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1
여섯으로 규합된 대원은 모두 자기 앞가림을 할 만한, 한가락 하는 맹자들이었다.
이들만 하나로 뭉치면 세력으로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이 목숨을 내걸고 달려드는 일인데 무슨 못 할 일이 있겠고,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또한 하나같이 무식한 것이다.
더러 일본말을 알아들을 줄 아는 자는 있어도, 하나도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자가 없었다.
그것은 김두한도 마찬가지였다.
적과 싸우려면 우선 적을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언제 어느 경우,
일본인과 맞닥뜨리게 되어 일본말을 필요로 할 때가 오게 될는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 나서줄 자가 없었다.
하나의 대원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은 비단 7이란 숫자에 길운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만은 아니었다.
물론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김동회였다.
그는 힘도 있고 일본말에도 능통하니까.
그러나?
그는 혼마찌깡에서 전향해 온 지 아직 일천하다.
혼마찌깡에서는 빠져나왔지만 아직 하야시와의 인연은 끊지 않고 있다.
심지어 하야시의 소유인 우메하라 양복점까지도 아직 맡아 운영하고 있지 아니한가.
그의 전향에 불신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지만,
만약에 어떤 우발적인 계기로 하야시에게 정보를 누설하게 되면 어쩔 것인가.
김두한은 다소 주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에 불을 지른 것이 망치였다.
“곰보야! 넌 왜 그렇게 사람이 좋냐? 그런 비단결같은 마음으로 어떻게 오야붕을 해?”
“넌 또 뭘 가지고 그래?”
“김동회를 철석같이 믿고 있으니 말야.”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해? 사람이란 믿다가 믿어지지 않는 것을 의심해야지,
처음부터 의심할 수는 없는 것 아냐?”
“혼마찌깡에서 나온 것이 언젠데?”
“하지만 나온 것만은 사실이지 않아?”
“그러니까 비단결같은 마음이란 거야.
너도 알다시피, 일본 주먹패의 계율이 얼마나 무서우냐?
배신한 자에게는 잔인하리만큼의 보복을 하는 것이 상례야.
그런데 하야시는 보복은커녕 그에게 그대로 양복점까지 맡겨놓고 있어.
그래도 의심이 가지 않냐? 그가 정말로 전향을 했다고 믿느냔 말야.
그리고 설령 이를 믿는다 하더라도 한번 배반한 자는
또 언제 배반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해.”
김두한은 이에 대답할 말을 잃었다.
“알았다, 알았어. 좀더 두고 보지.”
그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망치의 말에 일리가 있기는 했지만,
김동회를 의심하는 것에 마음이 괴로웠던 것이다.
앞으로 김동회의 얼굴을 무슨 낯으로 쳐다볼 것인가.
그런 채로 그는 김동회를 돌격대원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은 누구로 메울 것인가.
일본말에 유창한 자라면 그 밖에 정진영 이외에 누가 있단 말인가.
정진영은 이제 수표교 밑에서 뱀탕 장사는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도 고등 문관 시험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팥죽 할멈 집 골방에서 술 두꺼운 법률책과 씨름을 하고 있었다.
과연 그러한 그가 죽음을 무릅쓴 돌격대에의 가입을 희망할 것인가.
그가 남다르게 민족 의식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가 되어, 독립 투사의 무료 변론이며,
일제에 항거하다 억울하게 붙잡힌 가난한 자 편에서 싸우겠다고, 항상 입버릇처럼 말해 왔었다.
예의 수표교 싸움에선 자진해서 혼마찌깡패와 싸워주기도 했다.
새벽마다, 수표교 아래에서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그는 다른 주먹패에 못지않은 건장한 체력과 힘을 갖고 있었다.
다른 것은, 머리에 들어 있는 것이 있다는 점이었다.
아는 것은 힘이다.
그러나 병일 수도 있는 것이다.
특히 주먹 세계에서는 그러하다.
배운 사람들은 이리저리 계산이 빠르고 약기 때문에, 싸움에는 적격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김동회를 쓸 수 없다고 하면 정진영이라도 끌어들여야 할 것이 아닌가.
김두한은 우선 그와 부딪쳐보기로 하고 망치와 함께 팥죽집으로 찾아갔다.
팥죽 할머니가 언제나처럼 반겨 맞아주었다.
“아니, 이게 웬일이지? 요즘엔 통 팥죽도 먹으러 오지 않고.”
사실, 김두한은 팥죽집의 출입이 옛날 같지 않게 뜸했었다.
옛날처럼 가난하지도 않았지만,
술을 본격적으로 마시게 된 이후부터는 그 좋아했던 팥죽도 입에 붙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영이는 어딨어요?”
“어딨긴 어딨어? 밤낮 제 방에서 공부하고 있지.”
김두한은 곧바로 정진영의 골방으로 갔다.
정진영은 근육이 다닥다닥한 혹처럼 뭉쳐 있는 상체를 드러낸 반라의 모습으로,
책도 보지 않고 벌렁 누워 담배 연기만 뿜어대고 있었다.
“야, 진영아. 너 뭘 하고 있냐, 공부도 않고?”
“나, 공부하긴 다 틀렸어.”
정진영은 김두한과 망치가 문 앞에 섰는데도 누운 자세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다.
“그건 또 무슨 새소리냐?”
“이제 나 공부 다 집어치우고, 지금부터 너의 철저한 꼬붕이나 되어야겠나 봐.”
“햐아! 그건 반가운 소리이기는 하지만, 나 감옥에 가게 되면 누가 변론을 해주지?”
김두한은 그 큰 몸집을 비좁은 방에 쑤셔넣듯 하고 들어서면서 농담처럼 말했다.
정말 공부에 남다른 열성을 갖고 있던 그가 그처럼 자조적인 말을 하는 것을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이다.
사실 정진영은 고문 패스는커녕,
그 예비 시험에서까지 낙방을 해서 완전 실의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하기야 내로라 하는 경성제대를 졸업하고도 고문 패스가 어려운 처지에,
기껏 영창학교를 나온 학력 가지고 독학으로 고문 패스란
하늘의 별 따기보다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두한아, 너 정말 날 꼬붕으로 안 받아줄래?”
김두한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정진영은 그제야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
뒤이어 망치도 방으로 들어섰다.
비좁은 방은 세 거한으로 하여 꽉 찼다기보다,
금세 찌부러질 것만 같았다.
일어나 앉은 정진영은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
김두한이 때(식사)도 아닌데 느닷없이 찾아든 것만 해도 의외였고,
찾아왔다 하더라도 팥죽 가게로 불러냈지,
비좁은 자기 방으로 쑤시고 들어온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야, 뱀탕아! 그럼, 넌 언젠 김두한 꼬붕이 아니었냐?”
망치는 마른 나뭇가지를 뚝뚝 분질러낼 때와 같은 말투로 무뚝뚝하게 말했다.
“고마운 친구라고 생각한 일은 있어도 꼬붕이라고 생각한 일은 없어.”
그는 물고 있던 담배를 재떨이도 아닌 묵은 신문지에 비벼 끄면서 말했다.
“고마운 친구였다면 그것으로 됐지, 뭐가 아쉬워서 꼬붕이 되겠다는 거냐?”
김두한은 주제가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제대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며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흘렸다.
“장래에 명 변호사를 꿈꾸었을 때는 친구 편이 좋았지.
그러나 고문 시험을 포기한 이상,
차라리 야꾸자 세계로나 뛰어드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 말야.
난 기질적으로도 변호사보다 야꾸자 편에 가깝구.
네 꼬붕이나 돼서 일본놈이나 실컷 두들겨패 주었으면 좋겠어.
너, 정말 꼬붕으로 받아줄래 안 받아줄래?”
정진영의 농담 같지 않은 표정이 진지했다.
“좋은 일이지. 너같이 머리 좋은 애를 꼬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 정말 나에게 목숨까지 맡길 수 있겠냐?”
정진영의 표정이 진지했으므로 해서, 김두한의 표정도 엄숙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야꾸자 세계에 들어가겠다는 놈이 두목에게 목숨을 맡기지 않는 게 어딨냐.
오늘부터 내 목숨은 내 것이 아닌 오야붕 김두한 거야!”
기실, 정진영은 누운 채 담배를 뻐끔거리면서 바로 그런 생각을 굴리고 있었다.
고문 패스가 가당치도 않고, 어림도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차라리 김두한 밑에 들어가서 남자답게 일본놈과 싸우는 것에 삶의 보람이
있을 듯한 생각이 들었다.
바로 그러한 때,
그의 결심을 굳히게 하려는 것처럼 난데없이 김두한이 뛰어든 것이었다.
“좋다. 넌 오늘부터 내 동생이야. 내게 목숨까지 맡긴 꼬붕이야, 알지?
넌 네 입으로 네 목숨이 김두한 거라고 말했어!
그 한마디를 영원히 잊어선 안 된단 말야.”
“오야붕, 명심하겠습니다.”
고마운 친구의 자리에서 목숨을 맡긴 꼬붕의 자리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이들의 얘기는 너무나 쉽게 이루어져 갔다.
즉석에서 지하 탄약고 폭파 계획을 알려주었다.
물론 돌격대원으로서 엄격한 다짐도 받아두었다.
“꼬붕이 된 그날로부터 돌격대원에 넣어주어 고맙습니다.”
정진영은 머리를 조아렸다.
이제 돌격대원 7명은 규합되었다.
남은 것은 비밀 탄약고의 폭파 작전뿐이었다.
종로꼬마 이상욱·시구문돼지·윤병철, 이 세 명의 정찰로 비밀 탄약고의 소재도 확인되었다.
윤병철이 수색 방면의 지리에 밝은 것이 크게 도움이 되었다.
일본군이 지하 탄약고를 파느라고 많은 민간 사람들을 동원했었기 때문에
그 소재를 알아내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
과연 지하 탄약고는 몇 덩어리의 바위가 뒹굴고 있을 뿐,
그리 나무도 많지 않은 야산 밑에 있었다.
그 아래 비밀 탄약고가 있으리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는 평범한 야산이었다.
그리고 들은 대로 야산 근처 일대는 온통 호박밭이 되어 있었다.
그 야산 모퉁이에 집총한 군인 둘이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보초 쪽에서는 바깥쪽이 훤히 내다보여도 바깥쪽에서는 지하 탄약고의 입구도 보이지 않았고,
보초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비밀 탄약고의 소재를 알아낼 수 있었다 해서
곧바로 폭파 작전을 행동으로 옮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근 보름 동안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탄약고 주위를 답사시켰다.
주위의 지형, 보초의 숫자, 보초의 교대 시간, 탄약의 운송 횟수와 그 시간을 면밀히 정찰시켰다.
때로는 낚시꾼으로 가장도 했고, 밭의 김을 매는 농부로도 가장했다.
밤을 새워 철야로 잠복해서 정찰을 하기도 했다.
정찰을 하고 돌아온 돌격대원들은 그 상황을 일일이 김두한에게 보고했음은 물론이다.
김두한은 그 보고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세밀한 작전을 짜나갔다.
그 자신도 교대로 부하들을 데리고 현장으로 가 정찰을 했다.
새벽녘 삼청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가는 척 나갔다가 현장에 다녀오기도 했고,
저녁 무렵 술을 마시러 가는 척하고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오기도 했다.
폭파 작전은 생각보다 어려울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엄중히 탄약고의 경비를 하고는 있었지만 대단한 경계는 하지 않고 있었다.
조선인을 포함한 온 국민이 승전의 들뜬 분위기에 잠겨 있는데,
어느 누가 탄약고를 폭파하겠다고 나서겠는가 하고 안심하고 있는 듯싶었다.
주야로 정규 군인 2명이 보초를 서고 있었지만,
밤이 되면 경계심이 풀려 보초를 서는 둥 마는 둥 빈들거렸고,
개중에는 꾸벅꾸벅 졸기까지 하는 이도 있었다.
김두한은 그 꼬락서니를 바라보면서 폭파 장비만 있다면 당장에라도
탄약고를 습격하여 폭파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자신도 생겼다.
결국 폭파 작전은 밤에 결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보초 교대 시간의 30분을 앞선 새벽 2시 30분경이 가장 적합하다.
이제 어떠한 방법으로 폭파를 해야 하며 어떠한 도구를 준비해야 할까,
그리고 폭파 작전을 결행한 후 어떠한 경로로 어떻게 도주를 해야 할까를 검토할 차례였다.
그러나 이를 연구하기에 앞서, 부딪힌 문제가 있었다.
작전은 반드시 밤에 결행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망치는 쓸모가 없었다.
그는 밤이면 소경이나 다름없는 야맹증 환자였으니까.
“어쩐다지?”
“망치, 넌 아무래도 그날 함께 행동할 수 없을 것 같은데 어떡하면 좋지?”
김두한은 위로하듯 말했다.
“왜?”
망치는 물어뜯듯이 대들었다.
“그렇게 화가 날 게 없지 않냐? 네가 널 더 잘 알고 있잖아! 밤소경이란 것을.
너 하나 때문에 더듬거리다가 붙잡히기라도 한다면, 만사가 들통날 게 아니냐!”
그 말에는 망치도 할말이 없었다.
자기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 명예로운 돌격대원에서 자기만이 빠지게 되다니,
그것은 남자로서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만이 따돌림이라도 당한 것처럼 두 손끝 마주 잡고 돌아앉아 있을 수 있냐?”
망치는 볼멘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좋은 수가 있어.”
“좋은 수라니?”
“네가 한몫 단단히 하는 좋은 역할만 해주면 돼.”
“그게 뭔데?”
“우리가 일을 터뜨리기 전에 네가 먼저 유치장 신세만 져주면 돼.”
“그게 무슨 소리지?”
“사실은 말야…….”
김두한은 차근차근 자기의 복안을 털어놓았다. 내용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즉, 비밀 탄약고를 폭파하는 바로 그날 밤,
혼마찌쯤에 나가서 일본 순사를 때려주든지,
일본 상인에게 일부러 행패를 부려 경찰서로 떠들어간다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김두한과 몇몇 돌격대 대원들이 김동회를 앞장세워 혼마찌깡의 하야시에게
구명 운동을 하러 간다는 것이었다.
그사이 일부 돌격대원들은 비밀 탄약고를 향해 떠나는 것이다.
하야시가 망치의 석방을 위해 얼만큼 노력해 줄 것인가는 다음 문제인 것이다.
김두한은 그저 그날 밤의 알리바이만 성립시켜 놓고 곧장 수색 방면으로
줄달음쳐 간다는 것이었다.
무사히 폭파를 끝낸 다음 새벽녘에 또다시 하야시에게 찾아가 간청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자신들의 알리바이가 성립되어, 사고를 터뜨리고 난 다음에도
무사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계산이었다.
“어때? 이렇게 되면 너도 돌격대원으로서 단단히 한몫하는 게 될 것 아냐?
우리보다도 먼저, 아니 우리를 대신해서 며칠 썩어달라는 거야.”
“야, 대신 죽어달래도 죽어줄 판에, 며칠 빵깐 신세쯤 지는 것이야…….
아예 혼마찌 경찰서로 쳐들어갈까?”
“아서, 아서! 가볍게, 아주 가볍게 말이지.
이튿날 풀려 나와서 우리끼리 뜻있는 축배를 올릴 수 있도록 말야.”
망치는 대답 대신 씩 웃었다.
그쯤의 일은 식은 죽 먹기 정도로 수월한 일이었다.
그것으로 돌격대원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되고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자기를 안심시킬 수 있는 구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망치가 납득해 주었음으로 해서, 문제 하나는 해결된 셈이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면 망치 대신 누구로 대체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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