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9

오늘의 쉼터 2014. 8. 27. 20:57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9

 

 

 

기차 시간이 빠듯했던 것인지 빠른 걸음으로 경성역에 도착한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는

역사 중앙 꼭대기에 걸려 있는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발차 시간이 넉넉한 것을 확인해서인지 비로소 여유를 찾은 그는 천천히 뒤돌아보았다.

뒤쫓아온 김두한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잠자코 빙그레 웃었다.

김두한패가 뒤쫓아오며 망을 보아주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미 개찰은 시작되었다.

길게 늘어선 승객들 뒤에 그는 붙어 섰다.

그의 뒤에는 보다 늦게 당도한 승객들이 이어서 줄을 섰다.

승객의 줄은 점점 줄어갔다.

그러나 개찰구 쪽에 가까워지자,

사나이는 갑자기 줄에서 빠져나와 뒷걸음질을 치는 것이 아닌가.

개찰의 차례를 스스로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이를 목도하고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아하니 개찰구 앞에서는 평소와는 달리,

헌병 보조원이 지켜 서서 나가는 승객을 한 사람씩 철저히 조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회중을 샅샅이 뒤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행 가방 속까지 일일이 뒤지고 있는 것이었다.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일렬로 서 있는 대열의 뒤쪽으로

자꾸 물러서고만 있었다.
 
김두한의 머리에 번개처럼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이처럼 갑자기 검문 검색이 심해진 것은 무슨 까닭일까?

단순한 우범자를 가려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요즘 이렇다 할 큰 사건이 없었던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는

김두한으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강도나 살인자를 색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위해서인 것일까.

독립 운동을 하는 운동원을 가려내기 위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저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야말로 바로 그 운동원인 것이나 아닐까.

독립 사상이 투철한 박계주가 은근히 그를 보호하라고 지시한 것이 이 때문이 아닐까.

그러기에 그가 기차를 탄 마지막까지 지켜보라 하지 않았는가.

김두한은 이제 더 이상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종로꼬마·망치와 이마를 맞대고 긴급히 작전을 짰다.

길게 의논할 것도 없었고,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몇 마디 김두한의 지시를 두 사나이는 벌써 행동으로 옮겼다.

종로꼬마가 헌병 보조원 곁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저기, 중국 사람이 아편을 잔뜩 갖고 있어요.”

그는 무턱대고 뒤쪽을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보조원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편 밀수꾼을 잡고 이를 압수하면 크게 포상을 받기 때문에,

그는 귀가 번쩍 뜨이는 것 같았던 모양이다.

“어디, 어디?”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종로꼬마에게로 몸을 돌렸다.

“날 따라오세요.”

종로꼬마는 보조원을 이끌었다.

일확천금할 꿈에 눈이 어두웠던지,

보조원은 황급히 종로꼬마를 뒤따라왔다.

그가 끌고 간 봉래동 어두운 골목 안에는

이미 망치가 주먹을 움켜쥐고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봉래동 길은 서부역, 만리동, 마포를 잇는 대로다.

번화하기는 서울역 일대의 다른 거리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산한 뒷골목이나 다를 바 없었다.

거리는 넓은 편이었으나,

길 양편에는 자동차의 부속품 따위를 파는 철물점이 많았고,

밤에는 서울역에 쌓아놓은 화물을 실어 나르기 위한 짐차가 가득 대기하고 있었다.

특히 밤엔 무척이나 어두웠다.

외등 하나 밝혀 있지 않아서 너무나 캄캄해 부녀자는 말할 것 없고,

남자들도 어지간히 담이 크지 않고는 지나다니기를 꺼려할 만큼 음산했다.

종로꼬마 이상욱이 헌병 보조원을 이 어두운 봉래동 골목 안으로 끌고 온 것이다.

그는 헌병 보조원의 왼편에서 걷고 있었다.

어깨를 나란히 하듯 하고 있었으나,

안내하는 입장에 있었으므로 다소 앞장서서 걸었다.

헌병 보조원은 어두운 골목 안으로 들어섰어도

처음에는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었다.

어두운 골목일수록 아편을 밀판매하기에 적격의 장소였으니까.

그는 그저 빨리 공을 세워 두둑한 보상금을 움켜쥘 꿈에 부풀어 있었다.

더구나 그는 허리에 탄환이 들어 있는 권총을 차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무장에 안심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저기예요.”

종로꼬마는 어둠이 짙은 골목 안쪽을 가리켰다.

늘어서 있는 트럭 사이에서 골목 안의 어둠보다도 더 짙은 어둠으로 부조되어

보이는 모습이 검은 유령처럼 걸어 나왔다.

그는 땅딸막한 모습의 망치였다.

헌병 보조원의 손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권총으로 갔다.

위험을 느껴서였다기보다,

밀수꾼을 덮치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취해야 할 조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종로꼬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긴 그를 어두운 골목 안으로 유인해 온 이상,

얌전히 돌려보낼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권총을 뽑아들려 하지 않는가.

그가 권총을 뽑아들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들자마자였다.

그의 작은 몸은 벌써 어둠 속을 날았다.

뒤돌아보지도 않고 어떻게 어둠 속에서 권총을 뽑아든 것을 보았는지,

찰나적으로 몸을 날린 것이다.

비호같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었을 것이다.

언제 어떻게 뛰어올랐는지 모르지만,

헌병 보조원은 들고 있던 권총을 힘없이 땅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방아쇠를 당길 틈이 없었던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윽, 하고 얕은 신음과도 같은 소리를 내면서 몸이 붕 솟아오르는 듯하며

나가떨어지는 것이었다.

종로꼬마가 몸을 솟구쳐 뛰어오르면서 한쪽 발로 권총을 든 팔을 걷어찼고,

또 다른 한 발로 그의 급소인 명치 끝을 걷어 올린 것이다.

붕 솟아오른 보조원의 몸은 나가떨어지면서 알맞게 망치의 가슴에 안기듯 쓰러지는 것이었다.

그의 몸을 받아 안은 꼴이 된 망치는 어둠 속에서 히죽 웃었다.

회심의 미소였다고나 할까.

놈의 멱살을 한번 틀어쥐듯 쥐었다가 바른쪽 주먹으로 그의 턱주가리를 향해 한 방 힘껏 날렸다.

묵직한 주먹이었다.

딱, 소리인지, 뚝 하는 소리인지 모를 소리가 음산하게 골목 안에 울려 퍼졌다.

질그릇 깨어지는 소리 같기도 했고,

단단한 돌멩이를 바윗등을 향해 던졌을 때와 같은 둔탁한 소리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삽시간에 일어난 일이지,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문제의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가 무사히 개찰구를 빠져나간 것은 물론이다.

혼자 역에 남아 있었던 김두한은 그가 이렇다 할 조사를 받는 일 없이 개찰구를 빠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가 무사히 타고 떠나는 것을 확인해 달라는 박계주의 당부였었다.

그는 대합실을 뛰쳐나와, 화물 자동차가 드나드는 옆길로 슬며시 빠져나가 플랫폼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의 행방을 찾았다.

플랫폼에는 이미 승객들이 대부분 올라탄 다음이었다.

대륙행 열차답게 그들을 전송하려는 사람들이 차창 안의 승객들과 석별의 정을 아쉬워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그러나 눈에 띄기 쉬운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김두한은 어쩐지 초조한 기분을 느끼며, 객실로 올라 뒤쪽에서부터 훑기 시작했다.

원행(遠行) 열차는 좌석제가 되어 있어서 붐비지 않았다.

거치적거리는 사람이 없어 짧은 시간에 둘러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아무 자리에도 없었다.

(그사이, 무슨 변고가 일어난 것이 아닐까?)

출발을 예고하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더 이상 찾아다닐 수가 없어, 그는 기차에서 내려야만 했다.

그가 기차에서 내리자마자,

기차는 덜컹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디서 나타났는지,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가 기차 맨 뒤쪽 칸으로 훌쩍 올라타는 것이 보였다.

김두한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손을 흔들지는 않았지만, 마주친 눈과 눈이 웃고 있었다.

그 길로 김두한은 가찌도끼 바로 돌아왔다.

과연 박계주는 혼자 별실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앞자리에는 김윤희와 송채환이 나란히 앉아 시중을 들어주고 있었다.

김두한이 들어서는 것을 보자,

박계주의 눈이 방금 뜨인 심봉사의 눈처럼 빛났다.

그러나 기쁨의 눈빛이라기보다, 걱정과 궁금증이 가득 찬 눈이었다.

무사히 잘 갔느냐고 묻는 눈임이 분명했다.

“기차를 탄 것까지 똑똑히 보고 돌아왔어요.”

김두한은 묻기도 전에 말해 주었다.

“정말 수고하셨소. 자아, 어서 목이나 축이시오.”

박계주는 자기의 술잔을 비우면서 김두한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김두한은 술잔을 받아 마셨다.

그러나 다른 때처럼 술맛이 나지 않았다.

그를 무사히 기차에 태워 보내기는 했지만, 너무나 아슬아슬했고,

도대체 그가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서 못 견뎠기 때문이다.

그뿐이 아니었다.

으레 먼저 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던 망치와 종로꼬마가 아직도 돌아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두한은 은근히 걱정이 됐다.

그의 미간에 수심이 어린 것을 본 박계주는 어떤 기미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눈치 빠른 김윤희와 송채환에게 무안을 주지 않을 정도로, 잠깐 자리를 비우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 둘이 조용히 얘기를 나눌 게 있는데…….”

두 여인이 자리를 뜨자,

박계주는 자못 진지한 표정이 되는 것이었다.

“사실은 말이오,

아까 떠난 중국 사람은 중국 사람이 아닌 조선 사람이오.”

“그런 줄 알았어요.”

“그랬을 거요.

그분은 만주에서 독립 운동을 하는 지사시지.”

“음!”

김두한은 독립 운동이라는 단어 한마디만 듣고도 긴장을 해서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선 독립이란 단어는 혁명이라는 단어와 함께, 써서도 말해서도 안 되는,

금기의 말 이상의 범죄의 뜻을 갖고 있는 단어였다.

심지어 전문적인 연구 서적에조차 ‘조선 독립’은 ‘조선××’, ‘혁명’은

아예 그런 활자가 없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으로 표기하던 시절인 것이다.

김두한처럼 담이 큰 사나이조차 그 말만 듣고도 긴장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 그분은 독립 운동 자금을 모아 만주, 중국으로 떠난 세 분 중의 마지막 한 분이셨소.”

“음!”

“일본놈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따로따로 행동을 했고,

특히 그분은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중국인 행세를 해야만 했소.”

“그럼, 그럼, 그분이 세 분 중의 마지막 한 분이셨다면,

모두 무사히 만주로 돌아가셨나요?”

“그렇소. 이제 그분이 무사히 떠나셨으니,

두 다리 쭉 뻗고 편안히 잠잘 수 있을 것 같소.

실은 그동안, 남몰래 비밀리에 운동 자금 모으느라고 고심도 많이 했지만……, 불안해서…….”

박계주는 그동안 너무 심려를 했고, 쌓였던 긴장이 갑자기 풀려서인지

더 이상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두한은 한숨과도 같은 큰 숨을 들이마셨다가 길게 내뿜었다.

그동안 궁금히 여겨왔던 많은 일들이 저절로 풀리는 듯싶었다.

박계주가 그다지 수입이 적지 않은 듯싶은데도 그처럼 돈에 쪼들려왔던 수수께끼가 풀렸다.

독립 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까지 돈을 꾸어달라고 했었구나.)

그럴 때마다 김두한은 마다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부터 달가워하지는 않았었다.

그것도 모르고 그가 돈을 갚으면 넙죽넙죽 챙겨 넣었었다.

정말 염치없는 놈이 되고 만 것이다.

그가 주먹패에 신변 보호를 희망해 왔던 것도 이 때문이었던 것이다.

언제 탄로가 나서 경찰에 붙들리게 될지 몰라 그는 불안했고,

항상 신경 과민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됐어. 이제 두 다리 쭉 펴고 잠잘 수 있게 됐어!”

박계주는 정말 기분이 좋은 듯 권하지도 않은 술을 들이켜 마시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별실 밖에서 떠들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김동회의 목소리였다. 늦은 시간에 나타난 것을 보니,

혼마찌쯤에서 자기네 패거리 혼마찌깡패와 한잔하고 오는 것이 틀림없었다.

하긴, 그는 혼마찌깡패이면서도 김두한과 워낙 친해 종로로 나오는 일이 많았다.

더구나 가찌도끼 바의 송채환과 동거 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밤이면 밤마다

가찌도끼 바를 찾았다.

김두한도 그 부하들도, 으레 그러려니 하고 그를 맞았다.

“두한이 어딨냐, 두한이 어딨어?”

커다랗게 소리치듯 떠들어대는 것을 보니,

그는 매우 기분 좋게 취해 있음이 분명했다.

“왜 그래? 나, 여기 있어.”

김두한은 별실 바깥쪽에다 대고 커다랗게 소리쳤다.

김동회는 훌쩍한 키를 꾸부정하게 구부리고는,

별실 안을 기웃거리듯이 먼저 머리만을 커튼 자락 안으로 디밀었다.

김두한이 여자도 없이 박계주와 단둘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사뭇 놀란 듯이 들어섰다.

“선생님도 여기 와 계셨군요?”

김동회는 박계주 쪽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하며, 맞은편 김두한의 옆자리에 앉았다.

김두한은 김동회가 달갑지 않을 것은 없었다.

하루를 못 만나면 서운하고 궁금해지는 사이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뛰어든 것은 반갑지 않았다.

이제껏 박계주와 나눈 대화가 너무나 중대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아직까지 가슴이 두근거리는 상태였다.

박계주는 자기와 같은 집에서 동숙을 하는 자신의 보호자인 김동회도

조심해서 꺼리는지 말을 뚝 그치고 말았다.

“너,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아서 야단이냐?”

김두한은 힘껏 껄끄럽게 말한 셈이었다.

그러나 김동회는 이제까지의 분위기를 전혀 알지 못했으므로

전혀 껄끄러운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분 좋지 않으면?”

“뭐가?”

“야, 김기환 형님이, 김기환 형님이 돌아오게 됐어.”

“무엇?”

김두한도 놀라서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김기환은 말할 것 없이 지난날의 김두한의 두목이었다.

오늘의 김두한이 있게 해준 주먹계의 선배이기도 하다.

바로 그가 꽃잡이인 번개 김우길의 배신으로 소매치기 두목으로 몰린 후,

그를 체포하려는 일본 형사들을 때려눕힌 죄로 만주로 피신을 해야만 했었다.

만약 그가 만주로 쫓겨나지만 않았더라도,

서울의 주먹계의 판도는 전혀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가 서울에 있었던들 김두한이 오늘처럼 수월하게 자신의 왕국을 구축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김두한이 마음속으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한 것은 경찰이나 헌병대가 아니었다.

진정으로 두려워한 것은 김기환뿐이었을지 모른다.

그러한 김기환이 돌아오다니!

그가 무사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는 일이라면 반가운 일이며,

반가워해야 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솔직히 반가운 일일 수만은 없었다.

김두한은 착잡해졌다.

소스라치듯 놀란 것도 이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