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8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05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8

 

 

 

청진동 해장국집을 먼저 나온 김동회는 우메하라 양복점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혼마찌깡으로 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하지 않았는가.

결의가 식기 전에 부딪쳐야 한다고 오히려 서두르는 마음으로 혼마찌깡에 당도했으나,

역시 마음은 지명 수배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어수선했다.

“웬일이지, 이렇게 느지막한 시간에? 오늘 아침엔, 도장(고따마 체육관)에도,

가게(우메하라 양복점)에도 들르지 않았다면서?”

그를 맞은 것은 하야시의 처남 오까무라였다.

주먹의 힘은 쥐뿔만큼도 없으면서,

두목의 처남이라는 위치와 혼마찌깡의 살림을 도맡고 있다 해서

말발이 센 오까무라가 사뭇 아랫사람을 나무라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것이 오늘에만 한한 일이 아니기에 이미 익숙해 있었으면서도

어쩐지 껄끄럽게만 들렸다.

(하지만 너의 지시를 받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평소보다도 공손히 대답했다.

“저어, 일이 좀 있어서요. 그래서 형님께 직접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그렇지 않아도 형님께서 당신을 찾으셨단 말야.”

오까무라는 무엇엔가 화가 난 사람처럼 내뱉고는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두목이 무슨 일로 찾았단 말인가.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때가 때이고,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가슴이 더욱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잠시 후, 오까무라가 다시 나왔다.

“곧 오실 터이니 골방에서 기다려.”

김동회는 다시 한 번 가슴이 철렁했다.

하야시를 골방에서 만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부하들을 거실에서 만나는 일은 없었다.

대개 응접실 격인 ‘도꼬노마’에서 만났다.

그가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도꼬노마를 피하고 골방에서 부하를 만나는 것은

극히 개인적인 비밀 지령을 내릴 때나 부하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할 때뿐이었다.

부하들에게 사려가 깊은 하야시는 부하를 나무라고 훈계할 때에도,

본인의 자존심을 존중해서 되도록 다른 부하들의 이목을 피해 골방에서

단독으로 만나는 것이 통례였다.

워낙 말주변이 좋아,

누구든 그의 훈계를 들으면 감동해서 눈물을 흘리곤 하는 것이었다.

(벌써 무슨 기미를 알아차린 것일까?)

김동회는 불안한 마음으로 골방으로 먼저 들어갔다.

다다미 여섯 장을 깐 좁은 방이었다.

방 안에 방석이 단 두 개 놓여 있었다.

그것이 마치 피고석과 피고를 단죄하려는 재판관의 자리만 같았다.

그는 아랫목 쪽의 방석에 일본식으로 무릎을 꿇고 정좌를 해서 앉았다.

너무나 조마조마한 심정이어서 그는 자기도 모르게 손톱을 입으로 물어뜯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잠시 후, 하야시가 들어서면서 말했다.

생각보다 사뭇 부드러운 표정이며 말투였다.

김동회는 그 우아한 표정이나 말투가 오히려 거북하다고 느끼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 앉지.”

 

“자리에 앉지.”

상좌에 앉은 하야시가 말했다.

일장의 훈계를 할 것 같지 않은 온화한 표정인 것은 다름없었다.

웃는 낯에 침은 못 뱉는다던가.

김동회는 어떻게 이 상전에게 결별을 선언해야만 하는가,

미상불 난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말해야만 한다.

혼마찌깡을 떠나야겠다고 말해야만 한다.

그러나 마음만 조급할 뿐 어디서부터 말머리를 꺼내야 할까,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그러는데 하야시 편에서 먼저 운을 뗐다.

“참으로 난처한 일이 생겼어.

아주 질이 나쁜 살인 사건이 일어나서 말야.”

하야시의 눈이 야릇하게 번뜩였다.

김동회의 가슴이 섬뜩했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범행이 발각당한 것만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어젯밤, 송채환으로부터 살인 사건에 관한 얘기를 언뜻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살인 사건이 있었던 것인지 자세히는 몰랐다.

그러나 그 사건이 마치 자기 자신이 공모의 관계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하필이면 헌병 보조원이 피살되어서 말야.”

“어디서 말입니까?”

자기 자신이 번연히 범행 장소나 사건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딴전을 부리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경성역 쪽……, 남대문 뒷길 골목 안에서.

헌병대와 경찰서가 발칵 뒤집혀서 속속 용의자를 잡아들이고 있으나,

아무런 단서를 못 잡은 모양이야.

당국에서는 우리에게까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지 뭐야.”

“설마 하니, 우리 애들이 그런 짓거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형님도 모르는 사건을 저지를 수가 있겠어요?”

“그러게 말야. 아무리 우발적인 범행이라 하더라도,

난 우리 애들의 소행이라고는 믿지 않지.

아무래도 저쪽 아이들의…….”

턱으로만 가리킨 저쪽이란 청계천 건너의 종로패,

즉 김두한패를 가리키는 것은 물론이었다.

김동회는 자기 자신도 관련된 범행이 점점 압축되어 탄로되는 것만 같아

당황한 듯이 하야시의 말을 가로챘다.

“종로패의 범행이라니 당치도 않죠.

그들은 그런 서투른 짓은 하지 않는단 말예요.

사람을 치는 방법과 기술을 알고 있는 자들이어서요,

섣불리 사람을 죽게 하지는 않지요. 게다가…….”

“게다가 또 뭐가 있단 말야?”

“그들은 우리들과 신사 협정을 신의 있게 지키고 있단 말예요…….

남대문패나 서소문의 다께다구미패하고도 약속을 지키고 있어,

절대로 그쪽 나와바리를 침범하고 있지 않아요.”

“으흠.”

하야시는 우선 긍정의 뜻인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치 노여움을 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치듯 말했다.

“우메하라! 너란 놈은 도대체 우리 패냐, 김두한패냐?”


김동회는 무릎을 꿇고 앉은 자세 그대로, 하야시의 얼굴을 흘끗 쳐다보았다.

머리에 기름을 번드르르하게 바른, 언제나처럼 단정한 모습은 정말 화를 내고 있는 것인지,

짐짓 화를 내고 있는 듯 꾸미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 자신이 너무 흥분하고 긴장되어 있는 탓에 판단이 흐려진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채로 그는 화제가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제부터 자신의 심중을 토로하여 혼마찌깡과 결별하겠다는 결의를 두목의 편에서

편리하게 유도해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 것이다.

그러면서, 김두한 앞에서 이제 죽든 살든 김두한패라 다짐했던 말이

새삼 진하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었다.

“핫(넷)!”

그는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이마가 닿도록 머리를 숙였다.

“형님! 용서해 주십쇼.

난 형님의 은혜만큼은 한 번도 잊은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형님과의 의리를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형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는 이제 김두한패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 기회에…….”

“뭐라고?”

하야시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평소에 조용조용 말하고,

조용한 가운데 설득력 있게 자신의 심중을 토로하여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그가 이처럼 소리를 지르며 감정을 노출시키는 일은 없었다.

김동회의 목소리가 자라목처럼 쑥 들어갔다.

무서워서 두목의 얼굴을 쳐다볼 수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이 아닌가.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었다. 기왕 뽑아든 칼인 것이다.

죽든 살든 맹목적으로 칼을 내휘두르는 기분으로 기어이 말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형님께 용서를 비는 것입니다.

형님과의 형제의 의리는 결코 저버리지 않겠지만,

이 기회에 저를 혼마찌깡에서 풀어주십쇼.”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린 김동회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두목의 거친 숨소리에서 자기도 모르는 자위 본능(自衛本能)이 작동한 것이었다.

일본옷 차림의 넓은 옷자락 사이에 품고 있던 단도라도 날아올 것만 같아서였다.

“기사마(네놈),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는 건가?”

하야시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형님의 품에서는 결코 떠나지 않겠지만, 혼마찌깡패로부터는 떠나겠습니다.”

이렇게 된 이상, 말을 골라가며 선택할 필요도 없었다.

분명하게, 너무나 분명하게 직선적으로 선언해 버렸다.

“나를 배반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한다는 것을 알려주었을 텐데?”

하야시는 분에 못 이기는 듯, 뒤틀린 목소리로 내뱉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형님을 배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님과의 의리를 평생 지켜 나가겠습니다.

다만, 혼마찌깡에서만 떠나는 것뿐입니다.”

결연히 말하고 난 김동회는 허리춤에 품고 있던 단도를 꺼내 하야시 앞에 내미는 것이었다.


"다시 한 번 형님께 용서를 빕니다.

이 단도는 형님께서 직접 저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나의 호신용이 아닌, 형님을 배반했을 때의 셋뿌꾸용으로 주신 것이지요.

하지만 전 어디까지나 형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 

"앞으로도 형님에의 의리를 저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스스로 배를 가를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혼마찌깡패에서 떠난다는 것이 형님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면,

차라리 형님께서 절 찌르십시오.”

김동회는 하야시 앞으로 단도를 조금 더 밀어놓으며 무릎걸음으로 다가들었다.

그러나 다가들었다 하지만, 무릎이 앉아 있던 방석 밖으로 비어져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야시는 김동회가 마치 전신으로 육박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상체를 뒤로 소스라뜨렸다.

“네 결심이 그런 거라면 할 수 없지. 널 놓기는 아깝지만, 난 큰 실수를 했어.

인주를 갖고 놀면 빨갛게 되게 마련인 것을…….

김두한패에 너무 깊숙이 빨려 들어가게끔 내버려둔 것이 내 실수였어.”

하야시는 고통스러움을 억지로 참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형님, 염치없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동회는 다시 두 손을 짚고 머리를 숙였다.

“그 단도는 다시 넣도록 해! 네가 나와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면,

아직도 그 단도는 유용한 것이니까.”

“형님! 고맙습니다.”

김동회는 정말 일본 사람처럼, 허리를 깊숙이 숙이더니

단도를 다시 주워 품속에 챙겨넣는 것이었다.

하야시는 그러한 김동회를 서운한 것 이상의 억울해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점, 하야시는 일본 야꾸자답게 담백했다.

속으로는 정말 김동회에게 배신을 당한 것 이상의 굴욕을 느꼈다.

정말 죽이고 싶은 증오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냉정한 사나이였다.

김동회 하나쯤 없애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는 것이다.

굳이 제 손으로 손을 더럽힐 것까지도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를 없앤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혼마찌깡에서 풀어주는 대신,

그를 김두한패 깊숙이 박아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슬러 그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그 경황 속에서도 거기까지 계산하는 사나이기도 했다.

“사실은 이번 헌병 보조원의 살인 사건이 아무래도 김두한패의 소행인 것만 같아,

깊숙이 파고들어 동정이나 살피라고 지시할까 했더니 이건 영 반대로,

김두한패에게 널 빼앗기고 말았구나.”

“여쭐 말이 없습니다.”

“남쪽 새는 남쪽 가지에 앉는다더니…… 할 수 없는 일이지.”

하야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끔 찾아오는 것은 잊지 말고…….”

하야시는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덧붙였고,

김동회는 눈물까지 글썽해진 눈으로 하야시를 우러러 바라볼 뿐이었다.

"다시 한 번 형님께 용서를 빕니다.

이 단도는 형님께서 직접 저에게 선물한 것입니다.

나의 호신용이 아닌, 형님을 배반했을 때의 셋뿌꾸용으로 주신 것이지요.

하지만 전 어디까지나 형님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 

"앞으로도 형님에의 의리를 저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때문에 저는 스스로 배를 가를 이유가 없지요.

하지만 혼마찌깡패에서 떠난다는 것이 형님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면,

차라리 형님께서 절 찌르십시오.”

김동회는 하야시 앞으로 단도를 조금 더 밀어놓으며 무릎걸음으로 다가들었다.

그러나 다가들었다 하지만, 무릎이 앉아 있던 방석 밖으로 비어져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하야시는 김동회가 마치 전신으로 육박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상체를 뒤로 소스라뜨렸다.

“네 결심이 그런 거라면 할 수 없지. 널 놓기는 아깝지만, 난 큰 실수를 했어.

인주를 갖고 놀면 빨갛게 되게 마련인 것을…….

김두한패에 너무 깊숙이 빨려 들어가게끔 내버려둔 것이 내 실수였어.”

하야시는 고통스러움을 억지로 참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형님, 염치없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김동회는 다시 두 손을 짚고 머리를 숙였다.

“그 단도는 다시 넣도록 해! 네가 나와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라면,

아직도 그 단도는 유용한 것이니까.”

“형님! 고맙습니다.”

김동회는 정말 일본 사람처럼,

허리를 깊숙이 숙이더니 단도를 다시 주워 품속에 챙겨넣는 것이었다.

하야시는 그러한 김동회를 서운한 것 이상의 억울해하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점, 하야시는 일본 야꾸자답게 담백했다.

속으로는 정말 김동회에게 배신을 당한 것 이상의 굴욕을 느꼈다.

정말 죽이고 싶은 증오감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디까지나 침착하고 냉정한 사나이였다.

김동회 하나쯤 없애려면 앞으로도 얼마든지 기회가 있는 것이다.

굳이 제 손으로 손을 더럽힐 것까지도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를 없앤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라고도 생각했다.

혼마찌깡에서 풀어주는 대신, 그를 김두한패 깊숙이 박아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구슬러 그를 이용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그 경황 속에서도 거기까지 계산하는 사나이기도 했다.

“사실은 이번 헌병 보조원의 살인 사건이 아무래도 김두한패의 소행인 것만 같아,

깊숙이 파고들어 동정이나 살피라고 지시할까 했더니

이건 영 반대로, 김두한패에게 널 빼앗기고 말았구나.”

“여쭐 말이 없습니다.”

“남쪽 새는 남쪽 가지에 앉는다더니…… 할 수 없는 일이지.”

하야시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그래도 가끔 찾아오는 것은 잊지 말고…….”

하야시는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덧붙였고,

김동회는 눈물까지 글썽해진 눈으로 하야시를 우러러 바라볼 뿐이었다.

깊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길다운 길도 없었지만, 길도 밭도 구분이 되지 않았다.

달도 없는 깊은 야반, 희뿌연 하늘에 남쪽으로 쏠린 별빛만이 유난히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바윗등 뒤에 웅숭그리고 기대앉은 김두한은 숨소리를 내는 것도 조심스럽다는 듯

소리를 죽인 긴 한숨을 내뱉었다.

“자아식, 되게 재수 없는 놈이야.”

바윗등에 찰싹 붙어 앉아 있는 작은 몸집이 그대로 바위의 일부분이기나 한 것 같은

종로꼬마 이상욱이 역시 소리를 죽인 목소리로 말했다.

김두한은 이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제 죽게 될 일본군 병사를 두고 하는 말이려니 했다.

이런 긴장된 순간에 그런 여유 있는 농담을 할 수 있는 종로꼬마의 무감각할 정도의

배짱에 좀 어이없는 기분마저 들었다.

“누가 말야?”

김두한을 대신해서 물은 것은,

어둠 속에서 또 하나의 작은 바윗덩어리만 같아 뵈는 문영철이었다.

“망치놈 말야!”

종로꼬마는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이고 나서 소리내어 낄낄거리며 웃었다.

망치가 심한 야맹증이어서 이 신나는 싸움에 참가할 수 없게 된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쉿!”

김동회가 제지를 했다.

호박밭을 헤치며 다가오는 검은 물체와도 같은 두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허공의 어둠보다도 더 짙은 어둠의 빛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움직이는 물체라기보다,

야차(夜叉)와 같은 들짐승만 같았다.

어둠 속에서도 용케 보일 것이 보이는지,

호박 덩굴을 헤치고 들쥐처럼 소리 없이 달려오고 있었다.

확인할 것도 없이 정진영과 윤병철, 거기에 시구문패의 돼지였다.

수표교 다리 밑에서 뱀탕 장사를 하면서 고문(高文: 고등고시)에 응시하겠다고

독학을 하는 정진영에 대해서는 자주 언급을 했지만,

시구문패 돼지와 윤병철에 대해서는 잠깐 언급해 둘 필요가 있겠다.

시구문패 돼지는 이미 잠시 등장한 일이 있지만,

그는 뚝섬 유원지에서 한가락 하던 왈패였다.

김두한보다 나이는 한두 살 아래로 거무튀튀한 얼굴이 길고 큰 편이었으며

입술이 두꺼워 돼지라는 별명이 붙었다.

평소에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한번 성질이 났다 하면 성격이 포악해지고 난폭했다.

엄씨 성에, 물론 이름도 있었겠으나 그저 시구문돼지로 통했다.

윤병철은 동대문 밖 신설동 경마장 주변의 알아주는 걸인으로,

몸이 크고 날씬하면서도 발길질의 명수여서 손을 쓸 것도 없이 발길질 하나만으로

어지간한 놈 몇은 한꺼번에 상대할 만큼의 실력자였다.

“돼지냐? 여기야!”

김두한은 나직한 목소리로 자신의 소재를 알려주었다.

“응…….”

뒤늦게 쫓아온 세 사나이가 암탉의 품으로 뛰어드는 병아리 떼처럼 검은 바위 등뒤로 몰려들었다.

7명의 사나이들. 이제 죽느냐, 죽이느냐의 결사적인 결전장에 모두들 예정된 시각에 맞춰

어김없이 모여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