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2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38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2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역시 김동회밖에 없었다. 김동회라면 힘도 좋고 몸도 날쌔다.

일본말도 자유롭게 구사할 줄 알 뿐더러 신뢰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아직도 하야시와 유대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그는 아직도 우메하라 양복점을 경영하고 있으며, 이따금 하야시에게 문안까지 드리러 간다.

그것도 버젓이 간다. 구태여 김두한에게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숨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떳떳한 일일는지도 모르지만.

그동안에도 김동회는 김두한과 하야시의 교량 역할을 적지 않게 해왔다.

두 거물이 맞붙지 않도록 여러 가지로 신경을 써왔다.

“그래도 하야시 형님은 야꾸자의 선배가 아니냐?

형님으로 모셔 나쁠 게 없을 거야.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지.

자금줄도 넉넉하겠다,

어려울 때 도와줄 수도 있을 테구 말야.

이건 뭐 김두한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지 하야시를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란 말야.”

그렇지 않아도 하야시와 김두한은 한참 동안 화해 상태에 있었지만,

그는 화해 상태 이상의 우호적인 관계로 돌려놓으려 애를 썼다.

그것이 전 같았으면 혼마찌깡 편에 서서 김두한을 유도하는 것이었으나,

이제는 김두한 편에 서서 김두한을 위해 힘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그러한 김동회의 진의는 김두한에게도 쉽게 전달이 되었다.

실제로 그의 힘으로, 하야시로부터 적지 않은 재정적 원조도 받았다.

그 원조가 없었던들 비밀 탄약고의 폭파 계획도 세우기 어려웠을는지도 모른다.

탄약고 폭파 자체에도 얼마만큼의 자금은 필요한 것이었으나 그보다도 돌격대원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서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위험 대가로서의 격려금과 가족에의 위자료를 선불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한 공로를 인정해서라도 김동회를 빼돌릴 수는 없었다.

한 사람의 우정을 불신한다는 것은 그 우정의 이름으로 자기 자신이 불신당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비밀 탄약고의 폭파를 감행하려는 바로 전날의 초저녁이었다.

김동회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김두한 앞에 나타났다.

김두한을 비롯한 돌격대원들이 비밀 탄약고의 폭파를 위해 사전 공작을 면밀히 짜고 있을 때였다.

“두한아, 너 요즘 나 몰래 굉장히 바쁜 모양이더구나?”

김두한은 가슴이 섬뜩했다.

비밀이 탄로되었다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7명의 돌격대원 이외의 많은 부하들에게도 철저히 비밀에 붙여왔기 때문에

기밀이 누설될 염려는 없었다.

“또 뭘 가지고 트집을 잡고 그래?”

김두한은 딴전을 부리면서 웃었다.

“트집이랄 것은 없지만 말야.

요즘 시구문패의 돼지며 동대문패의 윤병철하고도 어울려 다니면서,

나만을 따돌리고 있는 까닭이 무엇이지?”

“아니, 내가 널 언제 따돌렸다구 그래?”

김두한은 시치미를 뗄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도 혓바닥이 뽑히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에게도 비밀을 지켜야만 하는 것이니까.

“나도 눈치 하나로 살아온 놈이야. 나중에 섭섭한 생각이 들지 않게 해줘.”

 

“알겠다. 그럼, 동회 너 나 하자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해 주겠냐?”

김두한의 입술은 웃고 있었으나,

그의 작은 눈은 김동회를 쏘아보고 있었다.

“너, 이제 와서 뭘 새삼스럽게 묻고 있지?”

김동회는 여전히 시무룩한 표정 그대로였다.

“이를테면 말이다. 내가 죽으라면 죽어주겠느냐 말야.”

김두한의 입가에 떠돌고 있던 미소마저 사라졌다.

김동회는 얼른 대답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진지한 김두한의 표정에 그 자신도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일이라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지만…….”

그는 아직도 쏘아보는 김두한의 시선에 쫓기듯 가까스로 대답한 것이 고작이었다.

“하기야, 망설여지겠지. 무슨 병인지 알고나 죽어야 할 일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말할 수 없어.

나도 아이들로부터 혓바닥이 뽑히기는 싫으니까 말야.

내일 얘기하지, 내일 말해 주겠단 말야.

그 대신, 너 혼자만 죽으라고는 안 할 테니까.

죽게 되면 나와 함께 죽게 되는 것이니까.”

그러더니 김두한은 안호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용물이 두둑한 봉투 하나를 꺼내 털썩 김동회에게 내던지듯 밀어놓는 것이었다.

“이것이 만약을 위한 네 목숨 값이야……. 아무 말 하지 말고 송채환에게라도 갖다 주지.”

바로 김동회의 주선으로 혼마찌깡의 두목 하야시로부터 받은 돈이었다.

다른 돌격대원에게 나누어주고, 자기 몫으로 남겨둔 마지막 남은 돈의 전부였다.

김동회는 아직 영문을 몰라 돈 다발을 받아넣을 수도 없었다.

너무나 심각한 분위기여서, 자연스레 얼굴이 굳어지고 백지장처럼 창백해질 뿐이었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한다 하지 않았어? 잠자코 집어넣어.

그리고 오늘 밤은 아께미나 호강시켜 주라구.”

김두한은 비로소 씩 웃었다.

그래도 김동회는 돈 다발을 챙겨넣을 수도 없었다.

김두한은 그에게 억지로 돈 다발을 호주머니에 넣게 하고는 함께 거리로 나왔다.

“나와 함께 야시장이나 둘러보자구.

어쩌면 야시장을 둘러보는 것도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르니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그래?”

김동회는 김두한의 뒤를 따라 나오면서도 정말 궁금해 못 견딜 일이었다.

“잠자코 있어. 내일까지는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고, 나 하라는 대로만 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종로 거리에 불빛이 들어왔다.

사뭇 쓸쓸해진 야시장이었으나 그러나 인파가 붐비기 시작했고,

서울의 밤이 고동치는 활기를 띠어갔다.

김두한은 언제나처럼 빠르지 않은 걸음으로 천천히 걸었다.

거리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똘마니급 부하들이며,

낯익은 상인들의 인사를 웃는 낯으로 받았다.

야시장의 순시도 이것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사람의 표정 같지도 않았고, 태도 같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단 말인가.

김동회는 그저 숨이 막힐 만큼 답답하기만 했다.

종로 야시장을 일순하고, 가찌도끼 바로 돌아왔다.

아직 이른 시간인데도 바 안은 꽤 많은 손님으로 붐볐고,

오히려 다른 때보다 활기를 띠고 있는 듯이 보였다.

손님들이 일본군의 연전연승에 덩달아 들떠 있는 것 같았다.

도대체 평소에 비해 다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야시장 순시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던 김두한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조급해하거나 초조한 기색 하나 없이 기분 좋게 술만 마셨다.

내일까지는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 한 것이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김동회는 굴뚝 속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답답하기만 했다.

시간이 지나자 망치며 문영철도 찾아들었고, 왕발이며 머리 빠진 개고기, 다루마찌 등도

모여들어 자리를 함께 했다.

이것도 예사로운 일이었다.
 
좀 다른 것이 있다면,

밤마다 모습을 보이지 않는 일이 없는 종로꼬마가 나타나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요즘 들어 종로 쪽의 출입이 잦고, 함께 휩쓸려 다니는 시구문돼지며

경마장패의 윤병철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지레짐작이 앞섰기 때문이지,

예사롭게 생각하면 얼마든지 가볍게 흘려버릴 수 있는 일이었다.

자정 가까운 시간에 2차로 찾아간 요정 부용에서 나와, 김동회는 김두한 일행과 작별했다.

김두한과 망치 등은 언제나의 숙소인 조양 여관으로 갔고, 김동회는

자기 하숙집인 낙원동으로 돌아갔다.

“내일 만나자. 저녁 6시엔 꼭 가찌도끼 바로 나와야 해.”

헤어지면서 김두한이 한 말은 그것뿐이었다.

굳이 다짐을 하지 않더라도 저녁 시간이면 자연 만나게 될 것인데,

한마디 더 강조하는 것이 이상하다면 이상했다.

이 무렵, 김동회는 돈암동의 박계주 집에서 나와 낙원동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현재의 낙원극장 앞 목욕탕 뒷집의, 지금도 남아 있는

삼계탕인지 보신탕으로 성업하고 있는, 바로 그 골목 안 넓은 한옥이었다.

혼마찌깡과 결별하면서, 언제 자기 자신이 일본 주먹패의 습격을 받을지 모르는 판국에

박계주의 신변 보호를 맡고 있을 처지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송채환과의 밀월 생활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동서 생활이라기보다 기분 내키는 대로의 뜨내기 생활이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송채환은 시간이 늦으면 김동회의 하숙집으로 왔고,

일찍 끝나는 날이면 시어머니가 홀로 있는 삼선교 집으로 가기도 했다.
 
부용에서 나와 가찌도끼 바 앞을 지나치면서,

송채환이 아직도 있을까 없을까 살펴보고 싶었으나,

많은 동료들 앞에 체면이 서지 않을 것 같아 그대로 하숙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송채환이 먼저 하숙집에 와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아께미, 너 웬일이지?”

김동회는 여느 때 없이 그녀가 반가웠다.

“아니, 왜요? 제가 못 올 데를 찾아왔어요?”

송채환에겐 주기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니, 너무 반가워서. 사실 오늘 밤은 꼭 함께 있고 싶었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옷을 받아드는 송채환의 볼을 가볍게 토닥여주면서 김동회는 말했다.

“그저께는 너무 과음을 했고, 어제는 전날 밤에 너무 마셔 온종일 골치가 아파

일찍 집으로 들어가 쉬었어요.”

송채환은 묻지도 않은 변명을 했다.

이틀씩 찾아오지 않았던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어쩐지 얼굴이 핼쑥하더라니,

하지만 그 핼쑥해진 얼굴이 더 예쁜데 그래? 매력적이야.”

김동회는 느닷없이 송채환의 허리를 낚아채듯 감싸 안으며

그녀의 볼에 입술 세례를 퍼부었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송채환은 그의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으나 당황한 듯이 쩔쩔맸다.

“웬일이세요?”

뜨겁게 모았던 입술에서 떨어지자 송채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래도 김동회의 평소 같지 않은 언행에서 무슨 기미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 점에서 여자란 참 민감한 것이니까.

실은, 김동회의 마음은 몹시 착잡해 있었다.

김두한은 야시장을 둘러보는 것조차 마지막일지 모른다 하지 않았는가.

그는 무엇인가 중대한 일을 저지르려 하고 있다. 목숨까지도 내건 중대한 일인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내일까지는 묻지도 말고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그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휩쓸려들어야만 하다니.

깜짝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져서 바라보는 송채환에게 무슨 해답이라도 듣고 싶었으나,

그 놀란 얼굴은 수수께끼를 풀어줄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커다래진 눈이 그에게 해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실은 말야……, 너를 안아주는 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일지 몰라.)

그는 목구멍까지 솟구쳐 나오는 말을 꿀꺽 삼켜버렸다.

그러나 그녀의 강렬한 시선 앞에 어떻게든 둘러대야 할 말이라도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되었다.

“빨리 자자구. 사실은 말야, 나 내일 아니면 모레쯤 만주로 가게 될지도 몰라.”

그는 어물쩍 자리에 누우면서 말했다.

“무슨 일로요?”

송채환은 너무나 놀라서 후닥닥, 달려들듯 옆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거짓말이 너무 서툴렀을까.

하지만 한번 내뱉은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게 마련이었다.

“실은 말야, 하야시 형님의 심부름으로…….”

“그렇지만 당신은 이제 하야시 사람이 아니지 않아요?”

“하지만 너무 중대한 일이어서 말야. 김두한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는…….”

“그게 무슨 일인데요?”

“그걸 나도 모르니까 답답하지.

무슨 병인지 알고 죽고 싶은데 무슨 병인지도 모르니까 답답할밖에.

당신 뭐, 김두한에게서 어떤 기미 같은 것 눈치챈 것 없어?”

그는 탐색적인 곁눈질로 송채환을 바라보았다.

“그걸 저에게 물으시면 어떡해요?

김두한과 한통속인 당신이 그걸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어요?

왜, 무슨 일이 있어요?”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묻는 것 아냐?

김두한은 아무래도 내게 속을 주지 않는 것 같아서 말야.”

“그거야 당신이 먼저 속을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 아니에요?

먼저 주고 달래야지, 받기부터 하려니까 그렇지 않아요?

아무리 혼마찌깡패에서 뛰쳐나왔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하야시의 심부름이나 하고 다니는데, 어떻게 속을 줄 수 있겠어요?”

송채환은 깊은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의 말에는 범하기 어려운 진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김동회는 아무렇게나 둘러댄 거짓말의 꼬투리에 발목이 잡혀 말을 잃고 말았다.

“그래 맞아. 아께미, 너의 말이 맞아. 먼저 주고 받아라 이거지?

어차피 김두한패가 된 이상 죽으라면 죽고, 살라면 살고…….”

그는 머리에 떠도는 상념이 많아 이를 뭉개어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좀 난폭하다 하리만큼 거칠게 송채환의 팔을 잡아끌어 자리에 누였다.

궁금해하지도 말고 알려고 하지도 말자.

두목이 죽으라면 죽는 길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협객의 길이며 숙명인 것이리라.

그는 옆자리에 누인 여체를 좀 우악스럽게 더듬었다.

커다란 한 뼘의 손에도 남는 앞가슴의 융기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손아귀 속으로 잡혀들었다.

송채환은 자칫 몸을 움칫거리기는 했으나, 전혀 저항하지 않았다.

불붙은 여체의 반응은 그녀의 감정 이상으로 민감한 듯싶었다.

가슴의 융기 그 정점, 팥알처럼 잡히는 것이 따로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꼬들꼬들하게 돋아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자칫 손끝으로 비틀면 파르르 떨면서 엷은 금속성 소리가 날 것만 같았다.

그는 그녀의 앞가슴을 헤쳤다.

뭉실뭉실하고 희뿌연 살결이 연체동물처럼 커다랗게, 커다랗게 물결쳤다.

딱딱하게 응어리진 팥알이 엷은 고동색 꽃무늬 위에서 자신의 위치와 의지를

한꺼번에 일깨워주려는 것처럼 개성 있는 꼿꼿한 자세로 일어나 있었다.

그는 복받쳐 오르는 욕정과는 달리 가볍게 입술을 가져가서 가만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내일 죽음을 맞게 될지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성실한 애무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또, 이렇게 애무할 수 있는 순간순간만이 가장 소중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여체는 가쁘고 고르지 못한 숨소리와 함께 세밀하게 경련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것은 화려한 고통. 그는 이 신음 소리를 희열의 울부짖음으로 받아들였고,

자기 자신도 똑같은 희열의 돌개물 속으로 말려 들어갔다.

이제 죽음의 두려움 같은 것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지금의 소중한 시간이 있음으로 해서 내일은 없어도 무방할 것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무한히 젊었고, 밤은 아직도 많이많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