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5
뭐야, 뭐?”
“이놈이 순사님을 메다꽂고.”
“이 주정뱅이가…….”
순사들은 저마다 일본말로 한마디씩 내뱉고는 일제히 달려들었다.
망치는 몰려드는 순사 떼들을 흘끗 바라보았다.
마음대로라면, 달려드는 놈 하나씩 차례로 치고 차고 내던지고도 싶었다.
실제로 그만한 힘이 망치에겐 얼마든지 있었고,
달려드는 놈들에겐 얼마든지 틈이 있었다.
반대로, 이제라도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도망을 칠 수도 있었다.
아직 해는 남아 있었고, 어두워지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더 이상 행패를 부릴 필요가 없었고, 더구나 도망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얌전히 순사들에게 붙들렸다.
주먹과 발길질이 수없이 날아들었다.
이제까지 나둥그러져서 망치의 짓밟는 발길질에 깔려 있었던 순사가 그제야
일어나서 씩씩거리며 주먹질, 발길질을 했다.
망치는 그 무수한 뭇매를 고스란히 받았다.
마음속에서는 부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한꺼번에 쓸어버리고 싶은 성깔이 치밀어 올랐으나 꾹 참았다.
(이것이 돌격대원인 나의 임무니까…….)
그는 입술을 꽉 짓깨물었다.
이것이 혼마찌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부였다.
“형님, 죄송하게 됐습니다. 하야시 형님에게도 잘 말씀해 주십쇼.”
김두한은 밸이 뒤틀리기는 했으나, 다시 한 번 다무라에게 사과를 했다.
그러는데 발소리도 없이 후스마(일본식 방문)가 열리면서
하야시가 오까무라와 함께 모습을 나타냈다.
언제나처럼 하오리 하까마의 일본옷 차림이었으며,
머리는 가운에서 가르마를 타고 기름을 발라 곱게 넘긴 단정한 몸차림이었다.
다무라와 김동회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으므로 김두한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앉으시오. 당신이 날 친히 찾아주다니.”
하야시는 스스로 미소를 지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
인색하게 한쪽 입술에만 엷은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형님, 제가 시킨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형님께 사과를 드리러 왔습니다.”
하야시는 물론 일본말로 말했지만, 김두한은 조선말로 말했다.
하긴 일본말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지만.
물론 하야시는 통역 없이도 김두한의 말을 알아들었다.
그러나 전혀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김동회의 통역을 기다렸다.
하야시가 통역을 기다렸다기보다,
김동회가 눈치 빠르게 통역을 하고 나선 것이다.
혼마찌깡 두목으로서의 하야시의 처지를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방금 보고를 들었는데,
우리의 신사 협정을 어기고 난데없이 술에 취해 정복 경찰을 때려눕히다니,
질이 나쁘단 말야. 나로서는 변명해 줄 여지가 없군.”
“변명이나 그의 구명 운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김두한은 솔직히 협정을 어긴 것에 대한 사과를 하러 온 것뿐입니다.”
김동회가 덧붙여 말했다.
“솔직히 내게 섭섭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뜻이 정 그런 거라면,
우선은 서운한 마음을 풀기로 하겠소.
그 대신, 앞으로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 주기 바라오.
나는 당신네들과 아무런 충돌 없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하야시의 말은 즉각 김동회에 의해서 김두한에게 전달되었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김두한은 속마음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저자세인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져서 말을 삼가고 있었다.
그러자 하야시가 말을 다시 덧붙였다.
“당신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나머지,
우메하라 군이 당신네에게 넘어간 것도 묵인하기로 한 거요.”
하야시의 싸늘한 눈이 김두한에게보다 김동회 쪽을 향해 번뜩인 것도 같았다.
김동회는 어쩐지 가슴이 뜨끔해져서 통역의 말도 잊었다.
자연 김두한은 하야시의 말을 해득하지 못해 멍하니
하야시와 김동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자 하야시가 말했다.
“김두한, 당신은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귀빈인데,
오늘 밤은 마침 총독부 사람들과 선약이 있어서 곧 가봐야 하오.
오늘의 결례를 다음에 보충하기로 하고 다무라 상,
오늘 밤은 당신이 나 대신 두 사람을 후히 대접해 주시오.”
그러고는 다무라의 통역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야시는 조용히 방석 위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핫(넷). 분부하시는 대로…….”
다무라는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조아렸다.
두 사나이가 무슨 말을 교환했는지,
김두한은 눈치로 알아차린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나,
두 사람의 태도나 말투에서 기묘한 감동과 같은 것을 느꼈다.
하야시와 다무라는 혼마찌깡의 두목과 부두목이 아닌가.
협객 세계가 반드시 나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이로 하면 다무라가 하나둘 위일지도 모른다.
체격도 부두목인 다무라 편이 더 컸고, 주먹의 힘도 더 세어 보였다.
하지만 두목이 무슨 명령, 무슨 분부를 내렸는지는 모르지만,
다무라에게는 부하로서의 절대 복종의 엄숙한 자세가 있지 아니한가.
이에 비하면 종로패는 어떠한가.
감히 두목 김두한에게 실력으로 맞서려는 자들은 없었다.
명령에 불복하는 자들도 없었다.
그러나 종로꼬마나 문영철, 김무옥, 망치까지가,
모두 두목과 부하 사이라기보다 친구처럼 주고받고 있지 아니한가.
절대적으로 이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협객의 조직을 보다 강력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일본패일망정 혼마찌깡에서 배워야 한다.
묘한 교훈을 얻은 듯한 감명을 그는 받았다.
하야시가 일어나며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악수를 청하는 손을 김두한에게 내밀었다.
김두한도 힘에 비해 손이 작은 편이었으나,
하야시의 손은 김두한의 손에 비하면 계집애처럼 작고 부드러웠다.
결국 두목의 길이란 손에 있지 않고 머리에 있는 것이다.
작은 손, 작은 몸집으로 일본패를 이끌고 있는 것은 하야시의 머리 하나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혼마찌깡을 처음 방문한 것은 아니었으나,
김두한은 짧은 혼마찌깡의 방문과 하야시와의 대면에서 많은 교훈을 얻은 듯한
뿌듯한 감회로 물러 나왔다.
다무라가 하야시의 분부대로 김두한을 정중히 모시려 했으나,
김두한은 이를 완강하게 거절했다.
하야시로부터 받은 뿌듯한 감회에 젖어 있을 수만도 없었고,
다무라가 베풀려는 향연을 받아들일 수만도 없었다.
더욱이 다무라가 베풀려는 향연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그는 지금 한가하지 않았다.
한가하기는커녕, 몹시 초조해 있었다.
오늘 밤 결행하려 하는 비밀 탄약고 폭파 작전의 시간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혼마찌깡에 폐를 끼친 마당에, 우리 쪽에서 사과술을 내야 할 텐데,
무슨 염치로 술 대접을 받습니까?
다음에 하야시 형님이 시간이 나실 때 함께 술잔을 나누도록 하지요.”
김두한은 점잖게 사양을 했다.
다무라도 우락부락한 김두한을 상대로 술을 나누고 싶지는 않았으므로
그의 사양을 핑계로 더 이상은 잡지를 않았다.
그 대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수표교가 되었든 장교가 되었든,
청계천 경계선까지의 경호를 명령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상대편 두목에 대한 예우이기도 했겠지만,
감시의 뜻이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그야 어찌 되었거나 3명의 혼마찌깡패의 호위를 받으면서 김두한과 김동회는
수표교 쪽으로 향해 왔다.
3명의 혼마찌패는 이미 김동회와 구면이었으므로 호위도 경계도 아닌,
다정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걸었다.
김두한과 김동회는 수표 다리 앞에서 일본패와 헤어졌다.
그랬으면 김두한은 당연히 수표 다리를 넘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리를 넘지 않았다.
3명의 혼마찌패들이 모습을 감추자,
그는 다리를 넘지 않고 그대로 청계천 변을 따라 장교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수표 다리를 넘든 장교를 넘든 관철동 골목으로의 거리는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김동회는 그다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김두한은 장교 앞에 이르러서도 다리를 넘지 않고,
그대로 광교 쪽을 향해 개천길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는 종로패의 자기 부하들의 눈에 띄는 것조차도 꺼리고 있는 것이었다.
부하들의 눈에 띈다고 해서 크게 낭패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남의 속도 모르고 줄레줄레 따라나서면 번거롭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는 거지?”
광교까지도 그대로 스쳐 지나가자 김동회는 궁금해서 못 견디겠다는 듯 물었다.
“잠자코 따라와.”
“아직도 알려고 하지 말라는 거야?”
“알고 나면 네 마음이 달라질지도 모르니까.”
“그토록 내가 못 미더우냐?”
“죽음을 앞에 놓고 두려워하지 않는 자란 없는 것이니까 말이지.”
어둠 속을 걸으면서 두 사나이는 속삭이듯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래, 맞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나보다도 네가 더 심한 것 같구나.”
김동회는 좀 심술스럽게 말했다.
아직까지도 속을 풀어주지 않고 있는 김두한에게 좀 부아가 난 것이다.
“헛헛헛!”
김두한은 멋쩍어져서 꼬리가 잘린 웃음을 너털거렸다.
실상, 죽음을 두려워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김동회의 말처럼 자기 자신이 더 죽음을 무서워하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저 죽음의 모습이 눈앞에 보이지 않고,
그의 줄기찬 젊음이 죽음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인지 몰랐다.
그러면서도 막연한 감정 밑바닥에선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동지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나 아닐까.
비밀 탄약고를 폭파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7명의 돌격대원을 필요로 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섯도 좋고, 여섯도 좋다.
어쩌면 세 사람도 충분했을지 모른다.
안중근 의사처럼 혼자서도 능히 거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일곱의 동지를 끌어들인 것 자체가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닐까.
인간의 공포 심리란 기묘한 것이어서 산술(算術)처럼 계산되지는 않는다.
산술대로 하면, 한 사람의 겁쟁이와 또 하나의 겁쟁이가 모이면 더욱 겁을 집어먹어야 마땅하지만, 오히려 반대로 용기를 넘어선 만용까지 생긴다.
그 효과를 기대하면서 7명씩이나 되는 돌격대원을 규합한 것이나 아닐까.
망치가 빠진 대신 김동회를 끌어들이려 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 것일까.
김동회를 끌어들이면서 스스로 안심할 수 있는 구실을 찾고 김동회를 영원히 자기 휘하에
묶어두려는 속셈이 있었던 것이나 아닐까.
사건이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발각이 되면,
누구나 여지없는 사형감이다.
이 공동 운명 앞에 김동회를 끌어들이면서
그를 완전히 자기 앞에 묶어두자는 계산이 아니었을까.
꼬리가 잘린 김두한의 너털웃음 속에는 스스로 깨닫고 뉘우치는 마음이 있었다.
그는 김동회에게 우정의 이름으로 미안해졌다.
“동회, 나 너에게 정말 미안해.”
김두한은 진솔한 마음이 되어 사과했다.
그러자 김동회는 말을 잃었다.
뭔가 김두한의 진정이 말을 듣기도 전에 전달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젊음들은 단순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침묵이 오히려 그 까닭을 강력하게 묻고 있는 것만 같았다.
“우리, 사실은 오늘 밤 일본군의 비밀 지하 탄약고를 폭파하기로 했어.”
김두한은 물론 주위를 신중히 살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의당 소스라치듯 놀라야 할 김동회는 뜻밖에도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나, 벌써 그런 건 줄 알았어.”
“어떻게 알았어? 누가 혓바닥 뽑힐 말을 함부로 한 모양이지?”
김두한은 어두운 골목길에서 김동회를 쏘아보았다.
“듣긴 누구한테 들어? 네가 말해 주지 않는데 누구한테 듣느냐 말야?
내가 혼마찌깡에서 넘어왔다 해서 아직도 하얀 눈으로 보고 있는데 누가 말해 주느냐 말야?”
“그런데 어떻게 알았어?”
“알긴 뭘 알아?
너처럼 배짱 하나로 살아가는 남자가 말끝마다 죽음, 죽음 하고 있으니
그쯤 되는 중대한 일이려니 생각한 것뿐이지.”
“눈치 한번 빨라서 좋구나. 그래, 너도 거리낌 없이 참가해 줄 거지?”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런 물놀이에 날 빼돌리려 했어?”
기민한 김동회는 순간적으로 탄약고 폭파를 물놀이라 일컬으며
자연스럽게 암호 하나를 창출해 냈다.
그야말로 등산놀이나 물놀이쯤의 즐거운 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으흐흐, 물놀이. 그래, 맞아. 모처럼의 물놀이에 널 빼놓을 수 있겠냐?
하마터면 널 빼놓을 뻔해서 이렇게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것 아냐?”
“너의 오늘의 일진은 여기저기에 사과하는 일로 되어 있는 모양이구나?”
물론 혼마찌깡으로 찾아가서 사과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헛헛헛.”
김두한은 소리내어 웃었다.
생각해 보니 김동회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웃을 수 있는 김두한의 배짱에 김동회는 정말 감탄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있는 사람 같지도 않았으니까.
“그래, 물놀이는 어디로 가는 건데?”
“수색을 지나 일산 못 미쳐…….”
이젠 감출 것도 숨길 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몇 시쯤에?”
“새벽 2시.”
“헛헛, 새벽 2시의 물놀이라니, 그것도 재미있는 일이군. 헛헛.”
“헛헛헛.”
두 사나이는 소리를 모아 웃었다.
밤길을 걸으면서 소곤거리는 두 사나이의 말을 누가 엿들을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그러나 설령 엿들은 사람이 있었다 하더라도 정말 즐거운 물놀이를 앞두고
기분 좋게 떠들어대고 있는 것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만큼 이들은 태연자약했으니까.
하지만 김동회의 마음속은 겉으로 나타낸 것만큼 태연자약한 것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겁도 나고 무섭기도 했다.
입술이 타들어갈 만큼 긴장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쩌란 말인가?)
그는 자기 자신에게 자문했다.
속된 표현으로 이제는 끼지도 빼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몰린 것이다.
기왕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김두한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죽거나 살거나 김두한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이 아닌가.
(이 기회에 한몫 단단히 해서 김두한패의 신임을 사자.
혼마찌깡에서 넘어왔다 해서 변절자 취급을 하는 패거리들로부터도 신뢰를 얻자.)
그는 스스로를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어느덧 두 사나이는 광화문 네거리를 지나 서대문 쪽으로 가고 있었다.
“이제부터 거기까지 걸어가는 거냐?”
김동회가 물었다.
“버젓하게 일등차를 타고 갈 수는 없잖아?
아현동 굴다리 근처에서 아무 곳간차나 얻어 타기로 하지.”
이들은 아현동 기차 터널 쪽을 향해 서두를 것 없는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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