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4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01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4

 

 

 

삼선교에서 다리를 건너 개천을 끼고 돈암동 쪽으로 접어드는 길은 지금 복개가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해도 성북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맑았다.

경동고교의 전신인 욱구중학(旭丘中學), 한성고녀의 전신인 일본 여학생이 다니던

경성기예(京城技藝)가 들어서기 전인 이 일대는 아직 미개발 지역이어서,

옛 성터 멧부리 야산은 백년 묵은 아름드리 노송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당시 그 10여 년 전만 해도 호랑이가 나타난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호랑이는 아니더라도 산적 떼들이 우글거려 낮에도 장정들조차 혼자 다니기를 꺼렸을 정도였다.

전차가 혜화동에서 돈암동까지 연장 운행되면서 새 개발 지구로 선정되고

새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했지만, 아직도 한적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송채환이 바로 이 어두운 개천길로 들어선 것이다.

김동회는 적당한 간격을 두고 그녀를 뒤따랐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녀를 아닌 밤중에 마주친 것이 인연이었을 뿐이며,

굳이 이유를 달자면 김두한 대신 사과를 하고 싶었다고나 할까.

송채환의 걸음은 생각 탓인가 좀 빠른 듯싶었지만,

김동회가 뒤쫓고 있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전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길 깊숙이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개천가, 한길 옆에 한 줄로 늘어서 있는 새로 지은 한옥 기와집이 가지런한

골목 안의 계단을 올랐다.

역시 지금은 한옥집이 겹겹이 들어서 있지만,

그때만 해도 길가로 외줄만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고,

집 뒤로는 나무가 우거진 야산으로 되어 있었다.

때문에 그녀가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해도, 사람을 놓칠 수가 없었다.

계단 위 골목 안, 대문을 나란히 하고 있는 집들 중 어느 쪽인가의 한 집인 것이다.

김동회가 골목 계단 아래까지 뒤쫓아왔을 때,

송채환은 누군가가 열어준 대문 안으로 막 모습을 감추는 것이 보였다.

그는 오기라기보다, 엽기에 가까운 호기심을 느꼈다.

엉망으로 취해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대문 앞에 섰다.

꿀꺽, 딸꾹질을 하면서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았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기라던가.

등산자가 까마득한 산을 바라보듯이,

난감하지만 희망이 걸린 눈으로 대문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이 열릴 까닭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딸꾹질을 계속하고 있었다.

기묘한 장난꾼다운 심술기가 꾸역꾸역 솟구쳐 올라왔다.

(늦은 밤에 여기까지 쫓아왔다가,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딸꾹질을 열 번 하는 동안에 문이 열리지 않으면,

무턱대고 대문을 발길로 걷어차기로 마음을 굳혔다.

주먹 세계에서 잔뼈가 굵어온 터에,

그만한 배짱이 없을 까닭이 없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러나 딸꾹질을 열 번 계속할 것이 없었다.

일곱 번쯤 되었을 때다.

 

대문 안쪽에서 삐이걱, 빗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문을 발길로 차야 하는 수고를 덜게 된 것을 좋아하기에 앞서 취중에도 바짝 긴장을 했다.

딸꾹질이 저절로 멈추었다.

“들어오세요!”

대문이 열리면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송채환은 아니었다.

목소리는 중년 여인의 것이었는데,

키가 몽땅하게 느껴지리만큼 작았다.

우물거리거나 주저할 그가 아니었다.

대문 소리를 요란하게 울려대면서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몸을 가누기 힘들 만큼 술에 취해서 대문간에 쓰러질 뻔했던 것이다.

마루와 방에 휘황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집장수가 새로 지은 집답게 옻칠을 한 마루며 기둥이 반드르하게 번쩍거렸고,

싱싱한 재목 냄새가 맡아질 것만 같았다.

마루 위에 제법 반듯한 찬장도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얕은 키의 뒤주도 있었다.

뒤주 위에 사기 항아리, 백단지 등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이 신접살림만 같았다.

그러나 송채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문을 다시 걸어 잠근 중년 여인이 내외를 하면서 김동회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부엌 쪽으로 사라졌다.

김동회는 그녀의 얌전하게 쪽을 찐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쿵 하고 소리를 내듯이

마루에 걸터앉았다.

너무 취해서 버텨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가 송채환을 뒤쫓아온 것이 아니라,

취중에 여자가 아닌 다른 요물에 홀려 유인되어 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는데 옷도 갈아입지 않은 그대로의, 원피스 차림의 송채환이

넘실거릴 듯 물이 담긴 놋대야를 들고 부엌에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너무 취하셔서 그대로 돌아가시게 할 수가 없었어요.”

물론 처음 만나는 그들은 아닌 것이다.

가찌도끼 바에서 자주 만났을 뿐만 아니라,

다른 장소의 남자와 여자끼리라면 감히 나눌 수 없는 짙은 농담까지도 나눈 사이인 것이다.

하지만 김동회는 밤늦게 여자를 뒤쫓아온 무례함에 무엇인가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사과를 하고 싶었어요.”

“무엇을요?”

“김두한이…… 물통을 뒤집어씌워……, 설마 그 대얏물……,

내게 대신 뒤집어씌우려는 것은 아니겠죠?”

“어머! 그런 입씨름하실 기운 있으신 것 보니,

아직 덜 취하신 모양이시죠? 어서 세수하고, 발도 씻고 하세요.”

(세수하고 발을 씻는다?)

김동회는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아무리 술집 여자라고는 하지만,

처음으로 찾아든 여자의 집에 와서 오래된 기둥서방이라도 된 것처럼

호들갑스럽게 세수하고 발을 씻고 수선을 부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도대체 그럴 기력이 없을 만큼 취해 있기도 했지만…….

그러자 송채환은 그의 바짓가랑이를 손수 걷어 올리고 양말을 벗겨 주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제가 씻겨드릴까요?”

그는 실제로 술에 취해 있기도 했지만 술에 취한 것을 강조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렇지 않고는 여자의 제의를 쑥스러워서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동회는 송채환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녀는 그의 발을 물로 씻기기 시작했다.

이런 경우, 남자는 염치도 없고 뻔뻔스러워지는 것인지 모른다.

여자는 냄새나는 남자의 발을 씻겨주면서 얼굴도 찌푸리지 않고 군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발가락 사이사이 구석구석까지 깔끔히 씻겨주는 것이다.

세상이란 재미있는 것인지,

발을 담갔던 물을 여자에게 퍼붓는 남자가 있는가 하면,

같은 날 물벼락을 맞은 여자는 다른 남자의 더러운 발을 씻겨주기도 하고…….

(그렇기 때문에 세상이란 재미있는 것이지만…….)

비누칠을 하는가,

발가락과 발바닥에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간지러웠다.

그 간지러움조차 아기자기한 행복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는 술에 취했고 행복에 취해,

무엇이 무엇인지 모를 도연함 속에 빠져드는 듯싶었다.

송채환이 부엌 쪽에다 대고 무엇인가 소리를 쳤다.

“어머님, 물 한 통만 더 길어다 주세요.”

그러나 김동회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는 술에 취해 있고 행복에 취해 있었으니까.

중년 여인이 물 한 통을 길어다 주었다.

“저희 시어머님이세요.”

송채환이 마른 수건으로 그의 발을 닦아주며 말했다.

김동회는 멋쩍은 기분으로 그녀의 말을 건성 들어 넘겼다.

마치 시어머님이란 단어를 처음 들어보기나 한 것처럼.

아니면 시어머님이란 단어의 뜻을 전혀 해득할 줄도 모르는 것처럼.

“자, 세수는 혼자 하세요.

설마 얼굴까지 씻겨달라시지는 않으시겠죠?”

송채환은 대야를 부시고, 물을 갈아 떠주었다.

김동회는 술에 취해서인지, 행복에 취해서인지

비틀거리고 일어나 푸푸 소리를 내어가며 세수를 했다.

시원한 찬물로 세수를 하자,

언뜻 제정신이 드는 것만 같았다.

(시어머니, 시어머니라?)

그제야 시어머니의 뜻을 새삼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곱게 늙은 중년 여인이 그녀의 시어머니라면,

송채환은 남편이 있는 몸이란 말인가?

그럼, 남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남편이 있는 몸이 어떻게 술집에 나오고 있고,

어떻게 밤늦게 외간 남자를 집에 불러들일 수 있는 것일까.

어떻게 시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남자의 발까지 씻겨줄 수가 있단 말인가.

세상이란 재미있는 것이 아니라 요지경 속이구나.

“자, 자리를 펴놓았으니 어서 들어가 쉬세요.”

송채환은 마른 수건을 건네주면서 말했다.

그는 송채환이 문을 열어준 안방 쪽으로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갔다.

방에는 이미 모기장이 쳐져 있었다.

밑에 보료라도 깔아놓았는가,

두툼한 요바닥 위에 시원해 뵈는 돗자리가 깔려 있었고,

네모 반듯하게 개켜져 있는 겹이불과 베개가 놓여 있었다.

“어서 들어가세요.”

송채환의 독촉에 그는 모기장 밑으로 엉금엉금 기어들어갔다.

꼭 남의 물건을 훔치러 들어가기 위해 울타리 밑을 쑤시고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너무 더우니까 문은 열어놓도록 하겠어요.

목이 마르시면 머리맡에 자리끼를 떠다 놓았으니까요…….

불을 끄겠어요.

하지만 마루의 불은 켜놓을 테니까 어둡지는 않을 거예요.”

그리고 그녀는 안방의 전깃불을 껐다.

그녀의 말 그대로 마루의 불이 켜져 있어 어둡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인가?)

종로에서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왔으면서도,

모든 것이 자기 의사와는 상관없이 남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채로 그는 옷도 벗지 않고 허리띠만 풀고 벌렁 자리에 누웠다.

(도대체 이 여자는 날 어쩌자는 것일까?)

그는 자기 자신이 송채환을 뒤쫓아왔으면서도,

그녀의 유인에 못 이겨서 따라오기나 한 것처럼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송채환은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얼마 후 바깥쪽에서 물소리가 들렸다.

세수를 하는 것일까, 뒷물을 하는 것일까,

그는 전혀 엉뚱한 망상을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여자는 무엇 때문에 나를 집으로 끌어들인 것일까.

남편이 있는 몸이면서 어떻게 외간남자를 불러들일 수 있는 것일까.

남편이란 자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여러 가지 의문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그러나 그 의문들은 단편적으로만 떠올라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의 사고(思考)는 아직도 심한 취중에 있었으므로 혼돈 속에 있었다.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꿈속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목욕을 하는 것일까,

등물을 끼얹게 하고 있는 것일까,

제법 세찬 물줄기 소리가 들렸다.

그 물소리를 어렴풋하게 들으면서 그는 어느덧 잠이 들어버렸다.

원래 김동회는 잠을 잘 자는 편이었다.

한번 자겠다고 마음을 먹고 눈을 붙이기만 하면 이내 코를 골았다.

한참을 잤다.

잘 만큼 잔 것이다.

쉽게 잠이 드는 그는 숙수(熟睡)를 하는 편이어서,

아무리 고단하고 간밤에 아무리 술을 많이 마셨어도 새벽이면 반드시 눈을 떴다.

고따마 체육관으로 새벽 운동을 하러 가는 것이 습성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잠을 깬 것은 새벽이 가까웠기 때문이 아니었다.

잠결에 무엇인가 인기척 같은 기색을 느낀 것이다.

언뜻 잠이 깬 것과 동시에, 잠들어 있는 여기가 어디인가 생각해야만 했고,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나고 있는가 생각해야만 했다.

잠들어 있는 여기가 바로 송채환의 안방이라고 문득
 깨달았을 때였다.

검은 그림자가 모기장을 헤치며 자락을 쳐들고 있었다.

김동회는 바짝 긴장을 했다.

싸움꾼다운 감각에 벌써 누운 채로 몸을 사렸다.

똬리를 튼 뱀이 위기를 느낀 순간 가해자에게 공격을 가할 것인가,

냅다 도망을 칠 것인가,

동시에 양면의 태세를 갖추는 것처럼 그는 공격과 수비의 자세를 아울러 갖추며

고개만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그의 경계는 부질없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여기 누가 있지 싶으니까, 통 잠을 잘 수 있어야죠…….”

그것은 어김없는 송채환이었다.

소리를 죽인 나직한 것이었으나 졸음을 잊은 초롱초롱한 목소리였다.

모기장을 털고 엉금엉금 기어들어온 그녀는

내밀지도 않은 어머니의 젖가슴에 파고드는 어린애처럼 슬며시

김동회의 옆에 와 눕는 것이다.

김동회는 경계심도 술기운도 졸음도 한꺼번에 날아가버렸으나

떨떠름한 기분은 가셔지지가 않았다.

무엇이 어떻게 벌어져 가고 있고,

부딪힌 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처럼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의중을 살피려는 것처럼 그 다음 행동을 기다릴밖에 없었다.

“깨셨군요?”

“응.”

“주무시는 것을 깨워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셨군요.”

송채환은 반듯하게 누웠던 몸을 김동회 쪽으로 돌렸다.

“어머나! 옷도 벗지 않고 주무셨네요?”

그녀는 대수롭지도 않은 일에 크게 놀란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제 그는 더 이상 그녀의 의중을 살필 것이 없었다.

바로 귓전에서 속삭인 목소리가 턱에 찬 듯 숨이 가빴고,

액선(腋腺)이 마른 것처럼 메마르게 들린 것이다.

그러면서도 코가 막힌 듯싶은 것이 감미롭고 또 끈끈하게 느껴졌다.

“뭐, 이제 벗으면 늦었나?”

그는 누운 채로 버둥거리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송채환이 이를 도왔다.

다음은 송채환의 차례였다.

이번에는 김동회 쪽에서 이를 도왔다.

입은 것이 많지 않은 여자의 여름 잠옷은 한 겹을 걷어 내린 것으로 그만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맨살이었다.

그는 화끈거리는 여체의 체온과 조금은 땀기에 젖은 끈끈함을 손바닥으로 감각한 순간,

땅 속을 깊이 파기도 전에 노다지 광산을 만난 광부처럼 광분하기 시작했다.

미쳐 날뛰는 듯싶은 손이, 한 뼘으로는 남고 두 뼘으로는 모자랄 듯 앞가슴으로 치달았다.

그런가 하면 한 곳 제자리에서만 머물러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곡선을 훑어내리듯

미끄러져 내려왔다.

한 뼘 가득히 다보록한 감각에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광희를 느꼈다.

“이래도 되는 걸까?”

그러나 그것은 안타깝디안타까운 호소였을 뿐,

양해를 구하는 것도 용서를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벌써 육중한 몸을 여체 위에 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