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6

오늘의 쉼터 2014. 8. 28. 07:56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6  

 

 

뺑 둘러친 무리들 뒤편 쪽에서 굵은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아니, 김두한 형님이 아니시오?”

김두한은 내심 깜짝 놀라면서 소리난 쪽을 돌아다보았다.

하긴, 김두한은 이미 팔릴 대로 팔린 얼굴이기는 했다.

때문에 그의 얼굴을 아는 자가 인천에 없으리라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여기는 서울도 아닌 인천인 것이다.

그 얼굴을 아는 자는 있을 수 있어도 ‘형님’으로 다정하게 호칭하는 자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뜻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두리번거리면서 목소리의 주인을 찾을 것도 없었다.

그 많은 무리들 가운데서 머리 하나는 더 큰 거구의 사나이가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어! 항구!”

김두한은 나지막하게 입 속에서 중얼거렸다.

항구.

그는 황모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지만,

인천 항구의 거물이라 해서 항구란 별명으로 더 통했다.

인천 항구에서 짐을 나르는 노동자와 노무자들의 오야붕으로,

역발산 같은 힘을 갖고 있었다.

기차 바퀴를 역기 들듯 번쩍번쩍 들어올릴 정도의 무서운 힘이었다.

그 힘에 힘으로 대항할 자는 인천 바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인천 사람이면 누구나 인정을 했고, 항구 자신도 이를 믿었다.

자기 힘을 과신한 항구는 좁은 인천 바닥에서가 아니라,

넓은 서울 바닥에서 한번 떨쳐보고 싶었다.

그래서 서울의 김두한을 찾은 것이다. 한 1년쯤 전의 일이었다.

김두한의 힘이 장사라는 소문을 듣고 그와 힘을 겨루기 위해,

우미관 골목으로 찾아든 것이다.

“당신이 김두한이오? 난, 인천의 항구요!

당신의 힘이 장사란 소문을 듣고 한번 겨루러 왔소!”

누구의 소개를 받음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인사말 대신 한 말이었다.

김두한은 그 장신과 그 거구에 우선 놀랐다.

솔직히 그 배짱에 질렸다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도전장을 받고 마다할 수는 없었다.

많은 부하들 앞에서 두목으로서의 체면 때문에도 거절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점, 옛날의 주먹패들은 요즘의 ‘깡패’와는 전혀 질이 달랐다.

아마 요즘 깡패들 같으면 호랑이 굴 속으로 제 발로 기어든

건방진 놈을 작당을 해서 후려패고, 야구 방망이로 몽둥이찜질을 하고,

예의 사시미 칼로 찔러 작살을 냈을지도 모른다. 살롱의 무슨 집단 폭력 사건처럼…….

“좋소! 한번 겨뤄봅시다!”

김두한의 대답은 한마디로 간단했다.

그리고 이들은 서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힘을 겨룰 장소인 파고다 공원을 향해 가는 것이었다.

이제부터 싸움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오래간만의 회포를 풀기 위해 한잔하러 가는 것처럼.

두 사나이의 뒤에는 망치·문영철·심청·종로꼬마, 그 밖의 몇몇 종로패들이 뒤따랐다.

이들 역시 두 사나이의 술자리에 곁다리로 공술을 마시러 가는 것과 같은

즐거운(?) 표정들이었다. 

 

그것은 싸움이되 싸움이랄 수 없었다.

아무런 원한도 감정도 없이 그저 힘을 겨뤄보기 위해 싸우는 것이니,

싸움이라기보다 시합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떠한 숨막히는 싸움보다도 더 가혹한 결사적인 시합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김두한이 이 시합에서 진다면 많은 부하들 앞에서 큰 망신인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두목으로서의 권위는 물론 그 지위마저 위태로운 것일 수 있었다.

그것이 싫으면, 처음부터 그 도전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비겁하다는 말을 듣지 않고서도, 피하려 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방법도 있을 수 있었다.

두목인 김두한 자신이 먼저 나서지 않고, 힘이나 싸움 기술에 뛰어난 망치나 김무옥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그러나 김두한에겐 오기도 있었고 체면도 있었다.

싸움에 관한 한 자신도 있었다.

파고다 공원 안에 당도한 두 선수(?)는 먼저 웃통을 벗고, 신발 끈을 질끈 동여맸다.

파고다 공원 안은 예나 지금이나 한가한 노인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김두한을 위시한 주먹패들이 우르르 몰려드니까,

지레 겁을 먹고 꽁무니를 빼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해 주었다.

설마 하니, 두목의 자리를 걸 만한 커다란 싸움이 벌어지리라곤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공원 안으로 들어서면서부터 지극히 화기애애한 모습이었으니까.

김두한은 싸울 때 언제나 버릇으로 검은 가죽 장갑을 끼었다.

“자, 붙읍시다.”

김두한의 한마디로 둘은 양편으로 선뜻 갈라섰다.

우선 뒤로 한 걸음 선뜻 물러서는 김두한은 거구답지 않게 날렵했다.

장갑 낀 왼쪽 손바닥을 오른편 주먹으로 몇 번인가를 쳤다.

그것은 심판 대신, 그 자신이 호각을 분 개전의 신호나 다름없었다.

순간적으로 긴장이 감돌았다.

이야말로 세기의 대결이 아니겠는가.

김두한으로서는 두목의 자리를 건 싸움일 수 있지만,

감히 주먹계의 두목 김두한에게 도전을 해온 것이니

항구로서도 죽음을 건 싸움이나 다름없었다.

패하면 말할 것 없이, 설령 싸움에 이긴다 해도 주먹패의 부하들에 의해

어떠한 보복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김두한은 깡충거리듯 항구의 주위를 맴돌았다.

두 주먹을 불끈 꼬나 쥔 것이, 권투 선수의 폼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변을 훨훨 나돌 뿐 섣불리 붙지를 않았다.

상대가 워낙 거구의 사나이여서 만만히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탐색전으로 틈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김두한이 나는 듯이 주변을 맴돌 때마다 항구는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았다.

그러다가 오히려 김두한에게서 어떤 약점이나 허점을 발견해 내기나 한 것처럼

항구는 냅다 달려들어 김두한의 멱살을 잡으려 들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듯 소리친 것이 종로꼬마였다.


“두한아! 붙잡히지 마랏.”

마른침을 꼴깍일 만큼 긴장해 있던 그는 김두한의 위급을 느끼고 본능적으로 소리친 것이었다.

아마도 그것이 요즘 말로 하면 홈그라운드의 이점(利點)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 이상은 손을 쓸 수 없었다.

요즘의 상식으로 생각하면 만약 김두한의 세(勢)가 불리하면, 부하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싸움에 가담할 수도 있을 성싶다.

그러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열세라고 해서 응원자가 운동장 안으로 뛰어들 수 없는

이치와 같았다.

옛날의 주먹패들은 싸움을 하는 데 그만큼 신사적이었다 할까,

낭만적이었다고나 할까. 부하들은 두목을 염려하면서도,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손에 땀을 쥘 뿐이었다.

하지만 김두한은 부하들이 염려하는 것만큼 녹록하지는 않았다.

그는 종로꼬마가 소리친 것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상대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자칫 몸을 뒤로 빼는 듯싶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화닥닥 달려들며 좌우 양편 두 주먹이 항구의 턱에 정확하게 터졌다.

눈 깜짝할 사이, 문자 그대로 전광석화 같은 기민한 동작이었다.

그러나 맞은 항구보다도 때린 김두한 편이 더 놀라고 말았다.

흔히 김두한을 일컬어 통뼈라 했다.

그 통뼈 주먹에 한 방을 정확하게 맞으면 누구든 곱게 뻗거나 턱주가리가 부서지지 않고는

못 견뎠다.

그러나 총알 한두 방을 맞고 끄떡도 하지 않는 킹콩처럼 비틀거리지도 않았다.

항구는 김두한의 무쇠 주먹을 맞고도 여전히 저돌적으로 돌진해 들어왔다.

주먹 같은 것은 휘두르지도 않았다.

그저 김두한의 팔이나 멱살을 움켜잡으려고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달려들기만 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김두한을 움켜잡기만 하면,

기차 바퀴를 들어올리듯 들어올려 개구리를 땅바닥에 패대기치듯 내던질 작정인 모양이었다.

그러나 쉽사리 잡혀줄 김두한이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날렵하게 항구의 주변을 맴돌면서 이따금 번개 같은 주먹을 날렸다.

YMCA 도장에서 이미 익힌 권투 실력이기도 했지만,

정말 무하마드 알리처럼 나비같이 날아서 벌처럼 쏘는 격이었다.

그러나 항구는 좀처럼 쓰러지지를 않았다.

쓰러져주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맷집이 좋은 사나이였다.

김두한은 다소 초조함을 느꼈다.

많은 부하들이 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간을 끌수록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저만치 비켜 섰던 공원 안의 노인들뿐만 아니라

종로 거리를 지나가던 행인이며 상인들까지 소문을 듣고 꾀어드는 판국이었다.

그야, 싸움 구경만큼 흥미진진한 공짜 구경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주먹계의 왕자 김두한이 붙은 세기적인 싸움인 것이다.

초조해진 김두한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주먹이 통하지 않으면 다리가 동원될 뿐이었다.

어디, 싸움이 권투 시합이 아니지 않는가.

이를테면 격투기(格鬪技)인 것이다.

특히 김두한에게 그의 발,

그의 다리는 비법의 보도(寶刀)나 다름없었다.

항구가 여전히 얻어맞으면서도 두 팔을 휘이휘이 내젓듯 하고 육박해 오자

김두한은 어느 일순 앞에 나온 오른쪽 발을 안에서 밖으로 돌려 몸을 180도로 회전시켜

상대의 어깨 견정혈(肩庭穴)을 내리찍은 것이다.

중국 무술의 태산 압정(泰山壓頂)의 비법이었다.

급소를 내리찍힌 항구는 욱, 둔중한 신음 소리와 함께 그 거구가 허공에 붕 솟구쳐 떴다가

쿵,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부하들이 안도의 숨을 내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켜보고 있는 관중들 사이에서도 일제히 탄성이 터졌다.

“과연 김두한이야.”

“저런 큰 덩치가 한 방의 발길질에 나가떨어지다니.”

뒤로 벌렁 나가떨어진 항구는 한참 동안 보기 사나운 꼴로 움칫도 하지 못하고

누워 있다가 레퍼리(심판)의 카운트 소리로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려는

권투 선수처럼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고는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싶었다.

그나마 일어서려고 바둥거리는 것도 워낙 덩칫값을 하는

저력과 근성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김두한은 나가떨어진 항구를 냉소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을 뿐

더 이상 손을 가하지 않았다.

조용히 이마에 돋은 땀을 손바닥 끝으로 닦아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망치며 문영철·종로꼬마의 기분은 그것이 아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감히 두목 김두한에게 도전을 해 온 놈이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김두한이 놈을 거꾸러뜨렸으니까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못했던들 어찌 될 뻔했나.

종로패 전체의 망신이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이를 생각하면 정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슬며시 화가 치밀어 오른 김두한패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우르르 달려들어 항구를 후려갈기고 발길질을 하며 몰매를 가하기 시작했다.

“아서, 아서!”

김두한은 크게 소리칠 것도 없이 가볍게 제지를 했다.

그러나 그 조용한 한마디에도 충분한 무게가 있었다.

부하들은 두목의 한마디에 주먹질이며 발길질을 멈추었다.

“죽은 자에게 매질을 가하는 법은 아니여.”

쓰러진 자에게 다시 일격을 가하는 것은 비겁한 짓이라고 일깨워 주는 두목이었다.

“배짱 있어 좋지 않냐. 어디 상한 데 없나, 병원으로 데려가 봐.”

김두한은 다시 한 번 나직이 말하고는 그 자리를 뜨려고 돌아섰다.

그러는데 여럿의 뭇매질에 축 늘어졌던 항구가 꿈틀거리며 일어나 앉으며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졌수다. 앞으로 김두한 당신을 형으로 모시겠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