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3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01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3

 

 

 

김동회가 이런 험악한 표정이 될 때는 으레 격노했을 때였다.

찌푸린 미간이 경련을 일으키듯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노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종의 격정 어린 감동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 역시 비록 배우지 못한 연약한 여자이기는 하지만,

그녀 속에 맥맥히 흐르는 민족혼을 본 것이다.

 

그것을 발견한 순간,

그는 온몸이 굳어져 버리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동시에 새삼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박계주는 남달리 배운 사람이라서 그렇다 치자.

그런데 똑같이 배우지 못한 김두한에게 있고, 송채환에게 있는

조선인의 피가 어째서 자기에게서만은 그토록 뜨뜻미지근한 것이었단 말인가.

(나온다! 혼마찌깡에서 반드시 뛰쳐나온다!)

그는 마음속으로 부르짖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마음속 절규에 그는 스스로 흥분하고 고무되어,

그의 표정이 그처럼 험악하게 일그러진 것이었다.

“그래, 넌 훌륭한 여자야.

내게 조선 사람임을 새삼 일깨워준 훌륭한 여자야.”

마음속의 절규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화장기를 지운 송채환이 하얀 얼굴을 쳐들었다.

순간, 그녀 속에 맥맥히 흐르는 민족혼을 자기의 것으로 흡수해 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는 사납게 달려들어 그녀의 입술을 휘덮었다.

 너무 돌발적으로 육중한 몸이 달려들었기 때문인지 송채환은 그 자리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춘향(春香)이 따로 없고, 논개(論介)가 따로 없다.

알맞은 위치에 알맞게 무너져내린 여체 위에 김동회는 자신의 무거운 몸을 실었다.

송채환은 저항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는 몸이 협력도 하지 않았다.

“나, 혼마찌깡에서 발을 빼기로 했어.”

김동회는 그녀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잘하셨어요.

아무려면 쪽발이들 밑에서 놀아날 수야 있겠어요?”

송채환은 숨가쁘게 대답했다.

그리고 김동회의 그 한마디가 그녀의 몸을 여는 암호 열쇠이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여주며 협력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무릎을 열어주었다.

“정말 넌 대단한 여자야. 나에겐 과분한 선생님이야.”

그의 민첩해진 손이 여체의 어디라고 할 것 없이 헤집고 난무하면서도,

그는 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가 자기 자신에게 과분한 여자라고 중얼거린 말에 거짓은 없었다.

여자의 키로는 훌쭉하게 느껴질 만큼 너무 큰 것이,

작은 키의 남자들에게는 어울리지가 않아 그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을 뿐,

송채환 그녀는 한번 쳐다보기만 하면 졸다가도 눈이 번쩍 뜨일 만한 미녀였다.

가찌도끼 바의 별실뿐만 아니라,

종로의 밤거리를 나다니는 온갖 남자들의 선망의 표적이기도 했다.

그러한 여자가 자기의 ‘것’이 되다니,

몸을 함께 하는 순간에도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만 같았다.

그는 씩씩하게 행위하며 생각했고, 생각하면서 또한 씩씩했다.

(이 여자는 과연 누구냐?)

그는 송채환과의 만남을 되생각해 내지 않을 수 없었다.

 

무덥디무더운 한여름밤의 일이었다.

김동회는 우메하라 양복점에 들러 그날 하루의 결산을 보고 난 후 가찌도끼 바로 향해 갔다.

김두한과 함께 술을 마시지 않으면 마신 것 같지도 않게 생각될 만큼

그는 김두한에게 부쩍 경도되어 있었다.

그를 만나지 못한 날이면 하루를 헛산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마침 김두한은 가찌도끼 바의 별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망치와 문영철이 그와 어울려 있었다.

김두한의 옆에는 언제나처럼 김윤희가 앉아 그의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김동회가 들어서자 김두한은 그를 반겨 맞았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서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김두한은 커다란 물통에 발을 담그고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남이 보지 않는 별실 안이라고는 하지만,

물통에 발을 담그고 술을 마실 수 있는 것은 김두한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만큼 이날의 날씨는 무더웠던 것이다.

별실 안에 조그만 선풍기가 돌고 있었으나,

그것으로 푹푹 찌는 밤의 더위를 식힐 수는 없었다.

“두한이, 너 신선놀음 하고 있구나!”

김동회는 물통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헛헛! 하두 더워서…….”

계면쩍은 듯 웃는 김두한의 얼굴에 주기가 많았다.

물통에 발을 담그고 앉았어도,

벌게진 얼굴에서는 계속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서 앉아. 너무 늦었군.”

김동회가 좌정을 하자마자 마치 그가 부르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면 그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따라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송채환이 모습을 보였다.

소매가 짧은 원피스 차림이 훌쭉한 키에 잘 어울렸다.

“허어! 아씨는 내가 한번 보잔다고 해도 모른 체하더니,

동회가 나타나니까 기겁을 하고 쫓아 나오네?”

김두한이 빈정거리듯 말했다.

그는 요정의 기생이든,

바의 여급이든 가릴 것 없이 여자들을 아씨라 불렀다.

선천적으로 여자를 위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여자의 존칭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빈정거리는 말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역시 그는 어지간히 취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원, 형부님도! 윤희 언니를 옆에 두고 그게 무슨 망발이세요?”

송채환은 매끄럽게 대답하며 김동회의 옆으로 다가앉았다.

김동회와 송채환이 자리를 함께 한 것은 그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손님과 여급이라는 관계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송채환이 너무 아름다웠음으로 해서,

흔히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관심을 가졌다면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김두한의 나와바리 내에 와서 함부로 여자를 넘볼 수 없어,

마음이 동했어도 그 기미를 보이지는 않았다.

“형부 형부 하지 마! 나도 숫총각이란 말야!

혼삿길 막히게. 아씨는 뭐,

내가 같은 안동 김씨끼리도 막 붙어버리는 개자식쯤으로 알았어?”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분연히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물론 물통에서 발을 빼고서였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김두한은 손수 물통을 들어올렸다.

좌중의 동료들은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물이 더워졌으므로 보다 찬물로 바꾸려는 것일까.

이제 발을 그만 담그고 내가려고 하는 것일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웨이터 상길을 부르면 될 일이었다.

두목이 손수 물통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의중을 헤아릴 수 없는 동료들은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 자신도 술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이에 크게 개의치 않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물통을 들어올린 김두한은 별실 문 앞으로 돌아 나오더니

밖으로 나가지를 않고 바로 송채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무슨 일일까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는 느닷없이 물통을 기울여,

앉아 있는 송채환의 머리 위로 물을 뒤집어씌우는 것이었다.

쏴악,

퍼붓는 물소리와 함께,

송채환의 울부짖는 듯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말릴 틈도 없었다.

설사 말릴 틈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느 누가 감히 두목이 하는 행동을 말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무슨 일야!”

그래도 한마디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으므로 해서

똑같이 물벼락을 맞게 된 김동회뿐이었다.

“뭐, 시원하게 목욕 한번 시켜준 것뿐이지.”

김두한은 빈 물통을 별실 밖으로 내던지며 대수로운 일이 아니란 듯이

제자리로 돌아와 앉는 것이었다.

난데없는 물벼락을 맞은 송채환은 차마 고개도 쳐들지 못하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물귀신처럼 물을 뚝뚝 떨어뜨리면서 뛰어나갔다.

“동생! 이게 무슨 짓이에요.”

김윤희가 차마 크게 나무라지는 못하고 김두한을 한번 흘겨 쳐다보고는

송채환을 뒤쫓아 나갔다.

쏴악,

물 쏟아지는 소리와 여자의 비명 소리,

빈 물통을 내던진 와장창하는 소리로 바 안은 수라장이 되었다.

워낙 무더운 날씨라,

주먹패 이외에는 그다지 손님이 들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큰 소동이 날 뻔했다.

아니, 김두한이 아닌 다른 자가 이런 일을 저질렀다면 말이다.

그러나 어느 누가 감히 그를 탓하고 꾸짖을 수 있단 말인가.

“이 더위에 얼마나 시원했을까.”

망치가 두목의 비위를 맞추려는 듯 한마디 거든 것이 고작이었다.

제자리로 돌아온 김두한은 김동회 쪽을 쳐다보며 씩 웃었다.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좀 지나쳤다고 순간적으로 깨달아 멋쩍어진 모양이었다.

아무리 취중이었기로,

또 송채환이 어떠한 실수를 저질렀기로 그런 물벼락을 안길 수 있단 말인가.

발을 씻은 물은 아니라 하지만,

발을 담갔던 물이 아닌가.

그것을 여자의 머리 위로 퍼붓다니,

그것은 평소 여자를 위하는 김두한답지 않은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싯! 여자가……, 좀 달라면 줄 일이지…….”


김두한은 씨근거렸다.

그 한마디로 사건의 내막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만했다.

아마도 그는 송채환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두한은 여러 차례에 걸쳐 송채환에게 뜻을 비춘 모양이었다.

그 전날 밤에도 늦은 시간까지 가찌도끼 바에 남아 있었던 김두한은

그녀를 여관으로 데려가려고 추근거렸던 모양이다.

송채환은 이를 야무지게 거절했던 것이다.

하긴 여자를 다루는 솜씨가 아직은 서투른 김두한이긴 했다.

자기 부하들이 우글거리는 앞에서,

그리고 바로 그 부하들이 모여 자는 조양 여관으로 데리고 가려 하니,

여자의 자존심으로도 따라갈 수는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종로의, 그것도 우미관 골목 안 술집에 나와 있는 여자가

주먹계의 두목 김두한에게 수청 들 것을 마다하다니 여간내기가 아닌 셈이었다.

물론 그녀도 김두한이 얼마나 무서운 남자인가를 알고 있었다.

무서운 남자라는 것 이상으로,

남자다운 호쾌한 성격에 호감도 갖고는 있었다.

아무에게나 몸을 내굴리는 여자는 아니었지만,

상대가 김두한쯤 되면 슬며시 못 이긴 체 따라나설 만도 했다.

하지만 김두한에겐 윤희 언니가 있지 아니한가.

이들이 같은 안동 김씨로 오누이처럼 지내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윤희는 김두한의 속옷까지도 빨아주는 사이인 것이다.

그들의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었다.

한갓 사창가의 창부들도,

뭇 사내를 받아들이면서 같은 동료의 남자라는 것을 알고 나면,

결코 그 남자만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화류계의 불문율이며 최소한도의 지조인 것이다.

이 지조를 송채환도 어길 수는 없었다.

김두한도 두렵지만 가찌도끼 바의 선배 김윤희의 눈에 벗어났다간,

종로에서 발도 못 붙일 판인 것이다.

이날도 가찌도끼 바에 들어선 김두한은 송채환을 찾았다.

그러나 그녀가 찾아들었을 때는 이미 김윤희가 김두한의 옆자리에 달라붙듯이 앉아 있었다.

송채환은 그 전날 밤의 일이 생각나서,

계면쩍기도 하고 서먹서먹하기도 해서 그냥 나가버리고 만 것이다.

김두한의 밸이 뒤틀렸다.

그 자신, 간밤의 일로 미안하기도 해서 사과라도 할 마음이었는데,

들어오라 해도 이를 마다하다니 부아가 치밀었다.

거기에 김동회가 들어서자 부르지도 않았는데 쪼르르 따라 들어오다니!

남자와 남자끼리, 화류계 여자 하나를 놓고 질투까지 느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소행이 괘씸했다.

게다가 그 말버르장머리라니!

술기도 있었지만 심술이 난 김두한은 느닷없이 일어나 발을 담그고 있던 물통을 들어

그녀의 머리 위에 물세례를 퍼부은 것이었다.

발을 담그고 있던 물을 여자의 머리에 퍼붓다니,

그것은 뺨을 때리는 것 이상의 모욕이 아닐 수 없었다.

이를 목격하고서도 김동회는 씁쓰레하게 입맛만 다셨을 뿐 달리 손을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로 그날 밤의 일이었다.


이들은 곧 가찌도끼 바에서 나왔다.

김두한이 자리를 뜨자고 한 것이다.

한바탕 소동을 벌였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분이 나지 않는 모양이였다.

가찌도끼 바에서 나온 이들은 남양 바로 낙원 회관으로 2차, 3차, 해갈을 하려는 사람들처럼

마시고 다녔다.

물론 김동회도 함께 쏘다녔다.

그러나 이들이 어디에서 얼만큼 마시고 다녔는가가 문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이들이 헤어지고 난 다음이었다.

낙원동 골목에서 나온 김동회는 우메하라 양복점의 숙소로 가려고 전찻길을 막 건넜다.

그러는데 관수동 골목 쪽에서 훌쭉한 키의 여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훌쭉한 키의 여자가 모두 송채환인 것은 아니겠지만, 틀림없는 그녀였다.

너무 취했기 때문에 잘못 본 것이 아닐까 하고,

눈을 비비고 슴벅거리는 눈으로 쳐다보았으나 어김없는 그녀였다.

물벼락을 맞았을 때의 그 옷차림은 아니었으나,

똑같이 소매가 짧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생각 탓인가, 파마를 한 머리가 젖은 듯 늘어져 보였고,

그녀도 취했는지 휘청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김동회는 거의 본능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랐다.

요즘 같으면, 생면부지의 사이도 아니겠다,

어차피 건달과 술집 여자인 것이다.

이내 뒤쫓아가서 어깨를 친다든가 쉽게 말을 건네고 어울릴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가 다르고 세상이 다른 것이다.

아무리 술집의 여자지만 여자는 여자이고,

아무리 건달패라 하지만 남자는 남자인 것이다.

여자와 남자는 유별하며,

밤길에 수작을 부린다는 것은 금기의 일이었다.

잠자코 따라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김두한의 만행을 대신 사과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취중의 호기심이 보다 많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송채환은 김동회가 뒤따르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뒤돌아보는 일 없이 동대문 쪽을 향해 마냥 걸었다.

김동회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여전히 뒤쫓았다.

종로 4정목에 이르자,

그녀는 마침 와닿은 전차의 앞쪽으로 올라탔다.

허겁지겁 달려든 김동회는 막 떠나는 전차의 뒤쪽으로 훌쩍 뛰어 올라탔다.

늦은 시간이어서 자리는 많이 비어 있었다.

송채환은 앞쪽 빈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아마도 오늘 밤 당한 일이 너무 분해서,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동회는 빈자리가 많았어도 일부러 자리에 앉지를 않았다.

양쪽 손잡이에 매달리듯 술에 취한 몸을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 쪽으로 다가가 먼저 말을 건넬 용기도 없었다.

오히려 그녀 편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먼저 말을 건네오기를 바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혜화동을 지나 삼선교에 이르자 그녀는 깜짝 놀란 것처럼 전차에서 내렸다.

쳐다보지 않는 체하면서도 예의 그녀 쪽만을 주시하고 있던 김동회도

후닥닥 전차에서 뛰어내렸다.

송채환은 삼선교 다리 건너, 어두운 숲 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