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8

오늘의 쉼터 2014. 8. 28. 07:31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8  

 

 

비바람이 휘몰아치는 광란의 밤이 새벽을 맞으면서 언제 그랬느냐 싶게 맑게 개는 것처럼,

김두한도 평온하게 다음날 새벽을 맞았다.

그가 비밀 탄약고를 폭파하고 무사히 조양 여관으로 돌아온 것은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수색에서 버젓이 기차를 타고 돌아왔다.

버젓이 기차를 탔다고는 하지만 물론 차표를 끊고 개찰구를 통해 기차를 탄 것은 아니었다.

역 구내 철책으로 몰래 침입하여, 마침 정차중에 있는 차에 올라 난간에 매달려서 왔다.

기차에서 내린 것은 경성역에 닿기 직전 봉래 다리 못 미쳐서였다.

서행하는 기차에서 뛰어내렸던 것이다.

김동회와 행동을 함께 했지만, 관철동 입구에서 갈렸다.

“우리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거야. 일이 있은 것은 망치뿐이지…….

되도록 일찍 하야시를 찾아가서, 망치 좀 부탁한다고 떼를 써봐.

내 간곡한 청탁이라고 말이지.

날이 밝는 대로 난 언제나처럼 삼청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가겠으니까…….”

김두한은 큰일이라기보다,

무서운 일을 저지른 사람답지 않게 심상하게 말했다.

더구나 터지는 폭음 소리와 타오르는 불기둥을 바라보며

미친 듯 웃어댔던 사나이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의 마음이 그렇게 잔잔할 수만은 없었다.

속이 탈 만큼 조바심도 났고 초조했다.

그는 기진맥진해서 술에 취한 듯 비틀거리며 여관으로 들어섰다.

불침번으로 여관을 지키고 있는 똘마니급 부하가 정말로

그가 술에 취해 있는 줄 알고 두목을 맞았다.

“웬 술을 그렇게 많이 드셨어요?”

비틀거리는 그를 부축하려고까지 했다.

“괜찮아. 종로꼬마는 돌아왔냐?”

“아뇨. 함께 드신 것 아닙니까?”

“어디로 샜지? 돌아오면 내 방으로 들어오라 해.”

김두한은 정말로 주정을 하는 듯한 말투로 내뱉고는 휘청휘청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부하들이 그가 술에 취한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

부하들에게까지 철저히 숨겨야 하는 것이 미안하게도 생각되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는 옷도 벗지 않고, 그대로 벌렁 자리에 누웠다.

사람이 녹초가 된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까.

기꾸스이 사건 때나, 수표 다리 위에서의 편싸움을 치르고 난 다음에도

이토록 지독한 심신의 피로는 느껴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피로감에 비해 잠은 좀처럼 오지 않았다.

(꼬마는 왜 돌아오지 않는 게지? 뭐 잘못된 게 아냐?)

근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엄습해 왔다.

동이 텄다.

동창이 희뿌옇게 벗겨져 갔다.

이 시간이면 종로꼬마나 망치는 영락없이 먼저 일어나서

새벽 운동을 하러 가자고 깨우는 것이 상례였다.

그런데 경찰서로 붙들려 간 망치는 그렇다 치고,

종로꼬마나 문영철은 도대체 어떻게 됐단 말인가.

조바심이 나서 속으로 끌탕을 하고 있는데 밖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렸다.

김두한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두한아, 두한아.”

대문 앞에서부터 소리치고 들어서는 것은 어김없는 종로꼬마였다.

너무나 반가웠던 김두한은 화닥닥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 종로꼬마와 문영철의 얼굴을 본 순간,

소스라칠 것까지는 없었으나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사나이의 얼굴이 똑같이 앙괭이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나 땀을 많이 흘린 데다가, 먼지를 흠뻑 뒤집어썼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거냐?”

김두한은 두 사나이를 허겁지겁 맞아들였다.

그 몰골을 누가 보지나 않았을까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누가 그 꼴을 보았다면,

땀을 흘리고 시골길을 달려온 것을 이내 알아챌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여태껏 자냐? 오늘은 새벽 운동도 안 갈 참이냐?”

다른 동료들 앞에서도 철저하게 연막을 치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종로꼬마는 능청을 부리면서 김두한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방에 들어서자마자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두한아, 너 언제 왔어?”

“나야 벌써 와서 한숨 잤지만, 너희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이제 와?”

“이제 오다니. 한참 폭탄 터지는 소리 들으며 불 구경하다가 산길,

밭길을 헤치며 걸어왔으니까…….”

“멍청한 놈 봤나. 그 먼 길을 걸어와? 그래 공짜 차 하나 얻어 탈 주변도 없어?”

김두한은 너무나 반가워서 일부러 주먹질로 쥐어박는 시늉을 했다.

“그랬다가 남의 눈에 띄면 어쩌려구?”

“남의 눈 피하려다 너희들 꼬라지 보고 더 수상하게 여길 게다.”

김두한은 두 사나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이없는 얼굴로 바라보았을 뿐, 긴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종로꼬마나 문영철이나 서로 어두운 밤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으나,

환한 불빛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의 몰골을 상상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로 운동을 가? 빨리 세수나 해.”

김두한은 종로꼬마와 문영철을 가볍게 떠다 밀었다.

이들은 물론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는 언제나처럼 천연덕스럽게 삼청 공원으로

새벽 운동을 하러 갔다.

 밤새껏 한눈도 붙이지 못한 그들이었다.

잠을 자지 않았을 뿐이 아닌 것이다.

어떤 치열한 전투보다도 더 격렬한 싸움을 하고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전혀 피로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남달리 강인한 체력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했지만,

그만큼 철저하게 위장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다른 때보다도 더 명랑한 얼굴로, 떠들썩하게 지껄여대며 공원을 향했다.

일부러 우회해서 종로 경찰서 앞을 지나갔다.

요컨대 늦은 밤 시간까지 서울에 있었고,

새벽부터 서울에 있는 모습을 알리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처럼 철저하게 사전·사후 계획을 세웠기 때문인지

의심의 눈이 종로패에게 쏠리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러나 어이없게 당한 일본군 당국의 당황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무장한 정규 군인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무리들의 기습을 받아 맥없이 당했고,

비밀리에 지켜온 탄약고가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으니,

그 낭패감은 미루어 짐작할 만한 일이다.

탄약고의 피해 상황이 어느 만큼의 것인지는 자세히 모른다.

하지만 폭발물에 불이 붙은 것이니,

얼마나 잘 타고 얼마나 잘 터졌겠는가.

후에 소문으로 들은 얘기지만, 밤새껏 터졌다고 한다.

폭음은 다음날 낮까지도 계속 들렸는데,

진화 작업은커녕 섣불리 접근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종로꼬마와 문영철에게 당한 보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아마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살아남기는커녕 뼈다귀도 추리지 못하고 가루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갱 내의 연속적인 대폭발에 그 하잘것없는 육신이 무엇으로 지탱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당국에서는 사고 원인을 파악하려 들었을 것이며,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눈에 핏발을 세웠을 것이었다.

그러나 보초가 가루나 재가 되어버려 증언할 자도 없었고,

탄약고 내가 터지고 또 터져, 증거가 될 만한 흔적 하나조차 남은 것이 없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범인 색출을 위해 탐문 수사에 나섰을 것이다.

 인근 마을 사람들이 불려가고, 탄약고 공사에 동원되었던 인부들이 붙들려 갔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단서 하나 잡지 못했다.

종로에서도 경찰들의 가두 검색이 심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폭행 사건이었다면 제일 먼저 용의를 두고 검문할 주먹패들은

오히려 건드리지를 않았다.

김두한을 위시한 주먹패들의 그날 밤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있었기도 했지만,

도시 김두한이나 그 패거리들이 폭행·강탈이나 했으면 했지,

멀리 일산까지 가서 비밀 탄약고를 폭파하리라고는 감히 상상도 못 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두한은 심해진 가두 검색을 알고 은근히 마음이 켕기기는 했지만 평상시와 다름없이 행동했다.

정진영을 종로 경찰서로, 김동회를 혼마찌깡으로 보내 망치의 구명 운동도 계속케 했다.

종로 경찰서에서도, 혼마찌깡에서도 망치 구명 운동을 하고 있는 정진영이나 김동회가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의 범인들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지금 경찰에서는 정신이 없어. 놈(망치)의 사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단 말야!”

망치의 구명 운동을 위해 찾아간 김동회에게 하야시가 한 말이었다.

“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김동회는 가슴이 섬뜩했지만, 딴전을 부리면서 물었다.

“응, 어젯밤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야.

나도 자세히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형님도 모르시는 사건과 망치의 일은 별개의 일이 아닙니까.

술 마신 개라 하지 않아요? 술 먹고 저지른 일인데,

형님이 힘써주시지 않으면 누가 써줍니까?”

김동회는 떼를 쓰듯 매달리며,

마침내 하야시 형님에게까지 거짓을 가장하게 된 자신의 마음이 괴로웠다.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은 사람들의 입으로만 전해졌을 뿐,

물론 신문이나 라디오에는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군이나 경찰이 개망신을 당한 사실을 보도할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조선일보〉나 〈동아일보〉 등 민족지는 정간중이어서

발행도 못 하고 있었던 시기였으니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범인들이 체포되었다는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김두한을 비롯한 7명의 돌격대원들이 경찰에 소환당한 일 한 번 없이 건재하게 있는데,

범인들이 체포됐을 리 없는 일이었다.

군이나 경찰에서는 애꿎은 양민만 괴롭혔을 테지만,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유야무야로 끝난 모양이었다.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도, 종로패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김두한은 돌격대원 모두가 무사한 것에 안도하며,

비밀스러운 자축연으로 밤을 지새웠다.

혼마찌서에 붙들려 간 망치는 열흘 만에 풀려 나왔다.

김두한·김동회·정진영 등의 끈질긴 석방 운동이 주효했고,

또한 하야시의 입김이 꽤 컸으리라.

그야 어찌 됐든 망치는 얼굴은 말할 것 없이 온몸에 구렁이 같은 멍이 든 몸으로 풀려난 것이다.

어지간히 얻어터진 모양이었다.

(내 대신 맞은 것이나 다름없지.)

김두한은 푸짐한 위로금과 함께 개 한 마리를 잡아 몸을 보신케 했다.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이 다행이지. 한 1주일 개장국이나 먹으면서 몸을 풀어.”

김두한은 마음속으로는 망치에게 매우 미안했으나,

입으로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수색…… 천렵은 재미있게 치렀냐?”

망치는 김두한과 단둘이 있을 때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물론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을 두고 한 말이었다.

“쉿, 네가 빠져 섭섭하기는 했지만,

네가 대신 들어가 준 덕에 거뜬히 해치웠지.

하지만 앞으로는 입 밖에도 내지 마.”

“그럼 됐어.”

망치는 멍이 들고 부어오른,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더욱 일그러뜨리며 히죽 웃었다.

그도 아픔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까닭이 없었다.

온몸이 쑤시는 고통으로 밤이면 신음을 했다.

그러나 병원 같은 것은 찾지도 않았다.

병원이라는 기관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저 조양 여관에 묵으면서 개 한 마리를 먹어치우는 것이 치료이며 몸 보신의 전부였다.

중개도 넘는 꽤 큰 황구 한 마리였는데,

그것을 혼자 먹으면서도 하루 세 끼와 다음날 한 끼를 다 채우지 못하고 먹어치우는 먹새였다.

이른바 똥개라는 황구에 쇠약해진 육신을 회복케 해주는

어떠한 약효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개 한 마리를 먹고 나자 망치의 몸은 거뜬해졌다.

아직 몸의 멍 자리는 다 풀리지 않았지만 1주일만 쉬면서 몸을 풀라 했는데도,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자 벌써 새벽 운동을 하겠다고 따라나서는 것이었다.

똥개의 효험보다도 그만큼 망치의 체질이 강인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쯤 되자,

김두한은 새로운 모험심이 꿈틀꿈틀 다시 일어나는 것이었다.
 
하면 된다는, 토인의 미신과도 같은 자신이 붙은 것이다.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완벽한 준비와 함께 비밀 유지의 보완만 강화하면

그까짓 비밀 탄약고쯤의 폭파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김두한은 만용에 가까운 자신과 함께 재미가 붙은 것이었다.

기회만 있고, 그런 장소만 있으면 다시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과 같은

또 다른 모험을 감행하리라고 마음에 다지고 있었다.

미리 밝혀두지만, 하긴 따로 밝힐 필요도 없는 일이지만 김두한과 그 패거리들은

어디까지나 폭력을 수단으로 삼는 건달패이다.

그들 스스로 남다른 의리와 의협심을 갖고 있는 협객이라고 자처는 하고 있지만,

그래도 주먹 위주의 폭력배라고 했대서 큰 망발은 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폭력의 개념이 오늘의 그것과 질이 다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들이 국외로 망명하여 조선 독립을 위해 항쟁하는

독립군과 똑같은 수준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한 기반도 조직도 실력도 없었다.

배움이 없는 그들이어서 투철한 민족 정신이나 독립 사상도 희박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민족 감정만은 남달리 왕성했다.

이들은 비밀 탄약고를 폭파하는 일이 조선 독립을 위해 얼마만큼 도움이 되는 일인지는 몰랐다.

조선 독립과 연관시켜 탄약고를 폭파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남달리 민족 감정이 왕성했으므로 그저 일본놈들을 골탕먹이기 위해 순전히 협객다운

재미로 일을 저질렀고, 저지르려고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조선 독립군 총사령관 백야 장군의 아들이라는 자각심을 갖고 있었던 김두한에게 설사

그런 민족 의식이나 독립 사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이끄는 동료나 부하들 모두가

똑같은 의식이나 사상을 갖고 있었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두목이 하자니까 하고, 친구들이 한다니까 함께 하고, 일본놈들을 골탕먹이는 일이니까

재미있어서 한다는, 그저 그뿐만의 것이었는지 모르는 것이다.

또 김두한이 설사 제2차의 탄약고 폭파 사건을 획책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마냥 이 한 가지 일에만 골몰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세력 확장과 이권 다툼, 주먹 세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크고 작은 사건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한 세계 속에서 두목으로 자리한 김두한으로서는 한가할 틈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항상 제2의 탄약고 폭파 사건과 같은 일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주먹패의 두목으로서 세력 확장이나 이권 다툼을 위해 한 행동이나 그 무렵의 주먹계의

두목다운 활동 양상에 대해서는 기회 있을 때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우선 그들의 제2, 제3의 항일 투쟁에 대해서만 하나로 묶어 언급해 두기로 하겠다.

이처럼 길게 사족을 붙이는 것은 시기(時機)를 건너뛰면서 기술을 해야 하고,

김두한이나 종로패가 순전한 독립 투쟁 조직이었느냐는 항변을 들을 염려가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구구한 설명을 늘어놓는 것이다.

이야 어찌 되었거나 1942년 가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