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2

오늘의 쉼터 2014. 8. 28. 07:51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2  

 

 

이날 조간 신문에는 장교동 화재 사건이 간략하게 보도되었다.

그러나 군수 공장 시설이 불탔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저 장교동 주택가에 불이 났다고만 한 것이다.

시내 중심가에 자못 큰불이 났는데도 이처럼 기사가 작게 난 것은,

조선인 주택가에 위장 군수 공장이 있었다는 것을 숨기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화재 사건으로 말미암아 위장 공장의 실상이 폭로되는 것을 꺼렸을 것이다.

되도록이면 수색 방면의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 때처럼 사건 자체를 묵살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안 한복판에서 일어난 큰불을 완전히 묵살할 수도 없었고,

은폐할 수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간략한 기사 내용에 의하면, 화인(火因)은 경찰서에서 조사중에 있으나

워낙 추운 날씨에 주민의 부주의로 잠결에 피워놓은 난로를 잘못 건드려

발생한 듯하다고 거의 단정적으로 보도를 했다.

거기에, 주택가가 가연성(可燃性)이 강한 목조 건물인 데다 때마침 강풍이 휘몰아쳐

삽시간에 불타 버렸고, 혹한에 수돗물이 얼어붙어 소화 작업이 늦어져 피해가 심했다고 했다.

피해액은 조사중에 있으나, 화상자가 5명에 이른다고도 보도되었다.

그뿐, 더 이상의 언급은 없었다.

목조 건물인 조선 기와집이 몽땅 전소해 버렸고,

건물 내부의 기계류·기자재가 완전히 녹아버려 사용 불능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재 원인을 규명하기 전에 피해 상황을 자세하게 보도하지도 않고 하찮은 실화 사건으로

단정해 버리려 한 것은 무슨 까닭일까.

모르긴 몰라도 조선인 주택가 내에 위장 군수 공장을 설치해 놓은

그 자체를 계속 은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화인을 단순한 실화 사건으로 처음부터 몰고 가려 한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군수 공장에의 계획적인 방화 사건에 의심이 간다고 보도했다간 적잖이

민심에 자극을 줄 것을 염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유야 어찌 되었거나 화재 사건의 속보는 더 이상 없었다.

경찰에서는 은밀하게 화인을 조사했을 것이다.

방화에 심증을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 된 영문인지, 멀지도 않은 코앞에 둔 방화범들인 김두한이나

종로패에게 혐의를 두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의혹의 눈은커녕 진화 작업에 적극 협력한 주먹패들의 노고를 치하하기까지 했다.

김두한은 화재 현장에 다시 나타나지 않았지만,

방화 사건에 직접 가담한 정진영, 문영철은

자기 자신들이 붙인 불의 진화 작업에 적극 가담했다.

그것은 공장의 피해 상황을 직접 목격하고 확인하고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불길이 인근의 조선인 주택가에 옮아 붙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광교나 수표 다리 밑의 양아치패들이며 우미관 골목의 똘마니패들도

요란한 사이렌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나 몰려들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놀라서 모여들었고, 강 건너 불처럼 구경만 하고 있었으나

문영철이 부하들에게 불호령을 내리자 진화 작업에 나섰다.

“무엇들 하고 있어. 불을 꺼! 이웃에 불길이 옮아 붙지 않게.” 

 

문영철·정진영을 위시한 종로의 주먹패,

양아치패들은 소방수들과 함께 물을 뿌리기도 하고,

옮아 붙기 쉬운 기물을 미리 때려부수기도 하고,

이웃 주민들의 가구를 안전 지대로 옮기는 작업을 돕기도 했다.

심지어 문영철·정진영은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미처 대피하지 못한 공장

내 주민들의 구출 작업에 앞장을 섰다.

깊은 야밤의 느닷없는 화재에도 부상자가 5명에 불과했던 것은 이들의 힘이 컸기 때문이다.

이처럼 주먹패들이 앞장서서 진화 작업에 협력을 했기 때문인지,

경찰에서는 방화범인 김두한이나 그 패거리들에게 전혀 의혹의 눈길을 돌리지 않았다.

김두한과 그 부하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새벽 운동을 했고,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아침식사를 든 후에는 역시 평소처럼

관내의 상가를 두루 살피며 순시했다.

거리의 상인들은 장교동의 화재 사건을 두고 쑥덕공론이 많았으나,

그것이 김두한패의 방화에 의한 것이라는 낌새를 채고 있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종로 거리에는 아무런 이상이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날 종로꼬마 이상욱도 이른 아침 평상시와 다름없이 조병창으로 출근을 했다.

그의 일과는 여전히 부평 조병창을 떠나 인천 소년 형무소에 들러 자재를 싣고

장교동 공장으로 향해 가는 것이었다.

부평 조병창에서는 아직 장교동 공장의 화재 사건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종로꼬마는 전혀 알은체를 하지 않았다.

그저 천연덕스러운 선선한 얼굴이었다.

인천 소년 형무소에서 자재를 싣고 장교동 공장에 당도했을 때,

불은 완전히 꺼져 있었지만,

아직도 못다 탄 여한이라도 있었는지 검은 연기가 군데군데 피어 오르고 있었다.

목조 건물인 한옥은 기둥도 남지 않고 깡그리 타버려 잿더미가 되었고,

기계류 같은 쇠붙이조차 고열에 녹아 보기 흉하게 문드러져 있었다.

아직도 연기를 뿜으며 타고 있는 것은 공장 안에 있던 자동차 바퀴인 고무 타이어였던 것이다.

화재 현장에는 새끼줄이 둘러쳐져 있었고, 그 안에서 공장 직공들이

그나마 정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저런! 이게 웬일이지!”

종로꼬마는 운전사 히라야마에게도 철저하게 시침을 떼고 혀를 찼다.

이들이 싣고 온 자재는 부릴 곳이 없었다.

물건을 그대로 싣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이날 종로꼬마는 기숙사에서 묵고, 서울로 퇴근을 하지 않았다.

어쩐지 뒤가 켕겨 서울로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날은 싫어도 화재 현장으로 가야만 했다.

기자재를 싣지 않고 빈 차로 갔다.

화재에서 타고 남은 기계류를 고철 처분하기 위해 인천 소년 형무소로

실어 날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철저하게 타버린 화재 현장을 또다시 목도하고,

쾌재를 부르기에 앞서 조마조마해지는 가슴을 저버릴 수가 없었다.

이만한 대화재가 났는데, 그 방화범이 무사할 수는 없으리라는 죄의식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종로꼬마의 기우인 듯싶었다.

경찰 당국에서 장교동 화재 사건을 어떻게 처리했는지 모르지만 김두한이나

그 패거리들에게 방화 혐의를 두고 있는 것 같은 낌새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주먹패들이 몸을 아끼지 않고 진화 작업에 협력한 것을 경찰서나 소방서에서

치하를 했다 함은 이미 언급한 대로다.

이는 김두한이나 종로패를 위해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사실(史實)에 가정(假定)의 설정이란 불필요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 만약 김두한패의 방화 사건이 발각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물론 체포되었을 것이다.

장교동 방화 사건만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대역죄에 속할 테지만,

여죄(餘罪) 추궁 끝에 일산 쪽의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이라도 탄로되었다면 어떠했을까.

단순한 형무소 신세가 아니라,

틀림없이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처해졌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 이후 김두한이란 존재는 이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 대신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그를 다시없는 독립 투사로 기술했을 것이며,

그는 민족적인 애국 투사로 숭앙을 받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지 않았다.

장교동의 화재 사건은 단순한 실화 사건으로 처리되면서

그의 투쟁은 공개되지 않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그대로 묻혀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있었던 사실이 처음부터 없었던 것과는 똑같은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과 장교동 방화 사건에 가담한 김두한과 여타의 돌격대원들은

이 양대 사건에 철저하게 입을 봉했다.

일제 시대 그 당시는 사건이 탄로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입을 봉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후 일제로부터 광복이 되고서도 그다지 떠벌리지 않았다.

그 정도의 사건은 그의 생애가 가졌던 무수한 사건, 무수한 싸움의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다지 자랑거리삼아 내세울 것도 없었다.

그의 생전에 더러 이 사건을 입 밖에 낸 일도 있기는 하였지만,

아무도 이를 귀담아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듣는 편에서도 역시 그의 무수한 사건,

무수한 싸움의 하나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흘려 넘긴 것이다.

원래 김두한은 입담도 좋고, 술에 취하면 좌중의 흥을 돋우기 위해 그럴듯하게

허풍도 잘 떨었기 때문에 으레 그가 만들어낸 좌담쯤으로 여겼을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었던 일은 어디까지나 있었던 일이다.

사건이 발각되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수색의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도, 장교동의 위장 군수 공장의 방화 사건도

단서 하나 잡힌 일 없이 무사하게 넘어가자,

김두한과 여타의 돌격대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이들은 사전에 계획만 철저히 세우고 서로 신의로 뭉쳐 비밀만 유지한다면,

어떠한 사건을 저질러도 무사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토인의 신앙과도 같은 자신을 얻게 되었다.

이들은 마침내 제3의 음모를 획책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장교동 방화 사건이 있은 지 반년쯤 지난 1943년 여름의 일이었다.

이 무렵, 일본군은 각 전선에서의 전진에 종지부를 찍고 패전의 기미가 차츰 엿보이기 시작했다. 일본군이 가장 타격을 입은 것은 연이은 해전(海戰)의 패배 때문이었다.

이미 1942년 10월 남태평양 해전에서의 패배와 3차에 이르는 솔로몬 해전에서의 패전,

뎀빌 해협에서의 8척의 수송 선단의 전멸,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또 이소로꾸(山本五十六) 제독의 전사 등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남태평양 일대의 일본군의 강점 지역은 광대했다.

이 점령 지역은 온갖 자원의 보고(寶庫)였다.

석유를 위시한 고무·동·납 등…….

이러한 물자들은 전쟁을 수행해 나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군수 물자였다.

일본군은 점령군의 횡포로, 당연한 권리처럼 이러한 군수 물자의 원자재를 약탈하여

본국으로 실어 날랐다.

물론 이를 가공하여 각종 무기 등을 생산하기 위해서였다.

그 일부 물자가 조선 땅에도 실려온 것이다.

남방 점령지에서 수송선으로 실어온 원자재를 인천항에 부렸다.

이 물자를 인천 항에서 덩어리째 트럭에 싣고 저장소로 옮겼다.

그 저장소가 다름 아닌 부평 앞산의 나환자촌이 있는 계곡이었다.

일본군이 여기를 저장소로 선택한 것은 부평이 서울과 인천의 중간 지점으로

교통이 편리하여 수송하는 데 유리했고, 주변에 나환자촌이 있어

인적은 물론 인가가 없어서 일반인의 눈에 쉽게 띄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장소라 했지만 건물로 된 창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고,

방공호를 닮은 노천의 지하호였다.

당시 방공호는 서울의 주심가 노변은 물론 도처에 만들어져 있었다.

방공호 가운데는 지하 깊숙이 굴을 파서 만든 것도 더러는 있었으나,

대개는 땅을 깊숙이 파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공습 경보가 있으면 행인들은

그 방공호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직격탄을 맞는 데는 아무런 효험이 없고

그저 폭풍을 피하는 데 다소의 도움이 있을 정도였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의, 요즘 생각하면 우습기 짝이 없는,

이야말로 집단 묘혈을 미리 파놓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거나,

부평의 물자 저장소는 계곡 깊숙이에 있는 노천의 방공호나 다름없었다.

방공호는 커다란 천막만한 크기로 땅 속을 3~4미터 깊이로 파놓은 것이었다.

같은 모양의 이러한 방공호를 그 일대에 촘촘할 정도로 만들어놓고

이 안에 각종 물자를 쌓아둔 것이다.

물론 물자를 채운 다음에는 망을 씌워놓고,

그 위에 소나무 가지며 풀을 베어다 올려놓고 위장을 했다.

주위에는 철조망을 쳤고, 망루대를 세워 엄중한 감시를 했다.

언뜻 보면, 그저 군대의 막사처럼만 보였다.

나환자촌 깊은 골짜기 안에 비밀스러운 군수 물자 저장소가 바로

김두한패의 제3의 표적이 된 것이다. 
 
부평의 군수 물자 저장소의 비밀을 알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종로꼬마 이상욱이었다.

그 자신이 인천항에서 저장소 현장까지 물자를 수송한 것이다.

수송 선단이 인천항에 입항한 후,

그는 며칠에 걸쳐 동원되어 이를 실어 나른 것이다.

이 무렵, 종로꼬마는 이미 자동차 운전 면허를 취득하고 정운전사로

트럭 한 대를 배당받고 있었다.

이제는 어엿하게 조수를 거느리는 몸이 되었다.

조수는 서울 청진동 해장국집 골목 안에서 얼씬거렸던, 똘마니급 축에도 못 끼는

애송이 건달이었다.

한영구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뱁새란 별명으로 더 통했다.

눈이 뱁새처럼 작대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원, 단춧구멍 같은 눈깔을 가지고…….”

종로꼬마는 툭하면 뱁새를 놀렸다.

그러면 뱁새는 영락없이 똑같은 말로 대꾸하는 것이었다.

“싯, 뭐 오야붕 눈은 큽니까, 커요?”

오야붕이란 물론 김두한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뱁새는 그것으로 주먹패의 동료임을 스스로 강조하는 것이었다.

전에 청진동 골목에서 얼씬거릴 때는 인사를 해도 콧등으로 받아 넘겼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굴러 들어왔는지,

뱁새와 조병창에서 마주친 것이다.

뱁새는 무거운 쇳덩이 마루보를 실어 나르는 중노동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이를테면 종로꼬마가 조수로 발탁해 준 것이었다.

뱁새를 같은 주먹패의 동료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얼굴을 아는 서울내기를 조수로 쓰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뱁새는 이를 무척 고마워했을 뿐 아니라 더러는 건달 기질도 있었던지,

운전사와 조수의 관계 이상으로 건달패다운 위계질서를 지켜 그를 형님으로 모시는 것이었다.

이 무렵, 부평 조병창은 제1공장, 제2공장에 분공장 등 공장의 확장 공사가 완료되고,

근무자의 기숙사라 할 합숙소도 준공을 보아 대군수 공장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다소 얘기는 빗나가지만,

부평 조병창의 제2공장장은 일본 정규 사관 학교를 나왔으며,

광복 후 국군의 참모총장까지 지낸 오오시마(大島) 소좌였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 종래 서울에서 출퇴근을 했던 종로꼬마는

합숙소인 일심료(一心寮)에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다다미방에서 10명도 넘게 합숙을 했다.

종로꼬마는 물론 뱁새와 같은 방을 썼다.

주먹패의 동료임을 자처하는 뱁새는 스스로 종로꼬마의 수족처럼 굴었다.

마실 물 정도를 떠다 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의 빨래까지 대신해 주었다.

종로꼬마는 비록 강제 동원에 징발되어 온 것이라고는 하지만,

비교적 편안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답답하고 갑갑한 것은 서울에서 출퇴근을 할 수 없어 김두한을 비롯한

주먹패들과 어울릴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의 외출·외박은 토요일과 일요일밖에는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