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2

오늘의 쉼터 2014. 8. 27. 21:00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12

 

 

 

박계주는 김동회를 쏘아보았다.

잔인한 눈길이었다.

예리한 칼끝으로 난자질하는 시선만 같았다.

김동회의 얼굴이 푸르죽죽해 보일 만큼 창백해지면서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실제로 그는 온몸을 난도질당하는 듯한 아픔을 느낀 것이다.

머리끝이 곤두서는 것과 같았던 모욕감은 이제 없었다.

자기 자신의 커다란 몸집이 고무공이 오므라드는 것처럼 자꾸자꾸 오므라들면서

무엇엔가 무턱대고 사과하고 싶은 송구함을 느꼈다.

위축된 가슴과 머리가, 팔과 다리가 경련을 일으키면서 작렬해 버릴 것만 같았다.

이것이 민족을 배반한 자의 무서움이라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탄생을 위한 산모의 진통 같은 아픔인 것일까.

“알겠습니다. 알겠어…….”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지 자기 자신도 몰랐다.

그는 분연히 소리쳤다기보다도 울부짖듯 소리치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리가 어쩔 수 없이 휘청거렸다.

술 탓은 아니었을 것이다.

눈앞이 아찔아찔 현기증을 일으켜,

그는 어떻게 방 안을 뛰쳐나왔는지를 몰랐다.

신발을 어떻게 꿰어 신었는지도 몰랐다.

그런 채로 앞마당으로 뛰어내렸다.

대문을 박차듯 밀어젖히고 어두운 골목 밖으로 나왔다.

자정이 가까운 늦은 시간이었다.

골목 안에는 얼씬거리는 사람 하나 없었다.

그는 밤하늘에다 대고 커다란 목소리로 뭔가 소리를 치고 싶었다.

자기 몸을 담벼락에든 전신주에든 마구 부딪쳐가면서 자신을 학대하고 싶었다.

막차가 달려오는 것일까,

종점을 향해 오는 전차의 차바퀴 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그는 전차 차바퀴 밑에라도 뛰어들고 싶은 충동마저 느꼈다.

과연 혼마찌깡에 몸담고 있는 것이 민족을 배반하는 일일까.

그것이 민족을 배반하는 일이라면 혼마찌깡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하야시와 결별을 해야만 한다.

비록 배운 것이 없어 주먹패에 몸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에게도 젊은 피가 있었고, 민족혼이 있었다.

박계주의 언중유골의 신랄한 한마디로 그는 조선인임을 자각하고,

준열한 자성과 함께 새로운 탄생의 지각(地殼)을 깨는 아픔을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말 혼마찌깡에서 발을 씻고 뛰쳐나온다면? 생각만 해도 무서운 일이었다.

결코 두목 하야시가 용서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야시와 의형제를 맺은 각별한 사이이기는 하다.

그의 신임도 두텁다.

하지만 신임이 두터우면 두터울수록 배신감도 강할 것이다.

두목은 스스로 배를 가를 것(切腹)을 요구할 것이다.

배반했을 때의 자살용 단도까지 내려주면서 가졌던 엄숙한 의식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

차라리 어디 깊은 산 속에라도 숨어버린다면?

그는 칼잡이 자객을 풀어 집요하게 뒤쫓을 것이었다.

경찰의 힘이라도 빌려 잡아들일 것이었다.

그 죽음까지를 각오하면서,

혼마찌깡에서 뛰쳐나와야만 한단 말인가.

무섭다. 그건 너무나 무서운 일이었다.
 

그는 부르르 떨었다.

죽음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아서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발길은 막차일 듯싶은 전차가 다가오는 종점 쪽으로 향해 갔다.

송채환이 돌아올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집을 뛰쳐나온 것도 어쩌면 무의식중에 그녀를 맞기 위해서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만이, 맞부딪히게 된 고뇌를 덜어주고, 위로가 되어줄 것 같았다.

막차가 분명한 전차에서는 내리는 승객도 그리 많지 않았다.

전차 앞쪽에서 내리는 승객 가운데,

어김없는 송채환의 모습이 있었다.

여자의 키로는 훌쩍하게 느껴질 만큼 큰 키여서 한눈으로도 그녀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모습을 보자,

그의 혼돈된 머리가 다소 가라앉는 듯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아니, 이 늦은 시간에 어딜 가시려구요?”

송채환도 늘씬한 키의 김동회를 이내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추었다.

“가긴 어딜 가? 널 맞으러 나왔지.”

“어머나, 고마워라.”

“아께미!”

머릿속이 복잡해져서인지,

목소리조차 갈라져서 나오는 파열음이 되었다.

아께미(明美)란 송채환의 가명으로,

주로 가찌도끼 바에서 부르는 이름이었다.

송채환은 어둠 속에서 김동회를 치켜 올려다보았다.

“싫어! 난 아께미가 아녜요.”

“그래, 그래. 채환이.”

“네.”

“넌, 참 좋은 여자야. 나 같은 건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왜 그런 말을 새삼스럽게 하시죠?

나도 한낱 술집 계집인걸요.

서로 피장파장 아녜요?

이제, 내게 싫증이라도 느끼게 되신 것 아녜요?

밤이면 밤마다 늦게 돌아오는 내가…….”

“늦게 돌아오기는 마찬가지지. 네 말마따나 피장파장의…….”

“그런데 왜 갑자기?”

송채환은 어둠 속에서 걸음을 멈추며 물었다.

그 간단한 물음에 김동회는 말이 막혔다.

송채환을 보기 전까지만 해도 혼돈된 의식 속에서 전신으로 느꼈던 아픔이,

 일종의 비장미로 변해 가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아께미 아니 채환이! 내게서 떠나야만 할 것 같아.”

“왜요?”

어둠 속에서 송채환의 눈이 눈물이라도 머금은 듯 번쩍이는 것 같았다.

“나, 아무래도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야.”

김동희는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말했다.

“죽기는요? 당신 같은 남자도 그런 허약한 말을 할 때가 있나요?”

“강한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는 더 쉽지.”

“알았어요! 당신, 당신…….”

송채환은 담싹 김동회에게 다가들면서 발돋움을 하며 귀엣말처럼 속삭이는 것이었다.

“……당신, 사람을 죽이셨죠? 김두한패와 함께 사람을 죽이신 거죠?”


“뭐, 뭐라구? 사람을 죽였다구? 무슨 당치 않은 소리를 하는 거야?”

김동회는 너무 놀라서 이제까지 핵심이 되어왔던 주제조차 잊은 듯이 반문했다.

“숨기실 것 없어요. 난, 다 알아요.”

“숨기긴 뭘 숨기고, 알긴 뭘 다 안단 말야?”

어둠 속에서 김동회는 물어뜯듯이 송채환을 다그쳤다.

“뭐, 엿듣고 싶어서 엿들은 것은 아니지만,

종로꼬마와 망치가 헌병 보조원이라나 정보원을 죽였다더군요.

김두한에게 보고하는 것을 들었단 말예요.

당신도 거기에 가담하신 거죠? 그래서 떨고 있는 거죠? 그렇죠?”

“당치도 않은 소리. 아예 그딴 소리 입 밖에도 내지 마. 너, 죽고 싶어 그래?”

그것은 청천의 벽력과도 같은 말이었다.

주먹계의 정세에는 빠른 편의 그였지만,

망치와 종로꼬마가 헌병 보조원을 죽였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그것을 송채환이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실이면 사실일수록 사건 자체를 안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죄다.

경찰이나 그 밖의 수사 당국에서 범인을 체포했거나

그 정보를 정확하게 입수하고 있다면 모를까,

수사 당국이 모르는 비밀을 알고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이 무서운 죄가 되는 것이다.

더구나 그 범인이 김두한패일 때는…….

그 패거리들이 그 비밀을 알고 있는 자를 그대로 내버려둘 리 없기 때문인 것이다.

재갈을 물리는 셈으로 곱게 저세상으로 보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늘 밤 당신, 정말 이상하시네요?

말끝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둥, 죽고 싶으냐는 둥,

어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인가요?”

“자세히 알지도 못하는 말,

아니 자세히 알고 있으면 알고 있을수록 그런 말 함부로 놀렸다간 죽어,

죽는단 말야……. 혓바닥이 뽑히든지, 맞아 죽든지…….”

아무리 인적 없는 밤길이지만,

이런 말 자체를 나누고 있는 것이 두려워서 김동회는 골목 안을 휘둘러 살펴보는 것이었다.

“혓바닥이 뽑히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그런 말 함부로 할 것 같아요?

이래 봬도 나도 조선의 여자인걸요…….”

송채환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으나,

조선의 여자란 말에는 자못 힘을 주어 말했다.

그것은 자조(自嘲)의 말투가 아니라, 긍지의 말투였다.

(그래, 넌 조선의 여자야. 나보다도 민족을 아는…….)

김동회는 입 밖으로 내려다가 그만두었다.

그러자 송채환은 다시 소곤거리듯 물었다.

“그래서 내가 입 밖으로 낼까 봐,

당신은 나에게까지 숨기려 하시는 건가요?”

“숨기긴 뭘 숨긴다는 거야? 난 그런 것 몰라. 함께 가담한 일도 없고…….”

“그런데 뭘 두려워하시는 거죠?”

“음…….”

김동회는 잊어버렸던 주제를 되생각해 내기라도 한 것처럼 괴로운 한숨부터 몰아쉬었다.

“어서 집으로 들어가자구. 집으로 들어가 조용히 얘기하자구.”

그는 송채환의 등을 가볍게 밀었다.

방으로 돌아온 김동회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자리에 벌렁 누웠다.

옷을 갈아입지 않은 것은 송채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때 같았으면, 아무리 밤이 늦었더라도 옷을 갈아입고 세수를 하고

가볍게 밤화장을 하는 것이 예사였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부닥친 문제가 너무나 심각한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죠?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무슨 말이냔 말예요.”

벌렁 누워 눈을 감고 있는 김동회 곁으로 다가앉은 송채환은

손으로보다 목소리로 그의 몸을 뒤흔들었다.

“나, 혼마찌깡에서 발을 빼려고 해.”

김동회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

송채환의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왜요?”

그러나 송채환은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그야, 주먹계의 생리를 속속들이 모르는 그녀였다.

배반에의 응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 까닭이 없었다.

침착한 목소리로 되물은 그녀는 그만한 일로 죽음까지를 각오해야만 하느냐는 투였다.

김동회는 이날 밤,

박계주로부터 받은 모욕과 충격의 대강을 차근차근하게 말해 주었다.

실상, 그는 하야시를 혼마찌깡의 두목으로서뿐만 아니라,

의형제를 맺은 형님으로서 존경은 하고 있었다.

그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혼마찌깡의 조직이며 내부에 대해서

생리적으로 구미에 맞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마음이 통할 수 있는 것은 두목 하야시와 부두목 다무라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목의 처남 오까무라까지도 비위에 맞지 않았다.

다른 주먹패들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주먹의 힘도, 담력도 쥐뿔만큼도 없으면서,

일본 사람이라는 위세로 조선 사람을 멸시하는 것이 생리적으로 맞을 까닭이 없었다.

이에 비하면 김두한패는 무엇보다 우선 속이 편했다.

아직 김두한 이외에는 속을 트고 주고받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래도 같은 조선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사귀기가 매끄러웠다.

민물고기가 바닷물에서 떠돌다가 민물로 돌아온 듯한 편안함을 주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김두한패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은,

그의 마음속 밑바닥에 깔려 있는 본능적인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하야시와 맺은 인연과 보복이 두려웠던 것뿐이다.

그 본능을 일깨워주고,

혼마찌깡을 빠져나올 계기와 명분을 만들어준 것이 박계주였던 셈이다.

“뭐 그까짓 것 가지고 남자가 고민하세요?

그래요, 당신의 말처럼 죽기밖에 더하겠어요?”

송채환은 뜻밖에도 야무지게 말했다.

그렇다. 죽음만 각오한다면 이 세상에 무서운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당신이 발을 빼려는 것은 혼마찌깡인 것인지,

하야시와의 인연을 끊으려는 것이 아니지 않아요?

 형제의 의리를 지키는 한 그것은 죽음에 해당하는 배반일 수 없지요.

하야시가 정말로 당신을 동생으로 여기고 사랑한다면,

그것을 이유로 당신을 죽이지는 못할 거예요.”

김동회는 비로소 눈을 번쩍 떴다.


송채환은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소곳이 앉아 얼굴 화장을 지우고 있었다.

짙은 화장기가 벗겨져 가면서 맨살의 얼굴을 드러내놓는 것이,

전혀 별개의 여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김동회는 문득 소학교 졸업반쯤 되는 어린 딸자식으로부터 충고를 받는

젊은 아버지의 심정과 같은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 여자에게 있는 사상이 자기 자신에겐 없다는 것을 새삼 발견하고

수치스러워진 것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오히려 말을 잃었다.

“난 김두한을 싫어해요. 무식하고 무지막지하고…….”

송채환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녀 자신의 말이 상대방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김동회는 그녀가 왜 김두한을 싫어하는가,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김두한을 위해 무엇인가 변명을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의무처럼 생각됐다.

“하지만 말야, 김두한은…….”

머리에 와닿는 대로 변명을 해주려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송채환 편에서 그의 말을 가로막고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예요. 김두한도 싫지만, 하야시 그 사람은 더욱 싫어요.”

송채환은 결연히 말했다.

김동회는 정말 뜻밖이었다.

그녀가 김두한을 싫어하는 데는 뚜렷한 까닭이 있지만,

하야시를 더욱 싫어하는 데는 도무지 까닭이 있을 성싶지 않았던 것이다.

송채환은 하야시를 몇 번인가 만나본 적이 있었다.

김동회와 동거를 하게 되면서 그를 따라 직접 혼마찌깡으로 인사를 간 일조차 있었다.

하야시는 송채환을 극진히 대해 주었다.

정말로 수씨(嫂氏)를 대하듯이 정중했고,

새살림에 보태 쓰라고 두툼한 봉투까지 건네주었었다.

송채환도 그러한 하야시를 고마워했고 존경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러한 그녀가 하야시를 김두한보다도 더 싫다고 하니,

그건 또 무슨 까닭인 것일까.

“아니, 하야시 형님이 더욱 싫다니?”

김동회는 자기 자신이 모욕이라도 당한 것처럼 목소리가 커졌다.

“하야시 상이 일본 사람인 줄 알았을 때까지만 해도 존경했어요.

일본 사람도 그처럼 겸손한 사람이 있을까 하고 말예요.

혼마찌깡의 두목이라면서 아래 부하들에게 그처럼 자상할 수 있을까 하고 말예요.

김두한은 거기다 대면 불한당이죠.”

김동회는 이제 하야시와 김두한,

두 사람을 동시에 변명해 주어야만 할 것 같은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송채환은 그 틈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말예요.

김두한은 하야시 상처럼 일본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아요.

조선 사람인 것을 떳떳한 자랑으로 여기고 있어요.

조선의 상인, 조선의 학생들을 위해 앞장서서 대신 싸워주고 있어요.

내가 김두한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고,

하야시 상을 김두한보다 더 싫어하는 것은 이 때문이에요.”

김동회는 누웠던 자세에서 벌떡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무슨 충동에 이끌린 것일까,

그의 표정이 사뭇 험악해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