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6
그들은 미동 소학교 담장을 돌아 철로 연변으로 나섰다.
짙은 어둠만이 깔려 있을 뿐, 철로변에 행인들이 있을 까닭이 없었다.
전방의 아현 터널 쪽에서 어둠을 헤집고 괴물 같은 기관차가 휘황한 불빛을 밝히며
머리를 내밀고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경성역을 떠났거나, 경성역으로 다다라가는 열차는 대개 이 지점에서는 서행을 했다.
하지만 멀리서 바라보면 천천히 달리는 것같이 보이지만,
옆을 스치고 지나갈 때면 곤두박질치듯 달려가는 것이었다.
대륙 쪽에서 오는 급행 열차인 모양이었다.
지축을 울리며 요란하게 달리는 기차를 비켜 두 사나이는 몸을 뒤로 물렸다.
“어떻게 할 작정이야?”
기차가 스치고 지나가자 김동회가 물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수색까지 마냥 걸어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버젓하게 역에서 표를 사고 객차를 타고 갈 수도 없고…….”
김두한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듯이 말했다.
결국 달리는 기차에 뛰어올라,
남의 이목에 띄지 않고 무임 승차로 수색까지 가겠다는 속셈인 모양이었다.
김동회는 다소 자신이 없었다.
막 떠나는 전차에 매달리듯 뛰어올라 타본 일도 있고,
전차 정류장에 닿기도 전에 뛰어내리는 것을 하나의 멋으로 알고 뛰어내려 본
경험은 있다지만, 이처럼 속력이 빠른 기차에 뛰어올라 타본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다.
기차에 뛰어오르는 일이 비밀 탄약고의 보초를 거꾸러뜨리는 일보다 어려운 일로 생각되었다.
철로변에 웅숭그리고 앉아 하행선(下行線)의 다음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김동회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이윽고 경성역을 출발한 열차가 눈부신 불빛과 요란한 기적 소리를 울리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휘황한 불빛으로 시야가 차단된 기차는 급행 열차인지 완행 열차인지,
아니면 객차인지 화물 열차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맨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김두한은 엉덩이를 털면서 먼저 일어섰다.
“타자!”
그는 마치 미리 예약된 기차를 타려는 사람처럼 심상하게 말했다.
굼벵이 걸음처럼 더듬거리며 오는 것 같았던 열차는 이들의 앞으로 다가오면서는
저돌적으로 돌입해 오는 것 같았고, 기관차가 그들의 앞을 지나가고 기다란 꼬리가 이어져
달릴 때는 마치 열차가 이들을 떠다밀고 곤두박질치며 달려가는 것 같았다.
기차는 객차가 아닌 화물 열차였다.
더러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간차도 있었지만,
지붕이 없는 납작한 화물차가 연연히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달려가는 열차의 차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기차 옆으로 다가간 김두한은
한쪽 손으로 손잡이도 아닌 모서리만을 붙들고 훌쩍 뛰어올라 매달렸다.
비호같다는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김동회는 아직 차 위로 뛰어오르지 못했다.
하기야 김두한에게는 발차한 지 얼마 되지 않는 기차에 뛰어오르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였다.
파고다 공원 담장쯤은 한쪽 손만 짚고 훌쩍 뛰어넘는 그였다.
그 정도가 아니었다.
종로 거리를 달리는 택시의 지붕을 짚고 체조 선수처럼 가뿐하게 뛰어넘어 행인들을
경악케 하는 솜씨를 보인 그였다.
그러나 김동회는 좀 사정이 달랐다.
물론 그도 유도 3단의 실력을 갖고 있고 날쌔고 민첩하기는 했다.
하지만 달리는 기차에 사뿐하게 뛰어오를 만큼 순발력이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의 커다란 키도 주체 못 했던 것이다.
그는 달리는 차에 미처 매달리지 못하고, 마구 손을 휘두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이 기차를 놓치면, 그의 인생이 끝장이 나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으로 쫓아오고 있었다.
김두한은 한 손만으로 난간에 매달려서, 다른 한 손으로는 달려오는 김동회의 손을 잡았다.
손과 손이 맞잡히자,
김두한은 힘껏 끌어올렸다.
기중기와도 같은 힘이었다고나 할까,
움직이는 차체 위에서, 밑에서 매달리는 육중한 체구의 거한을 한 손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실제로 기중기와도 같은 힘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기야 김동회도 마냥 둔중한 사나이만은 아니었다.
김두한이 손을 잡자 기차가 달리는 방향으로 보조를 맞춰 달리면서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훌쩍 뛰어오른 것이다.
두 거구가 아슬아슬하게 차체에 매달리고 얼마를 가서야 간신히 지붕이 없는
화물차로 올라갈 수 있었다.
김동회가 김두한의 도움으로 먼저 올랐고,
뒤이어 그다지 힘도 들이지 않고 김두한이 기어올랐다.
막 아현 터널 속으로 들어서기 직전이었다.
두 사나이는 어둠 속에서 코를 막고 똑같이 쿨룩거렸다.
빠져나갈 수 없는 굴 속의 연기가 너무 매웠기 때문이다.
굴 속을 빠져나오자,
비로소 숨을 커다랗게 내뿜었다.
화물 열차는 신촌역에선 정차도 하지 않고 그대로 스쳐갔다.
수색역에 이르렀다.
그곳에서는 기차가 멎었다.
그러나 이들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역에서 내렸다간 남의 눈에 띄기도 쉽지만,
목적지까지는 아직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 너 서투르게 뛰어내렸다간 차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간다. 조심해!”
김두한은 열차에서 뛰어내리는 요령을 간단히 가르쳐주었다.
기차에 매달려 착지하는 순간,
상체를 뒤로 젖히고 낮은 자세로 뒷걸음질치는 듯한 느낌으로 뛰어야 한다는 등의 주의였다.
목표 지점에 도달하자,
김두한이 먼저 차에서 뛰어내렸다.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뛰어내린 김두한의 모습이 김동회의 시야에서는 멀어져 갔다.
김동회도 좁은 난간에 매달려서 내릴 채비를 차렸다.
검은 땅이 균열을 일으키며 갈라져 나가는 것을 느꼈으나 침착하게 몸을 사렸다.
(뛰어오르기도 하였는데, 뛰어내리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은가.)
그는 김두한이 일러준 요령을 머리에 떠올리며 몸을 날렸다.
일순, 김동회의 거구는 허공에서 강풍을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뒤쪽으로 밀리면서 균형을 잃고, 땅에 내동댕이쳐지듯 뒹굴어졌다.
만약, 그가 유도를 익히지 않았고 유도의 낙법을 몰랐더라면,
몸에 큰 부상을 입었거나 정말 차바퀴 밑으로 빨려 들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몸이 땅에 떨어지는 순간,
유도의 낙법으로 떨어져서는 몸을 두어 바퀴 굴려서 쓰러져 있었다.
꼬리가 긴 화물 열차가 바람을 일으키면서 질주해 갔다.
기차가 다 지나간 다음, 김두한이 다가와 부축해 일으켜주었다.
“어디 다치지 않았냐?”
“아니.”
“너, 보기보단 굉장히 둔하구나.”
“내가 둔하냐? 네가 날쌔지.”
두 사나이는 밤하늘에다 높지 않은 홍소를 날렸다.
그들은 철로에서 내려, 마을이 있는 뒷산 쪽으로 향해 갔다.
약속된 제1집합소로 향해 가는 것이다.
제1집합소는 비밀 지하 탄약고가 있는 지점에서 약 1킬로미터쯤 떨어져 있는 야산이다.
이 야산의 능선을 타고 가면 곧바로 지하 탄약고가 있는 지점까지 당도할 수 있지만
그 주위에는 겹겹이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다.
아무리 깊은 야반의 일이라 하지만 일곱의 장정들이 떼지어 몰려 다녔다간 남의 이목에
띄기가 쉬워, 둘 또는 셋씩 짝을 지어 우선 자정까지 제1집합소에서 모이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제1집합소에 당도해 보니 종로꼬마 이상욱을 위시하여 문영철·정진영·시구문돼지·
윤병철이 어김없이 먼저 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왜 굼벵이처럼 이제 오냐?”
종로꼬마가 어둠 속에서 볼멘소리를 했다.
“우리의 오늘 밤 알리바이를 성립시켜 놓기 위해 그럴듯한 연극을 꾸미느라 늦었지.
거기에 한바탕 거들어준 게 김동회야. 김동회도 돌격대에 가담하기로 했고,
우리는 생사를 함께하기로 했어.”
어둠 속이라 형체만이 부각되어 보이는 김동회를 김두한은 새삼 대원들에게 소개했다.
“야, 나를 제쳐놓고 너희들끼리만 신나는 일을 독차지할 수 있냐?”
김동회의 인사말이었다.
애초 김동회를 돌격대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꺼려한 것은 망치였다.
그러나 망치가 없는 자리이니, 누구도 이를 마다할 자는 없었다.
오히려 겁쟁이가 겁쟁이와 어울리게 되면 갑자기 용기가 생긴다는 바로 그 산술로,
그가 돌격대원으로 가담하게 된 것을 반기는 것이었다.
“자아식, 넌 왜 만날 지각생이냐? 오늘 밤에 너, 한번 앞장서서 본때를 보여줘 봐.”
종로꼬마가 커다란 키의 김동회를 우러러 쳐다보듯 하고 말했다.
그는 평소에도 김동회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혼마찌깡에서 전향되어 왔다 해서,
쉽게 친구들과 휩싸이지 못해 온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한 말이었다.
“알았어. 한 번 죽지 두 번 죽겠냐?”
김동회가 종로꼬마의 뜻을 고맙게 받아들여 그렇게 대답하고 있을 때,
김두한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래, 맞아.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지, 두 번 죽는 게 아냐.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든 죽게 마련이지.
잘사는 사람도 한 번 죽고 못사는 사람도 한 번은 죽어.
배운 사람도 죽고, 못 배운 사람도 죽어.
조선 사람도 죽지만 결국은 쪽발이놈들도 한 번은 죽는단 말야.
세상 사람들은 팔자 좋은 사람도 있고, 억울하게 한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
하지만 누구나 한 번은 똑같이 죽는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야.
그러고 보면 세상은 아주 불공평한 것 같으면서도 공평한 것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생각하면 사람은 어떻게 살았느냐보다도 어떻게 죽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몰라.”
김두한은 어둠 속에서 찬찬히 대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달빛조차 없는 어두운 밤이어서 대원들의 표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침 소리는 고사하고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이,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말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었다.
한번 입을 열었다 하면, 김두한은 그가 정말 보통학교 1학년의 학력밖에 없는 자일까 싶게
유식해지고 달변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대원들이 엄숙하게 자기 얘기를 귀담아듣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자
목소리는 낮았으나 배 밑에 힘을 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나나 너희들이나 똑같이 무식하다.
똑같이 배우지를 못했으니까.
우리도 배울 수만 있었더라면, 지금처럼 주먹패는 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배우면 뭘 하냐. 아무리 배웠다 해도 일본놈들에게 알랑방귀를 뀌지 않으면,
면 서기 하나 얻어걸리기 힘든 세상이 아니냐.
앓느니 죽지, 쪽발이놈에게 알랑방귀를 뀌어?
차라리 못 배웠으면 못 배운 우리들이 더 속 편한지도 모르지.
그 대신 우리에게는 젊음이 있고, 배운 사람들이 못 갖고 있는 힘이 있으니까.
그 힘이란 무엇이냐? 오늘 죽고, 당장 때어 들어가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
그것이 힘이 아니냐.
우리 일곱의 힘이 오늘 밤 똘똘 뭉친 거야.
무엇을 무서워하고 겁낼 것이 있겠냐?
싸울 자리를 찾고 죽을 자리를 얻은 거야.
우리를 못살게 굴고, 우리를 배우지 못하게 했으며,
우리를 주먹 세계로밖에 흐르지 못하게 했으며,
나아가서는 우리 백성을 못살게 구는 일본놈들,
일본 군대를 때려부수는 일을 하다가 죽게 된다면
그것도 우리의 팔자지만 보람 있는 일이 아니겠냐?
누가 알아주는 이는 없다 하더라도 우리 다 같이 우리 조선 백성,
백의민족(白衣民族) 청년으로서 비굴하지 않게 깨끗이 죽자.”
김두한은 다시 한 번 대원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어둠 속이라 여전히 그들의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김두한의 물음에 어느 누구도 목소리로 대답하지 않았다.
목소리로 대답하기에는 너무나 숙연한 것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김두한은 그 무언의 반응에서 대답 이상의 공감을 확신했다.
그 숙연한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그는 다시 말했다.
“뱀탕, 너 야스다 형사 만났냐?”
“못 만났어.”
정진영은 뜻밖의 지명에 놀란 듯이 대답했다.
야스다 형사를 못 만났다는 것이 오늘 밤의 기습 작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라 하지만,
그것으로 어떤 차질을 빚어 그 추궁을 받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두한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마주 받았다.
“못 만났으면 대수냐. 하지만 경찰서엔 갔었지?”
“가지 않으면?”
정진영은 동행한 종로꼬마 쪽을 돌아다보며 동의라도 구하는 듯이 말했다.
“응, 가기만 하면 됐어. 너희들이 밤늦은 시간에 경찰서에 나타났다는 것을 많은 형사들이 보고,
알게만 됐으면 목적은 달성한 거야.”
정진영은 물론, 종로꼬마도 그 뜻을 알지 못해 대답이 없었다.
김두한은 이날 밤의 알리바이를 성립시키기 위해 망치로 하여금 혼마찌에 나가
행패를 부리게 하였고, 다른 돌격대원들로 하여금 늦은 시간에 경찰서에
얼씬거리게 한 의중을 비로소 설명해 주었다.
(빈틈없는 놈!)
김동회는 마음속으로부터 탄복했다.
결국, 혼마찌깡으로 하야시를 만나러 갔었던 것도 그런 작전 계획의 일부였단 말인가?
“그러니까, 내일 새벽 일찍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까,
다시 찾아가 보도록 해. 나도 동회와 함께 일찌감치,
되도록 일찌감치 혼마찌깡으로 하야시를 찾아가서,
망치 좀 풀어달라고 부탁할 참이니까.”
대원들이 밤늦게까지 서울에 있었고 새벽녘에도 서울에 있었다면,
밤사이에 멀리 일산 쪽에서 일어난 사건에 아무도 이들에게 혐의를 둘 자는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대원들도 비로소 이를 납득하고 그 계산이 들어맞든 안 맞든,
그 치밀한 머리에 나름대로 감탄을 했다.
“형님, 정말 머리 한번 좋으셔.”
시구문돼지가,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정말 돼지처럼 두꺼운 입술을 내두르며 말했다.
김두한은 어린애로부터 칭찬을 받는 어른과 같은 낯간지러운 기분이 되어,
허엉 맥 빠진 웃음을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지, 아무 걱정 안 해도 돼. 계획대로만 하면 감쪽같이 성공할 수 있을 거야.”
그는 대원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덧붙이는 것이었다.
겁만 주고 긴장감만 고조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긴 뭐, 나라고 억지로 죽고 싶은 건 아냐.
거뜬히 해치우고 내일 저녁에는 어때?
명월관으로 갈까, 부용으로 갈까? 우리 신나게 마시고 진탕 놀아보자구.”
“너, 또 민자 아씨가 보고 싶어진 모양이로구나? 핫핫.”
문영철이 소리내어 웃었다.
“그래그래, 요즘 많이 굶었으니까…… 으흐흐흣.”
김두한도 소리를 죽이면서 웃었다.
긴장감을 풀기 위해 일부러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돌격대원들은 작전이 끝난 다음의 후련함과 같은 편안한 기분으로 소리를 모아 웃었다.
“자아, 그럼 슬슬 떠나볼까.”
그러자 김두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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