 피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 연후에야 심상호, 김구범이 이기만과 함께 인천패를 이끌었다.

이 무렵의 실질적인 인천패의 리더인 심상호는 주먹패답지 않게 점잖았고,

인물도 빼어난 데다가 인정이 많고 마음이 약해 돈이 생기는 대로 부하에게 나누어주고,

술을 너무 좋아해서 재산을 모으지는 못했다고 한다.

부인의 음식 솜씨가 매우 좋아,

손님들을 초대하기도 잘했고 손님들이 음식 솜씨가 좋다고 몰려드는 때도 많아서,

항상 그의 집은 성시를 이루었다고 한다.

심상호와 매우 절친했던 김구범은 이미 언급한 것처럼 아주 미남이어서

여자들이 매우 따랐다고 한다.

광복 후 건설업에 손을 대 성공을 했고,

현재도 건강해서 모 업체를 이끌고 있는 대표 이사직을 맡고 있다는데,

필자는 두세 차례에 걸쳐 인천을 찾았으나 아직껏 상면을 하지 못했음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는 어찌 되었거나 김두한이 인천 애관극장 앞에서 항구를 만났을 때는,

아직 심상호나 김구범이 김관우만큼은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그럼 항구 자신은 인천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을까.

이 역시, 다소 언급한 일이 있지만 인천 부두의 노무자를 이끄는 두목급이었으나,

그 권외로 나가서 행패를 부리거나 세력 확장을 위해 급급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힘이 워낙 좋아서, 김관우를 위시한 어떠한 주먹패들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서로 호형호제하며 가까이 어울리는 사이였다.

이날도 그는 애관극장에서 좋아하는 〈주신꾸라〉 영화가 상영된다기에 영화 구경을 갔다가

뜻밖에 종로꼬마와 악어가 맞붙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김두한과 해후하기에 이른 것이다.

“너, 임자 잘못 만났어. 김두한 형님을 못 알아모신 것이 네 잘못이지.”

항구는 그때까지 맨바닥에 쓰러져 있는 악어를 한쪽 손으로만 움켜쥐고 일으키면서 말했다.

죽은 듯 늘어져 있던 악어는 그제야 귀를 붙잡힌 토끼처럼 들려 일어나서는 계면쩍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었다.

“너, 빨리 김관우 형님에게 알려! 서울에서 김두한 형님이 내려오셨다구 말여!”

항구가 악어에게 일렀다.

김관우가 단숨에 달려나온 것은 물론이었다.

애관극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잡고 있었던 만큼

그의 아지트도 바로 그 근처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멀리 인천까지 내려오시다니. 나, 김관우올시다.”

김관우는 김두한을 반겨 맞으면서도,

인천패를 이끄는 두목다운 늠름함으로 점잖게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밀었다.

“모처럼 바닷바람을 쐬어볼까 하고 내려왔다가,

우리 종로꼬마가 그만 이쪽 아이에게 손을 대게 돼서 미안하게 됐소이다.”

김두한 역시 의젓한 몸가짐으로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솔직한 기분으로 사과를 했다.

“뭘요. 천하의 김두한을 못 알아본 우리 애들의 잘못이지.”

김관우는 겸손하게 말했으나, 속으로는 불편한 구석이 없을 수가 없었다.

‘우리 애들’이라고는 했지만, 단순한 ‘애들’이 아닌 것이다.

악어라고 하면 독종의 싸움꾼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오른팔이나 다름없었다.

그 악어가 어떤 모양으로 맞붙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내려다볼 만큼 작은 키의 종로꼬마에게 그토록 처참히 당했단 말인가.

김관우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형, 길거리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아?

김두한 형님을 못 알아본 사과술이라도 내야지.”

항구가 거들고 나섰다.

“그야, 여부가 있겠어. 어디로 모실까요?”

“나야 절에 온 새색시나 다름없지.

그저 가자는 대로 따라갈밖에 없겠지만,

기왕이면 월미도 바닷바람이나 우선 쐬어봅시다, 허헛.”

김두한은 티없이 맑은 웃음을 웃었다.

월미도.

김두한에게 월미도는 소년 시절부터 푸른 하늘에 나부끼는 깃발과 같은 곳이었다.

그 시절, 서울의 소학교(초등학교)에서는 4학년 때는 인천으로,

5학년 때는 수원으로, 6학년 때는 개성으로 수학 여행을 가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인천으로 수학 여행을 다녀온 아이들이 바다와 엄청나게 큰 배를 구경한 것을 자랑하고,

선물로 사온 조개를 파먹고 난 다음,

조개 껍데기의 단단한 이음새 부분을 시멘트 바닥에 갈아 구멍을 내고,

이를 입으로 불어대며 노는 것을 보고 김두한은 심술이 났었다.

소학교도 제대로 다녀보지 못한 것에 대한 시샘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이들의 조개를 빼앗아 발꿈치로 짓밟아 부숴놓고는

아이들을 쥐어박아 울리기도 했었다.

얼마나 바다가 보고 싶었으면 실제로 종로꼬마와 함께 인천엘 찾아 갔었던가.

그랬다가 인천의 주먹패들에게 처참하게 얻어터지기만 하고 돌아온 전말에 대해서는

이미 소상하게 밝힌 대로다.

그런 지 10여 년.

이제 그는 서울 주먹패의 두목이 되어,

인천 주먹패의 안내를 받으며 마침내 월미도를 찾게 된 것이다.

“좋습니다, 가십시다.”

월미도.

월미도는 비단 김두한뿐만 아니라,

인천 사람은 말할 것 없이 온 서울 사람들에게도 꿈의 섬, 낭만의 섬이었다.

1920년대 초에 축조된 월미도는 현재 길이 약 1킬로미터,

너비 2차선인 둑길 양옆으로, 양륙 물량을 늘리고 임해 공장 지대를 확장키 위해서

한없이 매립을 하여, 이제 시내 쪽에서 바라보면 섬이 아닌 반도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비좁은 둑길만이 놓여 있어 어디로 보나 섬이었다.

특히 둑길이 준공된 후, 철도국에서 소형의 해수 풀장을 개설하고 바닷물을 데운

공동 목욕탕식의 조탕(潮湯)시설을 갖춘 임해 유원지로 개발한 이후 월미도는

일약 명승지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밀물이나 썰물에 관계없이 언제라도 물에 들어갈 수 있는 편리한 풀장과 신기한

해수 온천으로 목욕을 할 수 있으니 많은 사람들이 꾀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후 철도국에서 민간업체로 이관된 다음 해변에 보다 넓은 수영장을 증설하고,

만조 때에는 바다 위에 떠 있게끔 건축한 용궁각(龍宮閣)이란 요정까지 신설되어,

수영객뿐만 아니라 풍류객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거기에 당시로서는 호화 호텔이라 할 3층 목조 건물로 된 ‘하마(濱) 호텔’이라는

임해 호텔이 갖추어져 있어 더욱 인기가 좋았다.

당시, 원산의 송도원(松濤園)이나 부산의 해운대(海運臺)는 유명한 해수욕장이기는 했으나,

모래사장이 좋았다뿐 이렇다 할 편의 시설이 없어 불편했고, 모든 시설이 갖추어져 있는

월미도 해수욕장이 보다 인기를 끌 수밖에 없었다.

인천 사람들뿐만 아니라, 돈푼깨나 주무르는 풍류객들은 조선 사람, 일본 사람

가릴 것 없이 계절을 가리지 않고 기차를 타고 월미도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돈이 춤추고 사람이 물결치는 곳에 건달패·주먹패들이 또한 꾀어 들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무렵의 월미도 주먹패의 두목은 김관우의 수하인 구로네꼬(黑猫: 검은 고양이)였다.

몸집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항상 해수욕장에 있었기 때문인지 얼굴과 몸 전체가

검둥이처럼 새까맸다.

작지만 그 검은 체구가 단단해 보였고, 싸움 동작이 민첩하여 붙여진 별명이었다.

바로 이 월미도로 서울과 인천의 거물급 주먹패들이 동시에 몰려든 것이다.

이른바 ‘노리아이(乘合)’라 하는 소형 버스를 타고 나타났다.

당시 노리아이 자동차는 현재의 중앙동에서 인천역을 거쳐 월미도 조탕 앞까지

운행되고 있었다.

자동찻삯이 12전이었다고 한다.

김관우·항구 등에게 안내되어 김두한·종로꼬마·머리 빠진 개고기,

거기에 어디서부터 따라붙었는지 굵직굵직한 인천패들이 섞여들어,

그다지 작을 것이 없는 자동차가 기웃거려 제대로 달릴 수 없을 만큼 빽빽했다.

조탕 앞에 당도했을 때, 일행을 맞은 것은 언제, 어떻게 연락이 되었던 것인지

월미도패의 두목 구로네꼬와 그 부하들이었다.

주먹패들은 대체로 체격이 좋고 우람한 편이지만,

모두들 햇볕에 타서 검은 얼굴,

검은 몸에 눈빛만이 유난히 반짝이는 것이 정한(精悍)해 보였다.

(한가락 할 놈들 같군!)

김두한은 속으로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