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0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0  

 

 

오죽 석유가 귀했으면 ‘가솔린 한 방울은 피 한 방울’이란 표어며 포스터까지 나붙었겠는가.

그래도 석유를 얻어 쓸 수 있는 곳은 소방서 같은, 자동차가 있는 관공서뿐이었다.

그러나 관공서에서도 그 석유나마 어찌나 통제가 심한지 차를 정식으로 배당받은 운전사나

소량으로 융통할 수 있었지, 그 밖에는 아무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앞서의 비밀 탄약고 폭파 사건 때 사용한 휘발유만 해도, 좀도둑질을 반 업으로 삼아온

다람쥐와 다루마찌가 수표 다리 앞 소방서 창고에 침입하여 휘발유를 통째로 훔쳐내 온 것이었다.

세 통씩이나 훔쳐냈었다.

고작 휘발유통 세 개를 도난당했을 뿐인데도 관계 책임자가 시말서를 쓰는 등 문책을 당하는

소동을 벌였다는 후문이었다.

주먹패들의 의견은 대체로 방화로 기울어 가기는 했으나,

석유를 구할 일이 난감한 일로 대두되었다.

“다람쥐나 다루마찌더러 다시 소방서나 털라지.”

문영철의 의견이었다.

그러나 김두한은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휘발유통을 도난당한 뒤 소방서가 발칵 뒤집혔었다는데,

이제는 경계도 심해졌을 것이다.

자칫 잘못하여 붙들리기라도 하면,

그 입 가벼운 놈들이 뭐라고 불어댈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 용도를 추궁하다가 탄약고 폭파 사건의 단서라도 잡히면 어떡하나 염려가 된 것이다.

김두한이 그 위험성을 말하자 일동은 그 의견에 공감한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럼 이렇게 하지.

내가 숭인동(崇仁洞) 채석장에 가서, 어떻게 해서든지 다이너마이트를 빼내오지.”

동대문 밖 경마장 일대에서 활개를 치는 윤병철의 말이었다.

“거, 좋군! 어떻게 해서든지 다이너마이트만 구해 와.

나 혼자서라도 터뜨리고 말 테니까.”

힘주어 강변하는 것은 여전히 망치였다.

그는 지난번의 화풀이로 공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두한은 또다시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빈대를 잡기 위해 초가삼간을 불태울 수는 없지.

주택가 한복판에서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봐, 어떻게 되나?”

“그럼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망치는 자기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볼멘 목소리가 되었다.

“글쎄 말야. 그러니까 이마를 맞대고 의논하는 것 아냐?

결국 종로꼬마에게 구해 보라 할밖에 없을 것 같군.”

종로꼬마는 그래도 트럭 조수가 아닌가.

아직 정식 운전사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휘발유를 대량으로 쓰는

트럭의 운전석에 앉아 매일처럼 쏘다니고 있지 않은가.

훔쳐내더라도 종로꼬마가 더 수월할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바로 이때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더니 얼굴을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종로꼬마 이상욱이었다.

방금 조병창에서 퇴근을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온다더니.” 

 

“어떻게 안 되겠냐?”

김두한은 타협적으로 물었다.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어떻게든 휘발유를 빼돌리든

훔쳐내든 할 수 없겠느냐고 물은 것이다.

그러나 종로꼬마는 김두한의 얼굴을 치켜 올려다보면서 눈을 슴벅거릴 뿐이었다.

사람 하나를 때려잡고 오란다든가,

돈을 쌔벼(훔쳐)오라는 것보다 휘발유를 구해 오라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휘발유를 빼돌리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는 그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타고 다니는 트럭만 해도,

부평 조병창에서 인천 소년 형무소까지,

거기서 다시 서울 장교동까지 내왕할 수 있는 일정량밖에 공급받지 못한다.

그것도 어찌나 빠듯한지, 운전사가 좀 볼일이라도 있어 샛길로 빠져

차를 이용했다간 엔꼬나 되지 않을까 염려할 정도였다.

설사 좀 남아도는 휘발유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운전사나 다소 빼돌릴 수 있는 일이지,

조수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종로꼬마는 그저 군입을 쩍쩍 다실 뿐이었다.

그러자 김두한은 버럭 역정을 내듯이 소리를 쳤다.

“못 하겠단 말야? 일은 네가 끌어들여 놓구,

그까짓 휘발유 몇 통 못 빼돌리겠단 말야?”

흠칫 놀랄 만큼의 큰소리였다.

깜짝 놀란 종로꼬마는 김두한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김두한의 작은 눈이 색이 바래면서 쏘아보고 있었다.

다시 열지 않을 조개껍데기처럼 입술을 꽉 다물고 있었다.

종로꼬마는 김두한의 그 표정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노했을 때의 표정인 것이다.

이쯤 되면, 못 해도 하겠다고 대답할 밖에 없었다.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나마 해야 하는 것이 주먹계의 계율이 아닌가.

“알겠어! 어떻게든지 해보겠어.”

머릿속에 무슨 계산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장의 위급에서 모면하기 위해서라면 그렇게 대답할밖에 없었다.

그러자 김두한의 표정이 비로소 풀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연히 군수 공장의 위치를 가르쳐주었지?)

속으로 중얼거렸으나 그것도 너무 늦었다.

이제 어떻게든지 해보겠다고 입 밖에 낸 이상,

정말 어떻게든지 해야만 할 일이었다.

종로꼬마는 너무나 큰 짐을 안았다.

이날부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보았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경계가 심한 조병창 안에서 통째로 휘발유를 훔쳐내기란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에게 부탁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었다.

결국은 자기가 타고 다니는 트럭에서 엔꼬가 되지 않을 만큼

소량으로 빼돌려 모을밖에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운전사인 히라야마의 양해가 없이는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녹록히 들어줄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대단한 위험이 수반되는 일이었다.

(그를 구슬러야 하나, 위협을 해야 하나?) 
 
다음날.

서울에서의 용무를 마치고 부평 조병창으로 돌아가는 트럭 안에서였다.

경인가도는 오늘날처럼 고속 도로도 없었고, 길은 포장도 되어 있지 않았다.

서울에서 짐을 잔뜩 실은 트럭은 자갈이 박힌 대로를 뒤뚱거리면서도 잘 달리고 있었다.

평소에도 그다지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닌 종로꼬마는 굳게 입을 다문 채

홍엽이 얼룩져 가는 차창 밖의 야산을 내다보았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운전석을 돌아다보며 말했다.

“히라야마, 너 착한 아이지?”

한마디 한마디 뚝뚝 끊듯이 물었다.
 
운전사 히라야마는 심히 불안해하는 시선으로 종로꼬마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주먹패 특유의 말투였기 때문이었다.

시비를 걸어오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왜 또 그래?”

그는 종로꼬마의 음모를 직감하고는 겁먹은 소리로 물었다.

“나 사실은 말야, 가솔린 몇 통쯤 구해야겠는데 말야, 너 좀 빼돌려 주어야겠어.”

종로꼬마는 망설일 것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히라야마는 잡은 핸들이 비틀거릴 만큼 놀랐다.

“왜? 싫어?”

종로꼬마는 딴전을 부리듯 여전히 차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히라야마 편에서는 딴전을 부리며 선선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 것이 더 고약했다.

이 또한 주먹패 특유의 유들유들한 도전적인 표정이었으니까.

“싫다는 게 아니라,

너도 알다시피 가솔린을 몇 통씩이나 어떻게 빼돌리느냐 말야!”

히라야마는 울상이 되어 호소하듯이 말했다.

그 많은 조수들 가운데 하필이면 주먹패의 거물이 걸려든

자신의 사주팔자를 한탄했을 것이다.

“건, 싫다는 말 아냐?”

종로꼬마는 다시 운전석 쪽을 돌아다보았다.

“싫다는 게 아니라니까. 몇 통씩 어떻게 구해?”

“한꺼번에 못 구하면 조금씩 나누어 구하면 되지.”

“어떻게?”

“어떻게는 무얼 어떻게? 매일 하루에 사이다 병 하나만큼씩만 구하란 말야.”

“하지만.”

“하지만이 다 뭐야? 너, 죽고 싶어?”

종로꼬마는 후닥닥 달려들어, 자동차 핸들을 낚아채듯 맞잡았다.

“잔소리하면 굴려버릴 테야.”

자동차는 구르더라도 자기 자신은 안전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휙 핸들을 틀면서 소리쳤다.

히라야마는 얼떨결에 본능적으로 핸들을 움켜잡고는 급브레이크를 밟았다.

트럭이 끽 소리인지, 꺽 소리인지 모를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급정거를 했다.

“군말 말고, 내일부터 사이다 병 하나야.

주둥이 함부로 놀려 말이 밖에 새나갔다간 알지? 곱게 가는 것뿐야.”

종로꼬마는 아직도 핸들을 틀어쥐고는 윽박질렀다. 
 
운전사는 심호흡을 하듯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길게 내뿜었다.

이 경우, 대답은 오직 한마디뿐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알았어.”

그 한마디뿐이었다.

그것은 죽고 싶지 않았고, 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라야마는 실제로 종로꼬마가 얼마나 무서운 독종인가를 알고 있었다.

섣불리 담뱃불을 붙여달라 했다가 혼쭐이 났기 때문만이 아니다.

주먹패의 거두 김두한과 더불어 종로 바닥을 주름잡아 온 독종이 아닌가.

사람 하나둘쯤 보내는(죽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처럼 간단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다소 난처하고 귀찮은 일이기는 하였지만,

그까짓 사이다 병 하나씩의 휘발유를 빼돌리는 것을 마다했다가,

그것으로 죽음과 바꾸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히라야마, 넌 참 착한 아이야.”

종로꼬마는 히죽 웃었다.

그러나 이제 빈정거리는 말투도, 싸우겠다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는 비로소 맞잡았던 핸들을 놓았다.

히라야마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뿜고는 천천히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바로 그 다음날부터 히라야마는 어김없이 사이다 병 하나씩의 석유를 빼돌렸다.

처음부터 트럭에 주유를 할 때, 미리 사이다 병에 얻어넣기도 했다.

“집에서 좀 쓸 일이 있어서 말야.”

휘발유를 구해 주는 편에서도 정운전사에게 그만한 융통은 보아주었다.

그래도 부평 조병창의 영문을 나올 때도 그러했지만,

특히 소년 형무소를 나올 때면 차체의 검색이 매우 심해서,

그 작은 사이다 병이나마 버젓이 들고 나올 수가 없었다.

대개 차체 앞의 보닛을 열고 그 안에 숨겨서 나왔다.

휘발유를 주유할 때 따로 얻어낼 수 없는 날이면 트럭에 주입한 것을 빼내기도 했다.

고무 호스를 대고 입으로 빨아내는 것이다.

휘발유 냄새가 역하기도 했지만, 잘못 빨았다간 입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히라야마는 군소리 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언제나 고무 호스를 빠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빼돌린 휘발유는 꼬박꼬박 김두한에게 전달되었음은 물론이다.

김두한은 이를 사이다 병보다 큰 맥주병에 옮겨 담아 비밀리에 보관을 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든가.

두 달 가까이 모은 휘발유는 맥주병 30개 분은 넉넉히 되었다.

이처럼 많은 분량의 휘발유를 필요로 했던 것은 공장 지대가 제법 넓은 데다가

집은 쉽게 타는 목조 건물이라 하더라도 시설물이 기계류이니,

불길이 어지간히 세지 않으면 집만 타고 기계류는 타지 않을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쯤이면 휘발유는 충분하다.

이제 거사의 날만 남았다.

그 거사의 날은 해를 바꾼 정월의 모질도록 추운 겨울날이었다.

따로 명령할 것도 없이, 김두한의 눈짓 하나로 종로꼬마·윤병철·시구문돼지에,

김동회·문영철·망치 등이 우선 조양 여관으로 모여들었다.

조양 여관으로 모여든 돌격대원들은 김두한의 지시대로 맥주병 두 개씩을 들고

슬금슬금 빠져나갔다.

휘발유를 담은 맥주병임은 말할 나위 없었다.

워낙 추운 겨울밤이어서 두툼하게 차려입은 그들의 커다란 몸집 속에 맥주병

두세 개를 눈에 띄지 않게 숨기기는 그리 힘들 것도 없었다.

이들은 휘발유가 든 맥주병을 우선 장교 교각 아래로 옮겼다.

광교나 수표 다리 밑은, 다리의 교폭도 넓고 콘크리트로 되어 있어서,

다리 밑에 양아치들이며 뱀탕 장수들이 몇 겹으로 두꺼운 거적을 늘어뜨리고 살고 있었으나,

장교는 교폭이 좁은 목조 다리여서, 양아치들마저 꾀어들지 않아 비어 있었다.

현재는 다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고 거리의 모습도 완연히 달라졌지만,

대체로 3·1빌딩에서 중앙극장 쪽으로 향해 가는 청계천 위에 걸려 있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이나 그 당시나 장교는 서울의 중심가여서 밤낮으로 붐비는 곳이었으나,

자정만 지나면 사정이 달랐다.

도심에 시커먼 개천이 흐르고 있어 워낙 으슥한 곳이기도 했지만,

주먹패는 물론 양아치패들이며 폭력적인 불량배, 술주정꾼들이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곳이어서, 밤이 늦으면 일반 시민들은 무서워 얼씬도 하지 않았다.

요즘처럼 가로등이 늘어서 있는 것도 아니고, 개천 건너 전신주에 희미한 외등 불빛 하나가

깜박이고 있을 뿐이어서, 그 불빛으로 하여 오히려 그 주변을 더욱 어둡게 휘덮어 음침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 당시 서울의 겨울은 무던히도 추웠다.

북악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은 유난히도 맵고 모질어서,

그 추위가 무서워서도 사람들은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었다.

인적이 없는 밤거리에서,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다리 밑에 맥주병(휘발유병)을 옮겨놓기는 그다지 힘들 것이 없었다.

새벽 2시.

마침내 행동을 개시할 시간이 당도했다.

새벽 2시가 지나면, 아무리 밤늦게 자는 자도 이제 잠들 시각이었다.

아무리 새벽 일찍 일어나는 부지런한 자도 아직은 깨어나지 않을 시각이었다.

바로 만물이 고요히 잠든 시간인 것이다.

미리 약속된 새벽 2시가 되자,

망치를 제외한 돌격대원들은 어김없이 어슬렁거리며 장교 밑으로 나타났다.

너무 추워서 어깨를 움츠리고 어기적거리는 걸음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술주정을 가장해서 비틀거리며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

유령의 모습만 같았다.

망치가 제외된 것은 물론 예의 야맹증 때문이었다.

먼저 와서 다리 밑에서 기다리고 있던 김두한은

이들에게 잠자코 맥주병 두 개씩을 건네주었다.

따로 이를 말도 없었다.

사전에 면밀하게 작전을 짜두었기 때문이다.

맥주병을 바지춤에 찔러넣기도 하고 커다란 외투 주머니에 쑤셔넣기도

한 대원들은 역시 말없이 맥주병을 받아들고 제각기 미리 정해진 지점을 향해

밤거미 떼처럼 흩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