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1

오늘의 쉼터 2014. 8. 28. 07:51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1  

 

 

마지막으로 김두한은 청계천에서 천변 노상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뛰어올랐다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벼룩처럼 튀어올랐다거나 날아올랐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겨울의 청계천은 얼어붙어서 물이 흐르고 있지는 않았지만,

얼어붙은 물줄기의 양옆은 둔덕을 이루어 다소 하상보다는 높은 편이었다.

그래도 노면까지는 어른 키 두 배에 가까우리만큼 높았다.

때문에 광교나 수표교의 양아치들이나 뱀탕 장수는 으레 나무 사다리를 놓고 오르내렸다.

그런데 김두한은 개천을 따라 몇 걸음 하류 쪽을 향해 내려가더니,

갑자기 붕 솟아오르듯 노면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잠깐 오금을 오므렸을 뿐

둑 벽면의 어디를 걸치고 힘을 주었는지,

벽면을 발끝으로 냅다 차듯 하고는 벌써 노상 위에 오른 것이다.

손 같은 건 짚지도 않았다.

우선 손을 쓸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양손에 휘발유를 담은 맥주병이 쥐어져 있었으니까.

천변으로 뛰어오른 그의 검은 그림자는 벌써 어두운 골목 안으로 연기처럼 빨려 들어갔다.

김두한 역시 이미 정해진 군수 공장의 중심 지역 안으로 깊숙이 진입해 들어간 것이다.

골목 안 담장에 바싹 붙어 주위를 용의주도하게 살피기는 하였으나,

눈에 띄는 그림자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

얼씬거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는 것은 김두한 자신을 위해서도 다행한 일이었으나,

얼씬거린 자 편에서는 더욱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얼씬거린 자가 있었다면 그가 순사이든 야경(夜警)이든 김두한을

수상히 여기고 달려들었다간 그대로 살려둘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목표 지점에 당도한 그는 공장의 나무 대문과 담벽 안에 마구 휘발유를 뿌렸다.

골목 안 길에다가도 흥건하게 끼얹었다.

2시 20분.

그는 호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휘발유를 뿌린 대문이며 담벼락에 불을 그어 붙였다.

불길이 확 달아오르면서 불붙기 시작했다.

2시 20분은 대원들이 각자 맡은 지점에서 일시에 불을 붙이기로 미리 정해 놓은 시각이었다.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한 이상 그는 더 이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는 오던 길로 되돌아 표범처럼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불붙은 화염은 때마침 불어대는 강한 바람을 타고 검은 연기를 뿜어대면서

활활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골목길을 빠져 청계천변에 당도하기도 전에 화염은 탁탁,

모닥불 터지는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타고 있었다.

김두한은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

그대로 청계천 아래로 뛰어내렸다. 장교 밑을 지나 상류 쪽인 광교 근처까지 올라가서

반대편 노상으로 뛰어올랐다.

뒤돌아보니,

뭉게구름과도 같은 연기와 함께 중천까지 날름거리며 솟아오르는 화염이 밤하늘을

훤하게 비추어주고 있었다.

김두한은 악마와도 같은 미소를 히죽 웃으며 관철동 골목 안 청평 여관 쪽을 향해 갔다.

청평 여관에는 부용의 민자가 기다리고 있기로 미리 약속돼 있었던 것이다.

 

청평 여관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아무리 여관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늦은 시간까지 문이 열려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김두한은 여관 문을 흔들 필요가 없었다.

실은 자정 무렵 장교 밑에 휘발유병을 옮겨놓은 후,

그는 일단 청평 여관으로 철수해 있었다.

물론 민자와 함께였다.

1시간도 넘게, 아니 2시간 가까이 젊은 여자와 더불어 있었다면 그건 뻔한 일이었다.

그동안 그는 염치 좋게 젊음을 불태웠던 것이다.

민자는 속옷을 주워 입지도 않고,

맨살의 어깨를 드러내놓고 노곤해서 잠들어 있었다.

“나, 잠깐 다녀올게.”

시간이 가까워오자,

김두한은 부스스 일어나 앉아 민자의 볼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말했다.

“어딜?”

민자는 눈도 뜨지 않고 코 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조양 여관에. 아이들이 기다릴 것 같아서 말야.

곧 돌아올 테니까……. 1시간도 안 걸릴 거야.”

민자는 안심을 해서인지,

불태운 육신의 여진(餘燼)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아서인지,

풀어진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두한은 거치적거리는 외투도 걸치지 않았다.

여관집 주인도, 손님들도 잠들었을 시간이지만,

문을 따고 나가지도 않았다.

잠든 사람들을 깨울 필요도 없었지만,

항상 만약에 대비하는 습성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설령 군수 공장의 방화 사건이 탄로가 나고 혐의를 쓰게 되는 일이 있더라도

알리바이를 만들어놓기 위해서였다.

공장이 불타고 있는 그 시간,

아니 그 이전인 자정 무렵에 민자와 함께 와서 자고 새벽까지 있었다는

증인을 얻어두기 위해서 그는 문을 따달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문을 열지 않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에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담을 뛰어넘는 것뿐이었다.

양손에 맥주병을 들고 손도 짚지 않고 키보다 높은 청계천을 뛰어오를 수 있는 그가,

그까짓 얕은 여관집 담장 하나 뛰어넘기는 닭이 지네 쪼아먹듯 수월한 일이었다.

한참 후 김두한은 청평 여관 앞에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안에서 밖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담을,

밖에서 안으로 뛰어넘을 수 없을 까닭이 없었다.

그는 뒤따르는 자가 없을까,

본능적으로 뒤돌아 살펴보고는 철봉틀에 매달리듯 담장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러자 손의 힘으로 몸이 솟구쳐 오른 것이 아니라,

담장 편에서 그의 손의 힘으로 내려앉기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담장 안쪽으로

그의 몸은 작은 원을 그리며 떨어지는 것이었다.

그 거구가 떨어지면서도 바삭 소리도 나지 않았다.

담장을 뛰어넘은 그는 화장실에라도 다녀오는 체,

일부러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면서 민자가 자고 있을 방으로 들어갔다.

“몰라요! 나만 혼자 남겨놓고 어딜 갔다 오셨어요?”

민자는 일어나 앉아 있지는 않았지만 누워서 자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두한은 이에 대답할 사이가 없었다.

그와 민자는 똑같이 귀를 곤두세우는 것이었다. 
 
고요한 밤을 찢어놓듯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진 것이다.

그제야 장교동의 불길을 보고 가까운 수표교 쪽 소방서에서,

그리고 광화문 소방서에서 불자동차가 달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죠?”

자리에 누운 채 응석이라도 부리듯 코 먹은 소리를 했던 민자가 깜짝 놀란 듯 일어나 앉았다.

그녀도 그것이 불자동차의 사이렌 소리인 줄을 알았고,

그것이 너무 가까이서 들렸기 때문에 바로 자기가 자고 있는 여관집이 타고 있는 것처럼

놀라서 일어나 앉은 것이다.

그녀가 일어나 앉자 어깨 위까지 덮고 있던 이불 위로 맨살의 앞가슴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김두한의 커다란 손으로도 한 손으로는 남을 듯한 탐스러운 앞가슴이었다.

김두한은 이처럼 도발적일 만큼 탐욕스런 젖가슴을 보는 것은 처음인 것처럼 생각되었다.

실제로 이불 속에서 그녀의 야들야들하면서도 탄력이 있는 앞가슴을 더듬어 만져본 일은

있었어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의 것을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여자의 육체란 생각보다 아름다운 것이로구나!)

그는 순간 전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실상, 바로 인접해서 들리는 사이렌 소리는 앞에서 들리는 것인지 뒤에서 들리는 것인지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방 안에까지 불빛이 비치어 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점점 가까이 번져오는 것도 같았고,

불똥이 옮아 튀어오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강 건너 불이라 하지 않는가. 청계천 너머의 불인 것이다.

그 불은 말할 것 없이 자기 자신이 휘발유를 뿌리고 지른 불인 것이며,

아무리 바람을 타고 불길이 퍼진다 해도 청계천을 넘어올 불길은 아닌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솔직히 불안했다.

정말로 그 불길이 옮아와 그들이 자고 있는 여관에까지 옮아 붙을 것처럼 두려웠다.

어쩌면 민자보다도 더 겁을 먹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것은 불길이 옮아 붙을까 해서 두려워하는 불안은 아니었다.

실은 죄 지은 자, 방화범이 갖는 어쩔 수 없는 마음의 그늘이었다.

이 두려움, 불안감을 씻어줄 수 있는 것은 민자의 탐스러운 앞가슴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자동차 소리 처음 들어? 넓은 장안 바닥에 불난 일이 한두 번이냐 말야.

아무리 타도, 타는 집보다도 안 타는 집이 많은 법이니까.”

그는 무엇엔가 화라도 난 사람처럼 옷가지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면서 내뱉듯이 말했다.

옷을 내팽개치듯 벗은 그는 마치 싸움을 하듯 민자의 이불 속으로 뒹굴듯이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그 굵은 팔뚝으로 가냘픈 여체를 낚아챘다.

민자의 그 소담하고 탐스럽던 앞가슴은 이내 육중한 체중에 납작하게 짓눌렸다.

“타라지, 타.”

더욱 가까이, 더욱 요란스럽게 들리는 사이렌 소리와, 불똥이 튀어 오는 듯한 환각은

그의 흥분에 박차를 가해 주었다.

이 시간, 그는 더 이상 불안하지도 초조하지도 않았다. 
 
불길이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일까, 너무 넓게 번져가고 있는 것일까.

바로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는 연이어 꼬리를 물었다.

아마도 멀리 용산이나 동대문 쪽에서 응원의 소방차가 동원된 모양이었다.

불안·초조를 삼켜버리는 육신의 포화 상태가 갑자기 바람이 빠진 기구(氣球)처럼

축 늘어지면서 위축된 뒤, 김두한은 다시금 불안과 초조가 스멀스멀 되살아나며

거기에 폭삭 주저앉아버릴 것 같은 피로까지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너무 불길이 번져서 애꿎은 조선인 주택가에까지 옮아 붙으면 어쩐다지?

멍청한 놈들이 제대로 도망을 치지 못하여 붙들리기라도 했으면 어쩐다지?

그는 민자의 따뜻한 여체에 파고들듯 하다가도 불현듯,

일어나서 불타는 현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러나 몸이 무거워서도 일어나지 않았고, 무서워서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방화 사건을 전후해서 워낙 긴장도 했었다.

아무리 무쇠 같은 강인한 체력이라 하지만 거기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었다.

극도로 지치기도 했다. 거기에 가중되는 불안, 초조, 공포.

사람이란 극도로 불안해지고 초조해지면 일종의 체념 상태를 느끼게 되는 것일까.

사이렌 소리가 더 가까이, 더 요란하게 들려오는데도 그는 걷잡을 수 없는 졸음으로 하여

근심과 걱정을 밀어놓은 채 드렁드렁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들어 갔다.

김두한이 잠든 사이에도 불길은 여전한 모양으로 타고 있었다.

군수 공장이라고 하지만 말이 공장이지, 온통 나무로 된 조선 기와집인 것이다.

거기에 여기저기 요소(要所)에 흥건하게 휘발유를 뿌리고 일제히 불을 붙인 것이다.

바람마저 강하게 불어 불길은 단숨에 온동네를 휘말아버릴 것처럼 소용돌이쳤다.

가까운 수표교 쪽 소방서와 광화문 소방서에서 소방차가 달려든 것은 물론이고,

또한 당연했다.

아무리 겨울날의 깊은 야반에 일어난 화재라 하지만, 장교동은 서울의 중심가인 것이다.

소방차가 몰려든 것과 함께 주민들이 놀라고 당황해서 깨어나 소방 작업에 가담한 것도

물론이며 당연했다.

군수 공장의 공장 사람들은 말할 것 없이 주변 주민들,

심지어 청계천 건너의 상인들이며 주민들까지 꾀어들었다.

개중에는 그저 불 구경을 하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도 있었겠지만

본격적으로 불을 끄기 위해 나서는 사람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는 수표 다리 밑의 양아치패들이며,

관철동 골목 안의 주먹패들, 똘마니급들도 섞여 있었다.

이들은 이 불이 그들의 두목인 김두한과 그 중진급 패거리들이

질러놓은 불이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

이들은 소방수들 못지않게 진화 작업에 협력했다.

그러나 진화 작업에 협력하고 있는 주먹패들 가운데에 뜻밖에도

직접 방화에 가담한 정진영·문영철·윤병철에 시구문돼지까지 섞여 있었다.

이들은 자신이 지른 불길을 바라보며 마음속으로는 쾌재를 부르면서도

불길이 조선인 주택가로까지 옮아 붙으려 하자 소매를 걷어붙이고

진화 작업에 나선 것이었다. 
 
“야, 두한아, 두한아. 여태 자냐, 여태 자?”

곤한 잠에 떨어져 있던 김두한은 잠결에도 귀에 익은 목소리에 번뜩 눈을 떴다.

그리고 동시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전등 불빛이 그대로 밝혀져 있고, 덧문을 닫은 채로여서 몇 시쯤 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지만, 낯선 방이라는 것은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다.

옆자리의 민자의 따뜻한 체온만으로도 거기가 어디인가 이내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청평 여관이며, 그를 깨우러 온 것은 망치였다.

어제 자정 무렵까지 부용에서 함께 술을 마신 망치는 혼자 처졌었다.

예의 야맹증으로 하여 방화 사건에 가담할 수 없어,

그는 혼자 조양 여관으로 돌아갔었다.

김두한은 망치와 헤어지면서 만약을 위해 민자와 함께 있을 소재를 미리 일러두었던 것이다.

그는 망치의 목소리를 듣자,

그 여느 때 없이 반가웠다.

곤한 잠을 자면서도 꿈속에서까지 마음을 졸이게 했던 불안과 초조가

그의 목소리 하나로 말끔히 가시는 듯했다.

“어, 망치야? 가만있어. 나, 곧 옷 입고 나갈게.”

그는 벌떡 일어나서 옷가지를 꿰입기 시작했다.

아직껏 속옷 하나 입지 않은 민자도 허둥거리고 일어나서 쩔쩔매며 옷을 찾아 입기 시작했다.

“너, 팔자 한번 좋구나.

밤사이에 이웃에 그처럼 큰불이 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잠만 자다니.”

“뭐, 불? 어디서?”

김두한은 딴전을 부리면서 마음이 크게 놓였다.

망치는 방화 사건이 거뜬하게 성공을 보았고,

돌격대원들에게도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큰소리로 귀띔해 주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사실, 그는 잠 속에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아무리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다녔어도 새벽 운동을 하러 갈 시간이 되면,

누가 깨우지 않더라도 어김없이 깨는 그였다.

그렇지만 머뭇거리며 일어나지 않았던 것은 바깥 세상의 일에 겁이 났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무리 담력이 센 주먹패의 두목이라고는 하지만,

그도 인간인 것은 분명해서 겁이 없을 수 없었다.

어쩌면 담력과 겁은 동전의 앞뒷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담력과 겁은 한 손아귀 안에 있는 것은 아닐는지,

때문에 담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담력을 보인 순간부터 겁을 먹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 두려움을, 그 불안을, 그리고 그 겁을 망치의 한마디가 깨끗이 씻어준 것이다.

그는 기분이 후련해져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민자의 볼을 가볍게 토닥여주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 길로 김두한은 망치와 함께 삼청 공원으로 향했다.

삼청 공원에는 머리 빠진 개고기, 심청, 다루마찌 등 돌격대원이 아닌 부하들이

먼저 와 역기를 들고 철봉틀에 매달리고 있었다.

종로꼬마는 조병창으로 출근했을 것이며,

김동회는 고따마 체육관으로 운동을 하러 갔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이것으로 사건이 조용해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