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3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39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3

 

 

 

동틀 무렵인 이른 새벽,

김동회는 하숙집을 나왔다.

송채환은 온몸이 풀어져서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언제나처럼 새벽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나온 것이다.

그는 새벽 운동을 삼청 공원으로 다니지 않았다.

혼마찌깡과 결별한 후, 삼청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다닌 것은 불과 며칠뿐이었다.

혼마찌깡패에서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하야시와는 인연을 끊지 않고 있고,

우메하라 양복점조차 그대로 위탁 경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터에 고따마 체육관과도 인연을 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삼청 공원에서 역기나 들고 철봉틀에 매달리는 운동에 직성이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오랫동안 단련해 온 유도를 해야만 몸이 풀리는 듯싶었다.

김두한도 그가 고따마 체육관으로 다시 나가겠다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그의 양해 뒤에는 그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북악 쪽에서 불어오는 새벽 바람은 간밤의 피로를 말끔히 씻어줄 만큼 상쾌했다.

몸도 가뿐했고, 기분도 상쾌한 새벽 공기만큼 산뜻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궁금하고 답답하고 두려움까지 느꼈던 일들이 깨끗이 씻긴 듯싶었다.

오늘따라 발길을 돌려 삼청 공원으로 나가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삼청 공원으로 나간다는 그 자체가, 알려들지 말라 한 것을 알려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김두한이 하라 한 대로 하면 되는 것뿐이며,

 저녁 6시가 되면 모든 의문이 풀리게 될 것이 아닌가.

고따마 체육관으로 나가 여느 때 없이 정력적으로 운동을 했다.

운동을 끝낸 다음에는 곧바로 우메하라 양복점으로 갔다.

양복점 점원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끝내고,

이노마를 비롯한 점원들에게 지시할 것을 지시하고 양복점을 나왔다.

매일처럼은 아니었지만 이틀에 한 번꼴은 혼마찌깡의 하야시에게

문안을 드리러 찾아가곤 했지만, 이날은 그것도 그만두기로 했다.

머리 회전이 빠른 하야시가 자신의 거동에서

어떤 이상을 발견하지나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잘못 말을 미끄러뜨렸다간 어떤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그동안 뜸했던 양복점 단골손님이며 거래처나 일순해 보기로 했다.

종로 거리를 지나쳤고 관철동 골목 앞도 지나갔으나,

일부러 조양 여관에도 들르지 않았고, 가찌도끼 바도 기웃거리지 않았다.

종로 거리도 관철동 골목도 평소와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길거리마다 흩어져 있는 똘마니급들이 그를 보고 꼬박꼬박 인사를 했다.

주먹패는 누구나 평소와 조금도 다름없는 심상한 모습 그대로였다.

(도대체 무슨 천지개벽할 일이라도 있단 말인가?)

이따금 머리에 떠오르는 의혹이 있었으나, 애써 이를 지우려고 노력했다.

다른 때보다 분주하게 쏘다닌 끝에 약속된 6시가 가까워왔다.

그는 마침내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고, 가찌도끼 바로 향했다.

 

가찌도끼 바의 문을 밀었다.

해가 긴 여름날의 6시다.

술 손님이 벌써부터 밀려들 리는 없었다.

홀 안은 한산했다.

6시가 되어도 아무 이상이 없지 않은가.

김동회가 바 안으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그를 맞은 것은 송채환이었다.

그녀는 그저 배시시 웃기만 했다.

직장인 바에서 만날 때는 언제나 버릇처럼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자기를 맞는 송채환에게서도 아무런 이상이 없잖은가?

“두한이는?”

그는 송채환에게 물었으나, 대답도 기다릴 것 없이 별실 쪽으로 갔다.

별실의 커튼을 헤치고 들어선 그는 좀 뜻밖이어서 다소 놀라운 표정이었다.

중앙에 김두한이 버텨 앉아 있었고,

그 좌우로 종로꼬마·시구문돼지·윤병철·다루마찌가 앉아 있었다.

“왔냐?”

김두한이 심상하게 김동회를 맞았다.

그 정도라면 아무런 놀라울 것이 없었다.

다만 이상했던 것은 망치가 자리에 선 채로 벌주라도 마시는 듯이,

양주를 병째로 기울이며 벌떡벌떡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목마른 자가 병째로 사이다라도 마시듯이.

그러나 망치가 양주를 병째로 기울여 마신다 해서 그다지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망치는 대단한 모주꾼이었다.

아무리 마셔도 밑 빠진 독 같아서 취해서 비틀거리는 일이 없었다.

얼마 전, 김동회가 혼마찌깡에서 종로패로 전향해 온 후

그의 주선으로 혼마찌깡의 부두목 다무라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은 일이 있었다.

김두한을 비롯한 그의 중진 참모급이 모두 참석했다.

물론 망치도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다.

“야, 나 일본 애들과 술을 마시면 직성이 풀리지 않아서…….

그 콩알만한 잔으로 홀짝홀짝 마셔야만 하니, 언제 취하느냐 말야?”

그러면서 초대 자리에 가기에 앞서, 한 홉들이 양주 한 병을

그 자리에서 병째로 기울여 비웠던 것이다.

안주가 있지도 않았다.

입가심으로 냉수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그저 통나무처럼 굵은 손등으로 뻑, 입술을 문질러댄 것이 안주의 전부였다.

그쯤 미리 마셔두어야 모두와 균형이 잡히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가 술병을 나발 불듯 기울여 마신다 해서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었다.

아마도 김두한이 누군가에게 초대를 받은 것이려니 했다.

거기에 망치도 동석하게 되어, 미리 애벌로 마셔두는 것이려니 했다.

오늘 6시 이후에 벌어질 일이 바로 그 초대연에서 전개되는 것일까?

거기에 김동회 자신도 참석하게 되는 것이려니만 생각했다.

그러나 술병을 비운 망치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쓰다 달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별실 밖으로 나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뒤를 따른 것은 다루마찌 하나였을 뿐 아무도 뒤따르지 않았다.

“잘해 봐, 너무 지랄하지 말구.”

김두한이 심상하게 한마디 던졌고,

망치는 돌아다보며 그저 싱겁게 씩 웃었을 뿐이었다.

도대체 망치가 깡술을 마시고 어디로 간 것일까.

잘해 보라는 것은 무엇을 잘해 보라는 것이며,

 너무 지랄을 말라는 것은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일까.

김동회는 미상불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것도 알려들면 안 되는 일에 속하는 것일까?

망치가 나간 뒤를 이어 정진영과 문영철이 들어섰다.

“잘됐냐?”

“염려 마.”

김두한의 물음에 정진영이 가볍게 대답했다.

무엇이 잘됐으며 무엇을 염려 말라는 것인지,

김동회는 또한 몰랐다.

그는 역시 혼자 돌려세워진 듯한 소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요리는?”

“응, 곧 올 거야.”

이번에는 문영철이 대답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바쁘게 중국 요릿집 배달원이 3명씩이나

양손에 배달 상자를 들고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워낙 대식가인 장정들 여섯, 일곱이서 먹어야 하는 음식인 것이다.

넓은 탁자도 비좁아서 요리 접시를 포개듯이 하고 내려놓았다.

그 많은 요리에 비하면 그다지 많지 않은 배갈 몇 병도 내려놓았다.
 
김동회는 또 한 번 의아스러움을 느꼈다.

아직 저녁식사로는 이른 시간이 아닌가.

설령 중국 요리가 필요했으면 가까운 중국집이 얼마든지 있는데,

아무리 무관한 술집이라 하지만 남의 바 안으로 중국 요리를 시킨단 말인가.

“야, 먹자. 빨리 먹어둬야 해. 동회! 너도 든든히 먹어둬야 해.”

김두한은 김동회 쪽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그 선량해 뵈는 웃음에 김동회는 마음이 놓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야, 두한아! 이것도 야시장 돌아보는 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 했던 것처럼,

최후의 만찬이 되는 것인지 모른다, 이거냐?”

그러자 김두한은 헌걸차게 웃었다.

“핫핫핫! 맞아. 하지만 말이지,

동회 너만 잘해 주면 우리는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어.

그렇게 쉽게 죽을 수는 없는 것이니까.”

웃음소리에 비해 목소리는 작았지만,

신념에 가득 차 있는 듯한 마디마디 하나에 힘이 박혀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우선은 든든히 먹어두기만 하면 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니까, 헛헛!”

“너, 문자 한번 잘 쓰는구나. 그래그래, 어서 먹어치우자구.”

문영철이 말을 받으면서 벌써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그의 앞의 요리 접시는 순서도 없이 게눈 감추듯 비어갔다.

김동회는 아직도 떨떠름한 기분으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 역시 몹시 시장했다.

간밤의 피로와 아침결의 격렬했던 운동,

진종일 쏘다닌 피로가 겹쳐 허기져 있었던 것이다.

그도 뒤질세라 먹기부터 했다.
 
탁자 위에 겹치듯 놓여 있었던 접시가 거의 비어갈 무렵이었다.

망치를 뒤쫓아 나갔던 다루마찌가 파래진 얼굴로 헐레벌떡 뛰어드는 것이었다.

“형님…… 야, 야단났어요. 마…… 망치가…….”

다루마찌는 먼 길을 달려와 숨이 차서인지,

아니면 너무 당황하고 놀라서인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왜 호들갑을 떨구 야단이야? 망치가 어떻게 되었다는 거야?”

김두한은 맛있게 먹는 음식맛이 떨어졌다는 듯 짐짓 오만상을 찌푸렸다.

“망치가 혼마찌에서, 일본…… 일본 순사를 때려눕히고 달려(붙들려) 갔어요.”

“거긴 뭘 찾아 먹겠다고 나가서…….”

그는 여전히 불쾌한 표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불쾌할 까닭이 없었다.

 미리 짜놓은 각본대로 일이 착착 들어맞고 있는 것이다.

다만 돌격대원도 아닌 다루마찌나 왕발 앞에서 속셈을 드러내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하긴 돌격대원들도 김두한의 깊은 계략을 알고 있지 못했다.

더구나 김동회는 도대체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져 가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일본 순사를 때려눕혔다면 며칠 푹 쉬어야지 뭐.”

그는 들고 있던 젓가락을 일부러 신경질적으로 내던지듯 하고,

다루마찌 쪽을 건너다보았다.

다루마찌는 마치 자기 자신이 실수를 저지르기나 한 것처럼 날벼락을 각오한 듯

무겁게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어디로 달려갔어?”

“혼마찌 경찰서로요. 아, 바로 혼마찌 교번소(파출소) 앞에서 교번소에서

나오는 순사가 어깨를 쳤기 때문에…….”

다루마찌는 허둥거리며 변명하듯 말했다.

“그만한 일로 시비를 걸고 소동을 벌이면 어떡해! 도대체 깡술을 마셔대더라니…….

 아니 마포 사소리를 만나러 간다더니, 뭣 때문에 혼마찌에 나가서는…….”

그는 입가에 묻은 기름기를 물수건으로 닦아내면서 여전히 투덜거렸다.

다루마찌는 말할 것 없이, 종로꼬마나 정진영·문영철 등

다른 돌격대원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바로 오늘 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새벽 2시를 전후해서 비밀 탄약고 폭파를 위한

행동을 개시해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지 아니한가.

그런데 돌격대원 중 가장 중요한 멤버의 하나인 망치가 거사를 하기도 전에

엉뚱한 일을 저질러 경찰서로 붙들려 가다니…….

이것이야말로 불길한 조짐이 아닐 수 없었다.

여럿의 불안한 시선이 일제히 김두한에게로 쏠렸다.

돌격대원에게까지 일절 비밀로 붙인 연극이 너무 지나쳤을까,

가벼운 뉘우침과 같은 기분이 일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비밀 보장을 위해 좋은 것이다.

예정대로 쥐도 새도 모르게 폭파 작전을 수행해 나갈 수가 있을 테니까.

“할 수 없지. 뱀탕, 너 야스다 형사에게라도 부탁 좀 해봐. 잘 좀 봐 달라구.”

야스다 형사란 종로 경찰서의 실력자로, 언젠가 망나니패의 총두목 김기환에게

한 방 얻어터지고 수표교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때,

정진영이 업어서 구해 준 일이 있는 바로 그 형사였다.

이후 야스다는 이를 은혜로 알아 정진영을 위하고 아껴주었었다.

그러나 정진영의 미간은 찌푸려 있는 채 풀리지를 않았다.

“하지만 야스다 형사가 이 시간에 경찰서에 있을 게 뭐야?”

정진영의 미간이 펴지지 않은 것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하긴 야스다 형사는 아직도 정진영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가 청계천에서 구해 준 것에 대해 은혜로도 알고 있었지만,

뱀탕 장사를 하면서도 변호사가 되겠다고 독학을 하고 있는 것에 감탄을 하고 있었다.

고학을 하는 그에게 학자금이며 생활비의 일부를 대어 주는 등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나 야스다 형사는 조선 주먹패들에게 나쁜 감정을 갖고 있었다.

그가 당했던 것은 김기환으로부터였지만, 야스다의 입장에서는 김기환이나 김두한이나

다를 것 없는 한통속이었다.

정진영이 학업을 포기하고 김두한패에 섞이게 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나마의 원조도 중단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 터에 망치가 떠들어갔다 해서,

도와달라 해도 도와줄 리 만무한 일이었다.

“그가 아직 경찰서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냔 말야.

넌 친구에 대한 의리도 없구나. 네가 만약 떠들어갔다 해봐.

 너를 풀어내기 위해 우리가 얼마나 뛸 것인가,

망치가 얼마나 뛸 것인가. 야스다 형사가 경찰에 있건 없건 간에 밑져야 본전이 아냐?”

김두한은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실제로 야스다 형사가 경찰서에 아직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망치의 석방 따위는 다음 문제였다.

요는 돌격대원들이 밤늦은 시간에 경찰서에 나타남으로써,

이날 밤의 알리바이를 성립시켜 놓으려는 것이 그의 계략이었으니까.

그의 의중을 알 까닭 없는 정진영은 망설일밖에 없었다.

“어서 가보란 말야! 종로꼬마와 함께.”

김두한은 다부진 목소리로 명령하듯 소리쳤다.

일이 이쯤에 이르렀으니 어느 영이라고 거부하겠는가.

그의 부하가 되기로 맹세한 이상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글쎄 그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설령 그가 있다 하더라도 내 부탁을 들어줄지 어떨지 모르겠고,

아무튼…… 박사! 함께 나가 보자구.”

정진영은 마지못한 듯,

역성을 바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얼굴로 종로꼬마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러나 종로꼬마는 다소 머뭇거렸다.

일이 이렇게 되면 오늘 밤의 거사가 다음으로 미뤄지는 것이 아닐까,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다.

그 눈치를 못 챌 김두한이 아니었다.

김두한은 작은 키의 종로꼬마 어깨에 손을 얹고, 밖으로 나가면서 빠른 말로

그의 의도를 대충 설명해 주었다.

“알았지? 그러니까 종로 경찰서에서 얼씬거리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알지?

오늘 밤, 계획대로 현장으로 달려가는 거야. 물론 우리도 정확하게 그 시간에 달려가겠으니까.”

정진영과 종로꼬마를 보내놓고 난 다음,

김두한은 짐짓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다시 별실 안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