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5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02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5

 

 

 

“기뻐요.”

젊음의 격정이, 젊음의 폭풍이 회오리치듯 지나간 다음,

송채환은 아직도 여신(餘燼)이 사그라지지 않고 불타는 듯한 생기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김동회는 그 한마디에 어떠한 반응을 보여야 할까 전혀 알지를 못했다.

그런 채로 건성 대답하듯 무책임하게 중얼거렸다.

“헛! 고맙군.”

그러면서도, 자기 대답이 땡, 하고 종소리와 같은 효과음을 내야 할 대목에서

툭, 하고 나뭇가지 꺾어지는 소리를 내고 만 것 같은 실수를 느꼈다.

“난 어차피 수절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래서, 얼른 내 몸을 빠개고 싶었어요…….”

울고 있지는 않았지만, 울고 있을 때와 같은 흐느낌이 섞여 있었다.

천근의 무게로 깊은 심연 바닥으로 가라앉아가는 듯한 김동회의 몸과 마음이 다시 붕긋,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필이면 왜 나와?”

그는 문득, 작은 눈의 김두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는 송채환을 좋아하고 있었고, 그녀를 탐을 내어왔음이 분명했다.

고분고분하게 말을 듣지 않는 그녀에게 오죽 화가 났으면 물벼락까지 내렸을까.

기왕 수절을 할 수가 없어 빨리 몸을 빠개고 싶었다면,

두목 김두한 쪽이 좋았을 것이 아니겠는가.

문득 그런 생각을 굴린 것이다.

“무슨 듣기 좋은 말을 원하시나요?

그저 좋았던 것뿐이라고 해두세요.

김두한에게 물벼락을 맞으면서,

분하고 억울하고 창피해서 죽어버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어디 그렇게 쉽게 죽어버릴 수 있는 건가요?

죽는 대신, 빨리 임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내 몸을 빠개갈 남자를…….”

“그러다가 우연히 나와 맞닥뜨리게 된 것인가?”

“공연한 입씨름을 할 것은 없구요…….

하지만 오늘 밤의 당신이,

당신이 아니었더라도 똑같은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당신이었던 편이 나에게는 큰 다행이었죠.”

“난, 그 다행에 감지덕지해야만 하겠군.

그런데…… 거, 그 아주머니가 시어머님이라면……, 남편은?”

물어서는 안 될 것 같으면서도 기어이 묻고 말았다.

그러나 송채환의 대답은 의외로 쉬웠다.

“내 기분이 구질구질해지지만……, 죽었어요.”

“허어…….”

“열일곱에 시집을 왔다가 1년을 살고 죽었어요.

왜 죽었느냐고 묻고 싶으시겠죠?”

그녀는 자기 자신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남의 일이기나 한 것처럼 덤덤히 말했다.

“후훗. 하긴 웃을 일이 아니지만요,

일본 순사놈과 싸우다가 죽었지요.

사실은 말이죠.

 일본 순사놈이 날 무척 좋아했거든요,

처녀 때부터. 정말 난 그때 이뻤단 말예요.

좋아했다기보다 추근거렸지요.

내가 시집간 후로는 더욱…….

그러한 어느 날 밤의 일이었어요."

 

"…그날 밤은 큰댁에서 제사가 있는 날이었죠.

남편은 큰댁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거든요.

나도 당연히 따라가야 했을 것이지만,

마침 집이 비어서……."
 
"……"
 
"아직 이른 초저녁이었는데,

그 일본 순사놈이 집이 빈 것을 알았는지 몰랐는지 쳐들어오듯 찾아왔지 뭐예요.

어찌나 놀랐는지, 그러나 놀랄 틈도 없었어요.

힘으로 밀어붙이면서 덮쳐드는 거였어요.

난 발버둥치며 아우성쳤어요.

그러나 집이 외진 편이고,

허전할 만큼 넓은 집이어서 아무도 달려와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송채환은 반듯하게 누운 채 남의 얘기하듯 말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김동회도 차츰 흥미를 느낀 듯

그녀 쪽을 주시하며 귀를 기울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남편이 돌아온 거예요.

큰댁 머슴하고 함께 말이에요.

아마도 머슴에게 집을 보게 하고 날 데려갈 작정이었던가 봐요.

나도 밑에 깔려 저항을 하느라고 남편이 돌아온 것을 몰랐지만,

날 겁탈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그놈도 남편이 돌아온 것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눈이 뒤집힌 남편은 마침 마루 뒤주 밑에 있던 다듬잇방망이를 들고,

버둥대는 순사놈의 머리통을 휘갈기는 것이었어요.

나는 너무 무서워서 소리를 질렀고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아니 뜨거운 것인지 차가운 것인지도 분간할 수 없는 것이 내 얼굴로 튀는 것을 느꼈어요.

난 눈이라도 머는 것 같은 환각을 느끼면서 눈을 꽉 감았지 뭐예요.

그 순간이었어요.

천지가 진동하는 것 같은 요란한 총성이 울렸어요.

총소리를 들어본 것이 그것이 처음이지만,

총소리가 그토록 굉장한 것인지는 몰랐어요.

온통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요란한 소리에 난 까무러졌어요.

깜빡 정신을 잃었다가,

그 소리가 무엇이었는가 본능적으로 깨달은 순간 난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 앉았어요.

그리고 난 너무나 무서운 광경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 순간에는 미처 깨닫지도 못할 지경이었어요.

온 방 안에 시뻘건 피를 쏟으며 나둥그러져 있는 것은 일본놈 순사가 아니라 바로 남편이었고,

일본 순사는 역시 얼굴에 온통 피를 흘리면서 허둥거리며 방을 뛰쳐나가고 있었어요.

뒤미처 큰댁 머슴이 뛰어들기는 했지만 그도 너무 놀라고 무서웠던지,

마치 제놈이 총을 쏘기라도 한 것처럼 후닥닥 튀는 것이었어요.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세요?”

“죽었는가?”

“뻔한 일이죠, 죽었어요.

남편은 그렇게 해서 죽었어요.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김동회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있었어도 대답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남편은 죽었지만, 그놈은, 그 일본 순사놈은 뭐, 정당방위라나 뭐라나로 풀려나서

병원에 며칠 입원했을 뿐 감옥에도 가지 않고, 다른 관할로 전근을 해 갔지 뭐예요.

불쌍하게 된 것은 내 남편과 청상과부가 된 내 신세뿐이지요.

아, 구질구질해! 모처럼의 기쁜 밤에 이런 꾸깃꾸깃한 얘기를 하려곤 하지 않았었는데…….

동회 씨! 나, 다시 한 번 기쁘게 해주시지 않겠어요?”

묵직한 기분으로 송채환의 얘기를 듣고 있던 김동회는

무거운 기분과는 달리 가뿐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렇지 않아도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무슨 말로 위로해 줄 수 있단 말인가.

그는 말보다 몸을 반전시켜 여체를 더듬었다.

그녀 역시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남자의 몸을 기분 좋게 받아 안았다.

김동회는 여자를 기쁘게 해주는 일이란 참 수월한 것이라고 새삼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여자를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얼마든지 되풀이할 수 있을 듯싶었다.

그는 그저 여자를 기쁘게 해주는 성실한 남자로서의 성의를 다할 뿐이었다.

송채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중량감(重量感)을 벅찬 감격으로 받아들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여자의 희열은 고통과 상통하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자칫 미간을 찌푸렸고,

뾰꼼하게 열린 젖은 입술 역시 고통을 호소하듯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그녀에게 주는 것이 희열이든 고통이든,

이를 심화시키는 것만이 자기 의무이기나 한 것처럼 박차를 가하면서

짓눌린 상태의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 여자가 정말 송채환인 것일까?)

이제까지 보고 익혀온 그녀의 얼굴은 전혀 아닌 것처럼 생각되었다.

항상 안경을 끼고 있던 여자가 안경을 벗었을 때처럼 눈언저리가

옴팍하게 들어앉은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숨을 빠르게 몰아쉬는 입술이 한결 도톰하게 보였다.

요컨대 얼굴 전체의 느낌이 푸석하게 퍼져 보이면서 생소하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이 여자가 정말 가찌도끼 바의 아께미인 것인가.

가찌도끼 바를 드나드는 뭇 건달패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는 그 여자인 것일까.

김두한의 노여움을 사서, 그로부터 물벼락을 맞은 그 여자인 것일까.

그리고 일본 순사놈의 총에 남편을 잃었다는 슬픈 과거를 지닌 그 기구한 여자인 것일까.

도저히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이 여자가 어떻게 자기를 기쁨으로써 받아주는 여자가 되었단 말인가.

어떻게 맨바닥에 뒹굴어 몸을 뒤섞는 사이가 된 것인가.

전혀, 전혀 딴 여자처럼만 생각되었다.

김동회는 원래 고향에 자기보다 두 살이 연상인 조혼한 아내를 두고 있었다.

아내 이외에도 함께 몸을 섞은 여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많았던 여자 가운데, 이 여자만큼의 의미가 있는 여자는 없을 듯싶었다.

적어도 자신의 앞날의 행로를 뒤바꾸어놓을 것만 같은…….

(그런 만큼 이 여자는 내게 소중한 여자다.)

송채환, 이 여자가 소중한 여자라면 이 여자를 향한 마음가짐의 전부,

몸가짐의 하나하나도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이를 자기 자신에게 일깨워주고, 그녀의 몸에 문신처럼 새겨넣어야 할 것처럼,

그는 전신에 기지개를 켜듯 힘을 주었다.

이에 화합하듯 가냘픈 여체 또한 전신으로 경련했다.

그 자신의 앞날을 뒤바꾸어놓을지도 모른다는 김동회의 예감은 이날 아침부터 적중했다.

그는 우선 일어나야 할 새벽 시간에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새벽마다 나가 하는 아침 운동을 빼먹고 하지 않은 것이다.

운동을 끝내는 길로 그는 언제나 우메하라 양복점에 들르는 것이 또한 일과의 시작이었다.

이노마를 비롯한 점원들에게 지시할 것을 지시하고 수배할 것을 수배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그는 양복점으로도 가지 않았다.

양복점에서 나오면 곧바로 혼마찌깡으로 향하는 것이 또한 가장 중대한 일과였다.

두목 하야시에게 아침 문안을 드리고 그의 지시를 받는 것이다.

그런 연휴에야 양복점의 거래처를 돌아보기도 하고,

틈이 나면 종로 쪽으로 발을 뻗어 김두한과 어울리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날은 혼마찌깡으로도 향하지 않았다.

그는 아침 늦은 시간까지 마음껏 게으름을 부린 것이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이불 속에 있었던 일은 없었다.

여자를 기쁘게 해주는 일이라면 몇 번을 되풀이해도 끄떡없을 듯싶었던 젊은 몸도

결국은 한계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붙이자마자 또다시 깊은 잠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가 잠을 깬 것은 무엇인가 쨍그렁, 그릇이 깨어지는 것 같은 소리로서였다.

그러나 잠결이었기 때문에 무슨 소리인지 전혀 알지를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미 일어나고 없는 옆자리를 허전한 듯 바라보았고, 아직까지도 드리워져 있는

모기장 밖으로 해가 머리 위까지 솟아 있는 것을 민망한 마음으로 내다보았다.

부엌 쪽에서 여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자고 있는 사람을 깨울세라

조심하고 있는 듯한 낮은 목소리는 송채환인 것이 틀림없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강한 좀 큰 목소리는 그녀의 시어머니일까.

심한 경상도 사투리는, 조용조용한 말투도 귀에 익지 않은 사람들에겐 싸우는 것처럼 들린다.

김동회는 무심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워낙 강한 사투리여서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두 여자가 실제로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닐까 생각했다.

그는 좀 난처한 기분이 들었으나, 이에 개의할 처지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이었다.

“난 모르겠다. 니 똥집대로 해. 난 그 꼴 못 본다.”

냅다 소리치는 목소리와 함께 쾅, 메다꽂듯 대문 닫는 소리가 났다.

시어머니가 노발대발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화를 냈다면, 무엇에 화를 낸 것일까.

그것은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처럼 여겨졌다.

분명, 김동회 그가 와서 잔 일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아들이 죽었고 며느리가 과부로 술집에 나가고 있다고 하지만,

외간남자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와 자는 꼴을 보고 노발대발하지 않을 시어머니가

어디에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어떡하면 되지?)

그러나 어떻게 하면 좋은가, 깊이 생각할 것은 없었다.

송채환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모습을 보였으니까.

“시끄럽게 굴어서 죄송해요.”

“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아무 일도 아녜요. 그저 늙은 과부의 젊은 과부에 대한 시샘이지요.”

송채환은 대단치 않은 일처럼 태연한 말투였으나,

아무래도 마음이 편안치 않은지 모기장을 걷어 올리는 손이 다소 거칠었다.

“봉당에 세숫물을 떠다 놨으니까 세수하세요. 시장하실 텐데…….”

김동회는 새끼에 꿰인 돌멩이처럼 그녀가 시키는 대로 할밖에는 없었다.

봉당에는 세숫물과 양칫물, 양치용의 새하얀 소금이 작은 접시에 소복하게 놓여 있었다.

“왜, 나 때문에 다퉜어?”

세수를 하고 난 다음, 건네주는 수건을 받으면서 물었다.

“뭐, 꼭 알고 싶으세요? 이 집에는 두 마리의 여우가 있죠.

하나는 늙은 여우이고, 한 마리는 아직은 어린…….

똑같이 짝을 잃은 서글픈 여우들이에요.

그런데 늙은 여우는 점두록 남자를 바꿔가며 맞아들이면서,

가엾은 어린 여우가 모처럼 남자 한번 맞아들였더니 그 야단이지 뭐예요!

그 꼴 보기 싫으면 보지 말라 하죠 뭐…….”

송채환은 정말 화가 난 듯 말하고는 고무신을 소리내어 끌면서 부엌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이내 밝은 얼굴이 되어서 커다란 아침상을 들고 나왔다.

푸짐한 상이었다.

그러나 김동회는 느긋하게 앉아 밥상을 받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이 그녀를 겁탈하기 위해 빈집에 뛰어든

그 일본 순사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장에라도 그녀의 남편이 아닌, 그 늙은 여우라는 시어머니가

권총이라도 들고 쳐들어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상을 물렸다.

“모처럼의 좋은 아침을 엉망으로 잡쳤지 뭐예요.”

송채환은 미안해하는 얼굴로 나붓이 그의 옆으로 앉았다.

김동회는 그녀의 꾸깃꾸깃해진 기분을 풀어줄 양으로 농담처럼 말했다.

“다시 시작할까?”

송채환은 곱다랗게 눈을 흘겼다.

그러나 그 눈빛에 윤기가 있었다.

“뭐, 다시 시작하자면 마다할까 봐 그러세요?

마침 늙은 여우도 집을 나갔겠다,

햇빛이 노랗게 보일 때까지…….”

그녀의 상체는 벌써 김동회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매끈매끈한 눈웃음과 함께…….

그 상체를 받으며 김동회는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궁합이 맞는 것 같군.”

두 몸은 하나가 되어 육중한 탑처럼 떨어질 줄을 몰랐다.

중천까지 솟은 해가, 민망한 듯 구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이따 가게로 나갈 거예요.”

송채환은 헝클어진 옷매무새를 고쳐 입으면서 뒤따라 나왔다.

매일 저녁 나가는 가게로 나갈 거라고 강조하는 것은,

저녁때 다시 만나자는 뜻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