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0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21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20

 

 

 

김두한의 표정이 다시 평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망치의 경솔을 나무랄 수도 없었지만,

그 이상으로 시구문돼지의 진실이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대체로 머리가 비어 있는 주먹패들은 단순하다.

단순한 만큼 솔직하고 담백하다.

그런 패일수록 신의가 있고 의리도 있는 편이다.

맹목적이라 할 수 있다.

김두한은 이글거리는 시구문돼지의 눈빛과 그 내휘두르는 불만 섞인 두툼한 입술에서,

그리고 침이라도 튀길 듯한 열변에서, 그를 믿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 점 김두한도 역시 단순했다.

그 역시 솔직하고 담백한 것이다.

사실, 비밀 탄약고의 폭파란 얼마나 어렵고 위험한 일인가.

한두 사람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용기도 있고 힘도 다부져야 하며 민첩도 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의가 있어야 한다.

그 기준에 시구문돼지가 뒤떨어질 것이 없지 않은가.

그는 시구문패의 골수분자다.

때문에 김두한의 직계나 심복이 아니었을 뿐,

정말 쓸 만한 물건이 아닌가.

이 기회에 심복할 수 있는 직계로 만들면 될 것이 아닌가.

“그래. 난 돼지, 너를 믿으니까.

함께 일하고 함께 싸워주기만 한다면, 무엇을 꺼리겠냐.”

김두한은 악수를 청하는 손을 돼지 앞으로 내밀었다.

시구문돼지는 김두한의 손을 힘있게 잡아 흔들면서 말했다.

“염려 마쇼. 함께 붙여만 준다면…….”

어차피 시구문패가 덩어리째로 김두한의 그늘로 들어온 이상,

이제 변두리에서만 돌지 말고,

이 기회에 서울의 심장부로 파고들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의중에도 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곁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의 종로꼬마가 물었다.

어떤 작은 사건이나 계획도 사전에 빠짐없이 의논을 하는 김두한이

비밀 탄약고를 폭파하겠다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으면서,

망치와만 의논을 하고 이제까지 일언반구도 귀띔을 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눈치를 못 챌 김두한이 아니었다.

“응, 박사에게도 의논을 할 참이었지만 말야.”

김두한은 긴장된 기분과는 달리 입가에 미소를 띠면서 말했다.

박사란 종로꼬마의 또 하나의 별명으로 여드름 박사란 뜻이다.

그의 기분을 달랠 필요가 있을 때, 꼬마란 별명 대신 박사라고 부르곤 했다.

“응, 수색을 지난 일산 근처의 지하에 숨겨둔 비밀 탄약고가 있다는 걸 알아냈단 말야.

그 탄약이 어디로 실려가는 줄 알어? 만주로, 만주로 간단 말야.

만주에 가서 무엇에 쓰일까,

그건 물으나마나 뻔한 일이지.

우리 아버님 백야 장군이 이끄시는 조선 독립군과 싸우기 위한 것이지 뭐냔 말야?

이를 번연히 알고서도 아들인 내가 잠자코 있을 수 있느냐 말야.

때려부숴야지, 까버려야 해. 그것이 아버님을 위하는 아들의 도리이며,

조선 독립을 위하는 길이 아니겠느냐 말야.

어떻게든지 일본을 방해하는 일이야말로 조선을 위하고 아버님을 돕는 길이 아니냐 그거야.”

김두한은 자기 자신의 말에 고무되어서인지,

격해질 때면 언제나 그러한 것처럼 목소리에서 쇳소리가 났다.

 

“암, 해야지, 해치워야지! 어떻게든 일본놈들을 골탕 좀 먹여줘야 해!”

종로꼬마가 고무하듯이 맞장구를 쳤다.

“아, 그런 일에 내가 빠져서 되겠어? 까짓것,

이거 하나만 내놓을 작정하면 되는 것 아냐?”

시구문돼지가 그 굵은 목을 치는 시늉을 해 보였다.

“허어, 그렇다면 은행을 터는 것보다 그게 낫겠는데.

그게 곰보(김두한의 별명) 아버님을 돕는 일이라면야.”

망치도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식은 죽 먹긴 줄 아냐?

들키면 어김없는 총살감이야.

모가지가 두 개씩 있어도 모자란단 말야.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야 하지.

그리고 알지? 아무리 친한 친구에게라도 절대 비밀이야.

비밀을 누설했다간, 혓바닥이 뽑히는 것으로 알엇!”

김두한의 작은 눈이 세 사나이의 얼굴을 똑같이 훑었다.

“그럼, 우리 넷이서만 하는 거냐?”

종로꼬마가 사냥의 기미를 알아채고 흥분하는 엽견처럼 말했다.

“죽기 살기를 함께할 몇 놈이 더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건 내가 직접 고를 거야.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에게도 입 밖에 내서는 안 돼. 혓바닥이 성하고 싶으면 말이지.”

김두한은 방금 입을 가볍게 놀린 망치 쪽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야, 두한아. 나, 두 개라도 모자란다는 모가지는 하나밖에 없구,

멀쩡한 혓바닥도 뽑히고 싶지는 않으니까…….”

망치는 어깨에 달라붙은 굵은 목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데, 일은 언제 시작하는 거냐?”

성미가 급한 종로꼬마가 물었다.

“당장!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수색에서 일산 쪽으로 걸어서 30분,

아득히 먼 쪽엔 민가도 있고, 키 큰 옥수수밭이며 수수밭도 있지만,

그 반대쪽에는 온통 호박밭이고 그 한쪽에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있는데,

2명의 보초가 밤낮으로 지키고 있다는 것뿐야.

아, 참, 그 야산 밑이 바로 지하 비밀 탄약곤데,

거기까지 도라꾸(트럭)가 들어갈 만한 샛길이 있다던가.

이걸 우선 찾아내야 해.”

“이거야, 남산골에서 김서방 찾기가 아닌가?”

“그러니까 처음부터 어려운 일이라 하지 않았어?

어때? 종로꼬마하고 돼지가 제일 먼저 나서보지.

거기가 어디쯤 되는가, 정찰을 해서 찾아내란 말야.”

“왜, 난 빠지구?”

망치가 불만스러운 듯이 말했다.

“넌, 안 돼! 밤이 되면 소경이 돼서 말이지…….”

김두한의 말에 망치는 시무룩해져서 고개를 떨구었다.

망치의 고개가 밑으로 떨어진 것에 반해,

무엇인가 생각에 잠긴 듯 숙이고 있던 종로꼬마의 고개가 대신 올라왔다.

“좋은 수가 있어. 그쪽으로 천렵이라도 가는 척하고 가면 될 것 아냐? 돼지, 어떠냐?”

그는 자신이 생각해 낸 의견에 스스로 만족해하며,

시구문돼지의 동의라도 구하려는 듯 그의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뜻밖에도 시구문돼지는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저어 보이는 것이었다.

 

같은 자리의 세 사나이는 시구문돼지가 고개를 옆으로 젓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왜 그래, 돼지?”

역시 성급한 쪽의 종로꼬마가 물었다.

“두한 형! 나, 아무래도 두한 형님에게 혓바닥을 뽑히고 말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뜻이지?”

김두한의 눈빛이 일순 번뜩였다.

“나도 하나밖에 없는 모가지 아까운 것은 알고, 멀쩡한 혓바닥 뽑혔다간 야단이지만…….

아무래도 입을 나불거리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단 말야요…….”

“입을 나불거리기 전에 혓바닥을 뽑아달란 말인가?”

“어이구, 왜 그러세요?”

시구문돼지는 김두한이 정말로 혓바닥을 뽑으려 대들기라도 한 것처럼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는 어깨를 뒤로 젖히면서 말했다.

“사실은 말예요, 동대문 밖의 윤병철 말예요. 배짱 한번 좋구, 믿을 만한 친구지요.

나와는 태어난 날은 다를지라도, 죽는 날을 함께하자고 맹세한 사이지요.

여지껏 비밀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속을 털어놓은 사이란 말예요…….

모가지를 내놓고 싸우려는 마당에 아무래도 윤병철 그 자식에게만은

비밀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아서요…….”

윤병철이라면 김두한도 잘 알고 있었다.

경마장을 중심으로 노는 건달이었다.

훤칠한 키에 생김새도 잘생겼지만,

발길질의 명수라는 말도 들었다.

김두한도 발길질의 명수였지만 발길질에 관한 한,

윤병철도 뒤질 것이 없으리라는 소문이었다.

키가 크고 다리가 길어서 그의 편이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는 평까지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을 열고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가 신뢰감도 없었다.

“그러니 내 혓바닥이 뽑히기 전에, 차라리 윤병철을 끌어들이면 어때요?”

김두한은 묵묵히 듣기만 했을 뿐,

섣불리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일이 일이니만큼 쉽게 단안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장 믿을 수 있는 의리의 사나이기도 하구요…….

누구보다도 쪽발이놈을 미워하고도 있구요.

아, 시구문패의 몇몇 형님이 혼마찌깡으로 넘어간 것을 알고

혼자서 박살을 내겠다고 굉장히 설쳐댔었지요.

주위에서 말려서 주춤하기는 했지만,

이게 모두 일본놈에게 나라를 빼앗긴 서러움이라고 엉엉 울기까지 했었으니까……,

일본놈 망하게 하는 일이라면 목숨을 걸고 앞장설 친구란 말예요.

형님, 윤병철을 끌어들입시다.

형님도, 몇몇 믿을 만한 놈을 더 고르겠다, 하시지 않았어요?”

시구문돼지는 얼굴까지 벌겋게 상기되어서 역설을 했다.

그러나 팔짱을 끼고 앉은 김두한은 입을 굳게 다문 채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게다가 그는 처가가 일산 쪽이어서 그쪽의 지리에도 밝을 테고,

만약 그가 주둥아리를 놀린다면 그의 혓바닥을 뽑기 전에, 내 혓바닥부터 뽑으세요.”

김두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팔짱을 풀었다.


윤병철은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시구문돼지만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형님! 그게 싫으시다면 아예, 지금 당장 내 혓바닥을 뽑으세요.”

시구문돼지는 허연 백태가 낀 혓바닥을 뽑아 내휘둘러 보이는 것이었다.

“허어! 아서, 아서! 동생이 정 그렇게 장담한다면 내일이라도 윤병철을 데려와보지, 뭐.”

“고맙습니다, 형님!”

“고마울 것 없지, 목숨 하나를 내게 맡기는 것이니까. 자아,

오늘은 우리가 새로 ‘돌격대’를 조직한 날이니까, 내가 한턱 톡톡히 내지.”

김두한은 옷에 묻지도 않은 먼지를 툭툭 털듯 하며 자리에서 먼저 일어섰다.

돌격대라고 하면, 요즘의 감각으로 하면 어울리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결사대란 말이 좀더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결사대란 단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돌격대란 말 속에 결사대란 뜻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돌격대라고 조선말로 말한 것이 아니라,

일본말로 ‘도쓰게끼따이’라 한 것이다.

김두한도 그렇게 말했고,

다른 사나이들도 당연한 것쯤으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침략자인 일본에 저항 운동을 하기 위한 결사대를 조직하면서

일본말인 도쓰게끼따이라 하다니,

아이러니한 것 이상으로 요즘 사람들은 빈축을 금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세대가 그러했던 것이다.

당시 아이들도 전쟁놀이를 즐겨 했지만,

일본말을 알 까닭이 없는 어린이들까지도 막대기를 들고 앞장서서 달려가는

소년은 ‘도쓰게끼’를 외쳐댔던 것이다.

어찌 됐든 일본군의 비밀 지하 탄약고를 폭파하겠다는 결사대로서의 돌격대가 결성된 것이다.

이날 네 사나이의 돌격대들은 일류 요정인 명월관으로 가서 밤늦도록 진탕 마셨다.

김두한은, 정말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후하게 마시게 한 것이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서 어느 누구도 비장하다거나 심각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돌격대라든지 탄약고에 대한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저 평상시와 다름없이 서로의 우정만을 다짐하면서 즐겁게 마셨을 뿐이다.

다음날, 네 사나이의 돌격대는 5명으로 늘어났다.

김두한과 망치·종로꼬마 등이 삼청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간 사이,

 시구문돼지가 어김없이 윤병철을 데리고 온 것이다.

“내 목에 칼이 들어가도 입 밖에 내지 않겠어요.”

윤병철이 목숨을 걸고 맹세한 것은 물론이었다.

이날로 종로꼬마와 시구문돼지,

일산 방면의 지리에 밝다는 윤병철은 비밀 탄약고의 소재지를 탐색하기 위해 수색 쪽으로 떠났다. 종로꼬마의 의견대로 천렵꾼을 가장했다.

망치는 역시 야맹증이 심해 만약을 위해 제외되었다.

남은 두 사나이들은 새로운 돌격대원의 물색에 나섰다.

제일 먼저 대원으로 끌어들인 것은 문영철이었다.

아무리 노모를 모시고 있고,

단란한 가정 살림을 이끌고 있다고는 하지만,

문영철은 열 살도 되기 이전부터의 친구가 아닌가.

힘도 힘이지만 가장 미더운 친구가 아닌가.

그에게 일언반구도 건네지 않고 거사를 한다는 것은,

오히려 자기 자신이 그에 대한 배신이 될 것만 같았다.

김두한이 문영철을 선택하는 데는 망치의 입김도 컸다.

“앓는다고 모두 죽는 것은 아니지 않아?

두한이 넌 왜 처음부터 일이 실패할 것만 생각하지?

사전에 일이 발각나고 거사 후에 사건이 반드시 탄로날 것이라고 생각하면,

아예 일을 벌이지 않는 편이 낫지.

쥐도 새도 모르게 일을 해치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노부모를 모시고 있는 것이 무슨 걱정이고 애인을 두고 있으면 무슨 상관이냔 말야!”

망치의 말은 과연 이치에 맞았다.

일이 일이니만큼 너무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협객을 자처하는 주먹패들이 언제 죽음을 두려워하고,

감옥에 갈 일을 염려했었단 말인가.

부모를 모시고 가정을 돌본다는 것도 물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조직 앞에서는 사사로운 일이 아닌가.

그것은 사정(私情)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일일이 사정에 매달리고서 가시밭길의 주먹패에 몸담고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사사로운 감정을 갖고 어떻게 주먹패의 두목으로서 조직을 이끌어갈 수 있단 말인가.

김두한은 침략자 일본과의 투쟁이라는 대의명분 앞에서 마음을 보다 더 모질게 먹기로 결심했다.

“영철아, 너 나와 함께 죽자 하면 죽어주겠지?”

그는 문영철만 따로 가찌도끼 바의 안쪽 으슥한 별실 안으로 불러들여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김두한의 표정이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여 문영철은 이에 압도라도 당한 듯 처음에는

입도 열지 못했다.

그러나 김두한의 작은 눈이 예리하게 쏘아보는 시선과 맞부딪치자

그는 오히려 당황한 듯 말했다.

“두한아, 거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걸 말이라고 하냐?

처음부터 죽고 살기를 같이하자 한 몸이지 않냐?

같이 죽자 하면 죽을 것이요,

아니 두한이 너 대신 죽어달라 해도 죽어줄 테다.”

“고맙다. 넌 역시 도쓰게끼따이 대원이 될 자격이 있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눈을 슴벅거리는 문영철의 손을 덥석 잡고 김두한은 기쁜 듯이 말했다.

이내 그에게 비밀 탄약고 폭파 작전의 계획을 소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아니, 여기서 내가 빠진다면 평생 한이 될 일이지, 억울해서 견딜 일이냐?”

결사대원으로서의 돌격대는 여섯으로 늘었다. 이제 나머지 한 명만 더 물색하면 된다.

이제까지의 6명만 가지고도 대단한 역사(力士)이며 모사꾼들이라 충분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쩐지 7이란 숫자에 길운이 있을 듯싶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누구로 해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