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4
“동회야, 미안하다.”
별실로 들어서자마자 김두한은 김동회에게 말했다.
이렇다 할 운도 떼지 않고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 하니,
도대체 무엇이 미안하다는 말인가.
김동회는 어리둥절한 느낌이었다.
“하야시 형님에게 미안해서 어떡한다지?”
김두한은 이제껏 하야시를 입에 올릴 때,
형님이란 존칭을 붙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그가 이제껏 가져보지 못했던 목숨까지 내건 모험을 감행하려는 지금,
이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자존심이 상할 일도 아니었다.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보다는 못하지만,
경찰과 붙은 것이지 혼마찌깡패와 직접 맞붙은 게 아닌데 뭐.”
김동회는 실상 망치가 저지른 일이 달가울 것이 없었다.
정말로 있었던 일이 없었던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모처럼 두 패가 화해를 했고, 전에 없는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터에
재를 뿌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자기 심중을 노골적으로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혼마찌깡에서 전향해 왔다고 해서 하얀 눈으로 보고 있는 패거리들이 있는데,
자칫 잘못 말했다가 김두한에게마저 오해를 받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말야, 그동안 하야시 형님께 신세도 졌고 폐도 끼쳤는데,
망치 자식이 엉뚱한 일을 저질렀으니 정말 미안하게 됐지 않냐?”
“글쎄?”
김동회는 아직 김두한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해 애매하게 대답했다.
“나, 하야시 형님에게 직접 찾아가서 사과를 하고 싶은데…….”
김동회로서는 정말 뜻밖이었다.
하야시를 찾아가서 망치의 석방 운동을 부탁하려는 것으로 알았는데,
사과를 하러 가겠다니.
“망치를 잘 부탁한다, 하려는 것은 아니구?”
“그건 사과부터 하고 난 다음 문제가 아닐까?”
“하지만 형님이 이 시간에 혼마찌깡에 계실는지, 어떨지?”
김동회는 김두한의 겸손해진 태도에 기분이 좋아져서 말했다.
그는 김두한도 위했지만,
역시 하야시를 위하고 싶은 마음이 아직도 있었기 때문이다.
“형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내 진정과 성의만은 보여야 할 게 아냐?
어때, 너 앞장서주지 않을래? 너 아니면 다리를 놔줄 사람이 어디 있어?”
김두한은 부드럽게 미소지으면서 말했다.
김동회는 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일이 잘된 것은 아니지만,
보다 악화되기 전에 수습을 한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더구나 종로패의 두목인 김두한 자신이 먼저 고개를 숙이고
사과를 하러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담백한 성격에, 사리에도 밝은 하야시가 이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격이 아닌가.
“아무튼 좋아! 네 뜻이 그런 거라면 우선 전화를 걸어보도록 하지.
그것이 망치를 조속히 풀기 위한 빠른 길일지도 모르니까.”
김동회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전화기 쪽으로 갔다.
“너희들 먹을 것 다 먹었으면, 잠깐 밖에 나가 있어.”
김동회가 전화를 걸러 나가자,
김두한은 방 안에 남아 있는 자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부하들은 무안이라도 당한 것처럼 떨떠름한 얼굴을 했으나
일어서라면 일어서고 나가라면 나가는 것뿐이지,
군말을 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이빨 빠진 서커스단의 사자 떼들이 열 살짜리 소년 조련사의 회초리 하나에
내몰리는 것처럼 거구의 건장한 사나이들이 일제히 별실 밖으로 어슬렁거리며 나갔다.
“영철이, 잠깐만.”
김두한은 갑자기 문영철을 불러 세웠다.
“오늘 밤 예정대로 하는 거야. 다른 아이들 눈치채지 않게 잘 따돌리구.
돼지랑 윤병철과 함께 빨리 떠나. 난 곧 뒤쫓아갈 테니까.”
김두한은 아프지 않게 문영철의 배를 쿡 찔렀다.
눈치 없이 굴지 말고 빨리 알아서 행동하라는 뜻이었다.
“그럼, 넌 혼자 오겠다는 거냐?”
원래의 계획으로는 김두한은 망치와 함께 가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대신 동회와 함께 가겠으니까, 내 걱정은 마라…….”
별실 안의 부하들이 모두 별실을 나가자마자
김동회가 기쁜 얼굴로 환히 웃으면서 들어섰다.
“마침 하야시 형님이 계셔.”
“거 잘됐군. 뭐래?”
“벌써 망치가 행패를 부리고, 경찰서에 붙들려 간 것을 알고 있던데?”
“허어, 그야 그렇겠지.”
“처음에는 되게 기분 나빠하는 목소리더니,
네가 직접 사과를 하러 가겠다니까 다소 기분이 풀리신 것 같아.”
“그래, 찾아가도 좋다 하던?”
“응, 오히려 반가워하시던데…… 하지만…….”
“하지만 뭐야?”
“곧 총독부 고관들과 저녁 약속이 되어 있어서 가셔야 하는가 봐.”
“그럼, 글렀다 이거냐?”
“아냐, 아냐. 오랜 시간 만날 수는 없지만 두한 아우님이 몸소 찾아오겠다는데
어떻게 마다할 수 있겠느냐면서, 곧 이리로 승용차를 보내시겠대.
그리고 너와 나, 단둘이만 왔으면 좋겠다는 거야.”
“좋았어.”
김두한의 입술이 쫙 찢어지듯 벌어졌다.
그것은 더 바랄 것도 없는 자기 자신의 희망과 일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자신도 오랜 시간 하야시와 어울려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 시간이 되면 수색 방면으로 떠나야만 했으니까.
김두한은 종로 바닥을 벗어날 때면, 더구나 혼마찌깡의 영역 내로 들어설 때면,
자신의 두목으로서의 권위나 만약을 위한 신변의 안전을 기하기 위해서
많은 부하들을 따르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지금은 또한 사정이 다른 것이다.
문영철을 비롯한 돌격대원은 빨리 현장으로 달려가야 하고,
다른 부하들은 눈치를 못 채게 따돌려야만 하는 것이다.
오히려 김동회와 단둘인 편이 홀가분한 것이다.
게다가 승용차까지 보내겠다니,
이것은 상대편 두목에 대한 깍듯한 예우가 아닌가.
요즘처럼 어지간하면 자가용 승용차를 굴리는 시절이 아닌 것이다.
보통 민간인 중에 승용차를 굴리는 사람이란 적어도 만석꾼이 넘는 지주,
그것도 멋도 알고 호기도 있어야 승용차를 가질 만한 배짱이 생겼다.
때문에, 서울에서는 그렇지 않았지만,
어지간한 시골 군 소재지에서도 승용차를 보기 힘들어
어쩌다가 방개 같은 날씬한 자동차가 나타나기만 하면,
아이들이 구경을 하기 위해 구름 떼처럼 몰려들었던 것이다.
아무리 김두한이 조선 주먹계를 주름잡는 당당한 세력을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감히 승용차를 가진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다.
역시 세력과 더불어 재력이 든든한 하야시쯤 되어야 승용차를 가질 수 있었다.
반대로 설명하면, 그가 승용차를 굴린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 가지고서도
그의 실력이 얼마만한 것인가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김두한과 김동회는 우미관 정문 앞에서 하야시가 보내온 검은 승용차에 올랐다.
서울에서는 그렇지도 않다고는 했지만,
우미관 골목 안으로 승용차가 들어서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조선 사람들이 차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김두한도 그 예외는 아니어서 그가 자동차에 오르자 골목 안의 똘마니급들은 말할 것 없이,
지나는 행인들이며 상인들이 신기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이 멈추어 서서 기웃거리며 바라보았다.
김두한은 기분이 나쁠 것이 없었다.
그저 사과를 하러 가겠다고 하는데, 하야시가 같은 야꾸자의 오야붕 신분을 알아주고,
충분한 예우로 승용차를 보내주었다는 데에 만족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처럼 이목을 집중시키고 관철동 골목을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 좋았다.
기웃거리며 자동차를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항상 종로 바닥에 널려 있는
경찰서의 형사들이나 그 끄나풀이 있을 것이 아닌가.
이들이 하야시가 보내온 승용차를 타고 나가는 것을 보면,
오늘 밤 알리바이를 성립시키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돌격대원 이외의 부하들을 따돌리기 위해서도 도움이 되었다.
김두한은 전송하는 문영철이며, 시구문돼지, 윤병철에게 눈으로만 신호를 보내고
의기양양한 듯 다바라진 어깨를 더욱 뒤로 젖혔다.
우미관에서 혼마찌깡은 청계천과 을지로(황금정) 대로 하나를 넘으면 금방이었다.
더구나 승용차로는 요즘처럼 좌회전 금지 지역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교통이 번잡하지도 않아, 타자마자 내리는 듯한 기분이었다.
기나긴 여름해가 기울고 황혼이 깃들기 시작한 시간인데도,
언제나처럼 굳게 닫혀 있는 혼마찌깡의 철대문은 활짝 열린 채로 있었다.
골목길 요소요소에 일본패들이 예의 승용차 안을 주시하고는 있었지만.
“아우님, 어서 오시오.”
바로 현관 앞에서 분명한 우리 조선말로 맞은 것은 부두목 다무라였다.
“형님, 염치없게 되었습니다.”
김두한은 악수를 청한 다무라의 손을 마주 잡으며 약간 고개를 숙였다.
이들은 곧 응접실인 도꼬노마로 안내되었다.
“정복 순사를 때려눕혔다니 골칫거리이기는 하지만,
어차피 건달패의 일이 아니오? 배짱 한번 좋다고 칭찬할 일인지도 모르지.”
응접실에 좌정을 하자 다무라는 위로하듯이 말했다.
자기 자신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건이니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다는 선선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김두한에게도 그것은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은 사건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꾸민 사건이 제대로 풀린 거나 마찬가지여서,
오히려 후련하고 속 시원한 일에 속했다.
하지만 다무라의 말대로 골칫거리인 것은 분명한 것 같았다.
가찌도끼 바에서 선 채로 깡술 한 병을 나발 불듯 비우고 난 망치는
다루마찌를 대동하고 거리로 나왔다. 다루마찌는 영문도 모르고,
시키는 대로 따라나섰을 뿐이었다.
구실은, 마포의 사소리를 혼마찌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렇게나 둘러댄 말에 지나지 않았다.
요컨대 빨리 혼마찌에 나타나서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경찰에 붙들려 가면 되는 것이다.
아니, 붙들려 가야만 하는 것이다.
망치는 약간의 술기운도 있는 데다가 용맹심이 솟구쳐서 어깨에 날개라도 돋친 듯
신바람이 나서 메이지를 거쳐 곧바로 혼마찌 쪽으로 직행했다.
그의 걸음이 어찌나 빨랐는지,
민첩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다루마찌가 종종걸음으로 쫓아갈 지경이었다.
두꺼비는 뱀에게 잡아먹혀야 뱀의 뱃속에서 부화를 하고 새끼를 깐다던가.
때문에 두꺼비는 나 잡아먹어라 하고 뱀의 주둥이 앞에서 조롱을 한다 했다.
망치는 바로 뱀에게 잡아먹히기를 원하는 두꺼비였다.
대뜸 메이지쟈(明治座)가 있는 골목 안 번화가에 나선 망치는
어깨를 좌우로 흔들면서 기세 좋게 걸었다.
거리에 흩어져 있는 일본 주먹패의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꾸스이 사건 후, 악명이 높아진 망치인 것이다.
그러나 이편에서 바람을 끊듯 너무나 기세 좋게 걷고 있으니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주먹패들뿐만 아니라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행인들마저
그의 기세에 질겁을 해서 미리 길을 열고 비켜주었다.
어느 누구와도 어깨 한번 스치지 않았다.
결국 잡아먹어라, 잡아먹어라,
뱀의 주둥이 앞에서 아무리 요사를 떨어도 뱀은 끄떡도 않고 입을 꽉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단숨에 지금의 제일 백화점 앞을 거쳐 혼마찌 거리로 갔다.
6·25 전쟁 후, 거리가 불타버려 그 모습은 많이 달라졌지만,
지금도 있는 충무로 파출소 그 위치에 혼마찌 교번소가 있었다.
뱀장어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한 혼마찌 거리가 좀 휘어진 안쪽에 파출소는 들어앉아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치달아오는 망치의 눈에 막 파출소에서 나오는 정복의 순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것이 이제껏 찾았던 목표이기나 한 것처럼 그는 돌진해 갔다.
원래 주먹패들은 시비를 한번 걸려면 어깨와 어깨를 부딪치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는 좌우로 흔들어대던 왼쪽 어깨로 순사의 오른쪽 어깨를 힘껏 쳤다.
어깨로 어깨를 힘있게 쳤다고는 하지만,
곁에서 누가 보았다면 그저 어깨가 맞부딪쳤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일본 순사 편에서는 몹시 불행한 일이었다.
다바라진 망치의 어깨는 그대로 무쇳덩어리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망치는 처음부터 계획적이었던 것이다.
그런 만큼 그의 어깨에는 특히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일본 순사도 유도나 검도로 단련된 몸으로 단단한 몸집에 건장한 체구이기는 했지만,
상대가 나빴던 것이다.
몸이 한번 뒤뚱거리더니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찧고 만 것이다.
번화가인 혼마찌 거리 한복판인 것이다.
지나던 행인들이 일제히 발길을 멈추고 바라보았다.
폭소까지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행인들은 조소하듯이 순사를 내려다보았다.
아니, 일본 순사 편에서 그렇게 느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엉덩이를 털며 얼굴이 새빨개져서 일어선 일본 순사는 제복의 권위를 앞세우고
험상궂은 얼굴로 소리쳤다.
“고노 바까야로.”
그리고 무모하게도 망치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진정 무모한 짓이 아닐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는 망치에게 힘으로 대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망치는 스스로 경찰에 잡혀가기를 원하여 의도적으로 행패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망치는 달려드는 순사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이제 와서 일본 순사건 조선 순사건 가릴 것은 없었으나,
일본 순사인 편이 마음에 편했다.
욕설을 퍼붓고 달려드는 말투와 표정에서 그가 일본 순사인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일본 순사는 옆으로만 퍼진 조그만 키의 망치를 얕잡아본 듯,
일격으로 거꾸러뜨리기나 하려는 것처럼 불끈 움켜쥔 주먹을
머리 위로 치켜든 채 달려들고 있었다.
그리고 망치 앞에 다가서자 치켜든 주먹을 힘껏 내휘둘렀다.
그러나 그 주먹을 고스란히 맞아줄 망치가 아니었다.
얼른 보기엔 일본 순사의 주먹에 한 방 맞은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그 주먹이 날아들기 전에 망치의 무쇠 주먹이,
힘껏 내휘두를 것도 없이 상대의 명치끝에 꽂혔다.
“윽.”
일본 순사는 비명도 신음도 아닌 외마디소리를 지르고 폭삭 앞으로 고꾸라졌다.
순식간에 상황이 끝난 것이다.
너무나 짧은 시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그 이상 행인들도 꾀어들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이쯤 하고는 다리야 날 살려라 하고 도망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일이 끝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지 경찰에 붙들려 가야만 하지 않는가.
그런데 교번소(파출소) 바로 코앞에서 일이 벌어졌는데도,
너무 돌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기 때문에 교번소 안의 다른 순사들이
미처 이 광경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망치는 하는 수 없이 나둥그러져 있는 순사를 죽지 않을 만큼 발길로 짓이기면서 말했다.
“다루마찌! 너, 나 붙들려 가는 것 보고 빨리 형님에게 알려.”
재빨리 다루마찌에게 이르는 것을 보면,
그는 술에 취해 있지도 않았고 자신의 본분을 잃고 있지도 않았다.
그제야 뒤늦게 안 교번소 안의 순사들이 일제히 몰려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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