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6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03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6

 

 

 

“그럼, 이따 만나지?”

그는 마주 대답하면서 자신의 젊음이 부쩍 바빠질 것을 예감했다.

그러나 이 다망(多忙)은 얼마나 화려하고 환희에 찬 것인가.

그는 전혀 피곤한 것을 모르는, 뜀박질이라고 하고 싶은 기분으로 송채환의 집을 나왔다.

삼선교에서 전차를 탔다.

우메하라 양복점이나 혼마찌깡으로 가려면 의당 황금정 4정목(을지로 4가)까지 가야만 한다.

그러나 종로 4정목에 이르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전차에서 내렸다.

무슨 기분에서인지 양복점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혼마찌깡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시간이 늦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 전에 무엇인가 할일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할일이란 것이 무엇인지 전혀 머리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 채로 그의 걸음은 우미관 골목으로 향했다.

가찌도끼 바로 갔다.

조무래기 주먹패들이 스멀거리고 있을 뿐,

김두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한이는?”

김동회는 상길에게 물었다.

그러면서 무엇인가 할일이 있은 듯이 생각되었던 것이야말로

김두한을 만나는 일이었던 것처럼 생각되었다.

“아직 안 나오셨어요.”

“그럼 좀 기다리지. 어디 계신데?”

그러나 상길이 대답할 필요는 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을 하면 나타난다던가.

마침 김두한이 거구의 몸으로 입구를 막듯이 하고 들어선 것이다.

“야, 동회! 너 웬일이냐? 낮부터?”

김두한의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김동회가 가찌도끼 바에 나타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가 이른 낮 시간에 모습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그도 양복점이며 혼마찌깡의 일로 바쁜 몸인 것이다.

그가 낮 시간에 나타나는 것은 대개 하야시의 심부름으로 중대한 용건을 지니고 있을 때였다.

김두한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인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응, 나…… 두한, 너에게 중대하게 할말이 있어서 말야…….”

“응, 그래?”

김두한은 으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김동회를 이끌고 별실로 갔다.

별실 안에 있던 조무래기 주먹패들이 벌떡 일어나서 고개를 숙이며 뿔뿔이 흩어졌다.

“무슨 일이야?”

김두한은 어떠한 중대한 용건이라도 미리 각오하고 있다는 듯이 입술을 꽉 다물었다.

김동회는 그 간단한 물음에 말이 막혔다.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언제까지 망설이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그 자신, 결투를 각오하는 듯한 엄숙한 표정으로,

그러면서도 말투만은 건달패 특유의 장난기를 담고 말한 것이다.

“두한아, 미안해! 나, 아께미를 먹었어.”

먹었다는 말은 치졸한 표현이지만,

주먹패들이 항용 사용하는 직선적인 표현으로,

여자를 자기 것으로 가졌다는 뜻인 것이다.

“뭐라구?”

순간, 김두한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김두한의 작은 눈이 별실 안의 어둠침침함 속에서 번뜩이는 것이 보였다.

이마에 지렁이 같은 심줄이 돋아나는 것만 같았다.

“아께미를 먹었다구? 언제?”

목소리도 물어뜯는 듯했다.

김동회는 김두한의 주먹이 날아들 것을 각오했다.

주먹 한두 방쯤은 맞아주리라고도 생각했다.

송채환을 차지한 대가로의 주먹 한두 방쯤은 너무 싼 편인 것이다.

“어젯밤에.”

그는 힘도 들이지 않고 대답하고는 어금니를 짓깨물었다.

날아들 주먹에 대비한 것이다.

그러나 김두한의 주먹은 날아들지 않았다.

“어젯밤에?”

천만뜻밖이란 듯 되물었을 뿐이다.

그로서는 정말 천만뜻밖의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어젯밤에는 술에 취한 홧김에,

송채환의 얼굴에 물통째로 물을 쏟아 부었다.

송채환은 울부짖으면서 방을 뛰쳐나갔었고,

김두한 자신은 김동회를 포함한 망치·김무옥 등과 함께

2차, 3차로 자정 가까운 시간까지 마시고 다녔었다.

그 자리에는 분명 마지막까지 김동회도 함께 있었는데

언제 어느 결에 송채환을 만나 ‘먹을’ 사이가 있었단 말인가?

“응, 어젯밤에……. 너와 낙원 회관 앞에서 헤어진 후…….”

김동회는 변명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자초지종을 말하기 시작했다.

사실, 주먹패들 사이에서는 술집 여자 하나쯤 ‘먹는’ 것은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우쭐거리는 어디 골목대장 하나쯤을

주먹 한두 방으로 곱게 잠재운 사건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때문에 주먹패들은 누구나, 어떤 여자 하나를 ‘먹고’ 나면 주먹 자랑하듯

자랑하는 얘깃거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우, 사정이 다른 것이 아닌가.

여자가 가찌도끼 바의 송채환인 것이다.

그녀는 가찌도끼 바의 여왕인 셈이었다.

더구나 종로패의 두목 김두한이 눈독을 들여온,

오죽했으면 그녀에게 물세례까지 퍼부었을 것인가.

송채환이 김두한의 여자는 아니라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 김동회가,

김두한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여자를 감히 꺾다니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모험이었던 것이다.

김동회 자신이 김두한에게 사과하듯이 말하고,

주먹이 날아들 것까지 각오했던 것은 그런 연유로서였다.

삼선교에서 나오자마자,

자기 양복점으로도 가지 않고 혼마찌깡에도 들르지 않고,

곧바로 관철동 골목으로 찾아든 것도 이 때문이었다.

김두한의 양해를 구하지 않고, 그대로 숨기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야, 너 정말 빠르구나!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다더니 너야말로…….”

김두한은 김동회의 말에 자초지종을 들으면서 시시각각으로 표정이 변하더니,

마침내 괴로운 듯이 내뱉었다.

“……할 수 없지. 아께미는 이제 네 여자야.”

내뱉는 김두한은 어쩔 수 없이 쓸쓸한 패장이었다.


억울함을 가까스로 참는 듯한 볼멘 목소리이기는 했다.

그러나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주먹 한 방이 날아들 것쯤으로 각오하고

어금니를 짓깨물고 있던 김동회는 어쩐지 가슴이 뻐근해 오는 듯한 감격을 느꼈다.

김두한에게 고마운 것 이상의 미안함을 느꼈다.

“나도 몰라. 어떡하다 그렇게 되었어.”

그는 사과하듯 중얼거렸다.

“아께미가 널 좋아하고 있었던 모양이지?

그것도 모르고 눈치코치 없이 염치없게 군 꼴이 되었지 뭐야. 헛헛.”

김두한은 꼬리가 잘린 웃음을 웃었다. 여전히 쓸쓸한 웃음이었다.

“두한아, 고맙다.”

더 이상 다른 말을 덧붙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는 그의 진정이었다.

남자의 도량에 고마움을 느낀 것이다.

김두한이 송채환에게 기울인 관심도가 어느 만큼의 것이었고,

그의 그녀를 향한 마음이 어느 만큼 경도되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남자끼리의 우정 앞에 한마디로 웃어넘길 수 있는 도량에 탄복하고 고마움을 느낀 것이다.

“자아식, 고맙긴 뭐가 고마워? 저희끼리 눈이 맞아서 붙은 건데 뭐가 고마워? 핫핫핫…….”

이번에는 꼬리가 잘린 웃음이 아닌 너털거리는 웃음을 홀 안 가득히 울려 퍼지도록 웃어넘겼다.

그 웃음 하나로 쓸쓸함도 서운함도 날려 보낼 듯한 웃음이었다.

여자 하나에 쩔쩔매고 매달리지 않는, 남자의 우정을 보다 소중히 여기는

대장부의 비단 보자기와 같은 넓은 마음의 호쾌한 웃음이었다.

(정말 좋은 놈이다!)

김동회는 송채환이 이처럼 남자다운 남자를 제쳐놓고

자기에게 마음을 두었다는 것이 오히려 불가사의한 일로 생각되었다.

두 사나이는 더 이상 송채환의 일로 말을 나누지 않았다.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구. 하지만 오늘은 네가 한턱 내야 해.”

이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때마침 들어선 김무옥·문영철·망치 등을 이끌고 가찌도끼 바를 나왔다.

김동회는 지금의 신세계 백화점 뒤, 아사히마찌라 불렸던 회현동의 기라꾸란 집으로

일행을 끌고 갔다.

기라꾸는 조선에서 ‘스끼야끼(일본식 쇠고기 전골)’가 제일 맛이 좋다는,

평양의 세기헤키를 방불케 하는 맛을 내는 그 방면의 전문 업체였다.

옛날보다는 사뭇 대중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값이 비싼 일식집이었다.

김두한이나 김동회도 그러했지만,

김무옥·문영철·망치 모두가 깜짝 놀랄 만큼의 대식가들이었다. 

설렁탕 곱빼기 다섯 그릇을 보통 사람이 보통짜리 한 그릇을 먹는 사이에

게눈 감추듯 먹어치우는 대식가란 말은 이미 소개한 대로다.

워낙 손이 작은 일본인들 취향의 작은 그릇의 스끼야끼는 처음부터

한 사람 몫이 5인분, 6인분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주인인 대머리 영감이 다른 손님에게 내놓을 것이 없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걱정할 정도였다.

“야, 동회야! 너 꽃값 한번 되게 치르는구나.”

김두한의 얼굴에 구김살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날 기라꾸의 향연에서는, 그들 주먹패들의 표현을 빌리면

아께미가 김동회에게 ‘찍혔다’는 사실이 김두한에 의해 일동에게 피력되었다.

“햐아! 대단한 솜씬데…….”

“빠르군 빨라!”

망치건 김무옥이건 한마디씩 했다.

아께미라고 하면, 가찌도끼 바의 하나가다(꽃)라 했다.

우락부락한 성격의 사나이들이지만 아름다운 여자를 모를 까닭이 없었다.

나름대로 눈독을 들였거나 은근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었다.

그런데 종로패도 아닌 그가 나타나서,

자기네들도 모르는 사이에 감쪽같이 찍어버렸다니 놀라운 사실이었다.

솔직히 이들의 찬탄에는 놀라움 이상의 시샘이 없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샘은 시샘대로 거기서 끝났다.

이미 어느 여자가 같은 주먹패의 손에 찍혔다면,

모두가 거기서 기정사실화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만큼 이들은 단순했고 그것이 주먹패들의 남자끼리의 의리였다.

그렇다고 그 여자를 거들떠 쳐다보지도 않는다거나 백안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더 위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물론 직업 여성이니까,

계속 술자리는 함께 하게 된다.

같이 술도 마시고 진한 농담도 한다.

그러나 아무리 옆자리에 앉게 되어도 몸에 손을 대는 일이란 없었다.

해괴망측하게 넓적다리를 만진다거나,

앞가슴을 더듬는 따위의 망동은 부리지 않았다.

그 여자는 어디까지나 동료의 여자인 것이다.

그 여자가 아우뻘 되는 동료의 여자면 ‘수씨’고, 형님이 되는 동료의 여자면 곧 ‘형수님’이었다.

송채환이 김동회의 여자가 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은 곧 종로패 모두에게 알려졌고,

그녀는 이들의 ‘수씨’고 좋은 ‘형수님’이 되었다.

이제 그녀는 공공연한 김동회의 여자로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그렇다고 삼선교의 그녀의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녀의 시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고 노발대발했기 때문이다.

김동회는 굳이 먼 삼선교의 그녀 집으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도 밤늦도록까지 술을 마시고 다녔지만,

송채환도 밤늦도록까지 술집에 남아 있어야 했다.

보통 자정을 넘겼다.

송채환은 김동회와 만난 후, 되도록 술을 삼가려고 노력했지만

그래도 한두 잔 손님에게 받아 마시는 술로 언제나 취하게 마련이었다.

그러면 대개 근처의 여관에 들어가 쓰러져 자게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이들의 동거 생활의 양상이었다.

그러다가 박계주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권유에 따라 그의 집에서 새살림을 하게 된 경위는 이미 자세하게 설명한 대로다.

이야기는 되풀이되지만, 바로 종로꼬마 이상욱과 망치가 헌병 보조원을 살해한 밤,

박계주에게 지독한 무안을 당하게 된 것이다.

일본패인 혼마찌깡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박쥐와 같다고 모욕을 준 것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송채환까지 혼마찌깡에서 발을 빼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 혼마찌깡에서 발을 빼기로 했어.”

마침내 토해 낸 김동회의 말 그 한마디가 무릎을 여는 암호 열쇠이기나 한 것처럼

둘은 맨바닥에 뒹굴었었다.

“그래, 혼마찌깡에서 발을 빼겠어! 그리고 말이지,

너의 남편의…… 일본 순사놈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너의 남편의 원수를 내가 갚아주지.”

김동회는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에 대한 보답이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힘주어 다짐하듯 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을 맨살의 그녀의 몸에 새겨넣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똑같이 맨살의 몸으로 깊이깊이 파고들었다.

송채환은 가냘픈 몸으로 분에 넘치는 산꼭대기까지 억지로 기어오른 여자처럼

가쁜 숨을 몰아쉬느라,

남자의 목에 감겨들 듯 매달렸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이른 새벽,

김동회는 언제나처럼 일찍 잠에서 깨어났다.

새벽 운동을 하러 가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때보다도 더 일찍 깬 듯싶었다.

그도 어쩔 수 없이 몸은 노곤했으나,

마음이 긴장되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송채환은 운신도 못 할 만큼 몸이 퍼져서 아직 잠들어 있었다.

그는 그녀의 잠들어 있는 모습을 조심스럽게 살피면서,

옷장 서랍 깊숙이에서 단도를 끄집어냈다.

칼자루를 움켜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도신(刀身)을 살펴보더니,

질끈 허리춤에 찼다.

바로 하야시로부터 선물로 받은 단도였다.

보신용이 아니라 배신했을 때의 자살용이라 했던 바로 그 단도였다.

그는 송채환이 깰세라 소리를 죽이면서 방을 나왔다.

“다녀오세요.”

송채환은 눈도 뜨지 못하고 말했다.

새벽 운동이 끝나면, 다시 집에 들렀다가 아침밥을 늘 함께 들었기 때문에

오늘도 으레 그러려니 생각했을 것이었다.

집을 나왔다.

첫 전차일 듯싶은 전차를 탔다.

승객이라고는 한 사람도 없는 전차가 마치 김동회 하나만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전차가 종로 4정목에 이르자,

그는 처음부터 미리 생각하고 있었기나 한 것처럼 전차에서 내렸다.

고따마 체육관으로 나가려면 당연히 황금정까지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체육관으로 나가고 싶지가 않았다.

이제 혼마찌깡에서 발을 빼겠다고 결심한 이상,

고따마 체육관과도 인연을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집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거기까지는 생각지 않았었으나,

갑자기 가기가 싫어져서 전차에서 내린 것이다.

그렇다고 우메하라 양복점으로 가고 싶지도 않았다.

혼마찌깡에서 발을 뺀다면, 고따마 체육관과 인연을 끊는 것보다

먼저 인연을 끊어야 하는 것은 우메하라 양복점이 아닌가.

이 양복점이야말로 하야시의 개인 소유, 개인 재산이며,

자신은 이를 책임지고 관리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자 양복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자기 자신이 그쪽으로 가고 싶지 않아진 것이 아니라,

체육관이나 양복점 쪽에서 자기를 거부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갑자기 따돌림을 당한 것처럼 막막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분명히 갈 곳이 있고 반드시 찾아가야만 할 곳이 있다고

문득 생각해 낸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관철동 조양 여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