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8

오늘의 쉼터 2014. 8. 27. 20:56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8

 

 

 

귀에 솔깃했다 할 것은 없었지만, 한번 그렇게 해보고 싶은 마음이 인 것이다.

박계주 같은 존경할 만한 사람을 가까이 모셔본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떠돌이 신세를 면하고,

남들처럼 어엿한 ‘가정’을 한번 가져보고 싶었던 것이다.

사실 여관에서 동거 생활을 하다 보니 돈이 생각보다 많이 들어 생활비를 대느라

서로 정신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객지에서 오는 온갖 사람들이 드나드는 여관 생활이니 차분할 수도 없었고,

아기자기할 수도 없었다.

“돌아가서 생각해 보기로 하죠. 혼자 결정할 문제도 아니고.”

김동회는 여운이 많은 대답을 했다.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물론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송채환을 두고 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대답이 나왔다는 것은 반승낙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 됐어. 생각해 보긴 뭘 생각해 봐. 내일이라도 당장 이사를 오는 거지…….”

김두한이 단안을 내리듯 말했다.

두목 김두한이 단안을 내린 이상,

문제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여관으로 돌아온 김동회는 일단 송채환과 의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봐, 누가 돈암동에 방을 빌려주겠다는 분이 있는데,

우리 한번 그리로 이사를 가서 살아볼까?”

“돈암동요? 멀어서 어떻게?”

“하지만 전차가 있으니까. 종점에서 아주 가깝고 조용한 곳이거든…….”

“그래도…….”

송채환은 그다지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있지 않어? 박계주……, 《순애보》의 박계주 선생이 방을 빌려주시겠다는 거야.”

“박계주 선생요?”

송채환은 뜻밖이라는 듯 크게 놀랐다.

“응. 넓은 집에 식구가 없어 적적도 하고,

우리가 여관 신세를 지고 있다는 것이 듣기에 딱하셨던지…….”

김동회는 박계주의 요진보가 되기 위해서 그 집으로 이사를 간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송채환도 박계주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말에 마음이 놓이는 모양이었다.

우선, 그의 애독자로서 평소 존경해 온 분의 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것이 기뻤고,

그녀 자신도 여관 생활을 한다는 것이 입에서 신물이 날 만큼 지겨웠던 터였다.

“좋아요!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이렇게 해서 바로 다음날로 그들은 박계주의 문간방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삿짐이라야, 여관집에서 빌려준 이부자리와 몇 가지의 취사 도구,

그 밖에 송채환의 화장 도구 등이 고작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김동회와 송채환은 박계주의 집에서 새살림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의 생활도 6개월 이상은 지속되지 못했다.

직업 여성인 송채환이나 김동회의 귀가 시간이 일정치 않아 안집에다

문을 열어 달라기가 어려웠고,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6개월 동안 김동회는 많이 변화했고,

박계주에게서 사뭇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때로 몹시 돈에 쫓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순애보》로 명성과 부(富)를 함께 얻고 있는 그가 무엇 때문에

그토록 돈에 몰리는 것인지 짐작을 할 수 없었다.

월급이야 많든 적든 일정한 직장을 갖고 있으며,

부지런하게 원고를 써서 원고료 수입도 적지 않은 데다가,

무엇보다도 《순애보》의 인세가 꽤 많은 듯싶었다.

그런데도 무엇 때문에 돈에 쫓기는 것일까?

가족이라야 어린 남매를 두고 있을 뿐인 단출한 네 가족이다.

살림살이에 부담을 가질 정도도 아니었다.

술을 즐겨 마시고 술집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외박을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더러 술값을 치르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낭비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노름판에 드나드는 것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도 돈에 몰리는 까닭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박계주는, 어떤 때는 돈을 만드느라 바삐 뛰어다녔다.

그러면서도 김동회에게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곤 했다.

하지만 그의 보디가드로 뒤쫓아 다니는 김동회가 눈치를 못 챌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그는 돈을 김두한에게 꾸기도 했고,

때로는 김동회에게조차 돈을 융통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기 때문이다.

“어디다 쓰려고 그러시죠?”

김동회는 눈치를 살피듯이 하고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럴 때면 박계주의 대답은 언제나 똑같았다.

“당신은 몰라도 되오.

절대로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다른 사람이 눈치채지 않도록 말 조심해 주시오.”

신신당부하듯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두한이나 김동회에게서 돈을 빌리면 약속 날짜에 어김없이 꼬박꼬박 갚았다.

그럴수록 박계주가 돈을 어디에다 쓰는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박계주가 김동회에게 사뭇 진지한 얼굴로 부탁하는 것이었다.

“김두한을 좀 불러다 주시오.

오늘 낮 2시,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삼천리사 편집국에서 만나볼 수 있게 말이오.

알겠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각별히 주의해서 말이오.”

김동회는 내심 의아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그대로 김두한에게 전달했다.

“알겠어.”

김두한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도 의아하게 생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박계주는 김두한에게 힘에 부칠 만큼의 돈을 꿔달라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를 마다할 위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박계주는 약속한 날짜에 어김없이 돈을 갚았다.

그 신용도에 감탄을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무엇 때문에 그 많은 돈이 갑자기 필요한 것인가 항상 미심쩍었었다.

김두한은 또 박계주가 돈이 필요해진 것이려니 하고,

약속 시간에 삼천리사로 찾아갔다.

김두한은 종로꼬마 이상욱과 망치를 대동하고 있었다.

 박계주를 방문하면서 굳이 두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약속된 시간이 되었을 무렵,

두 사람이 곁에 있었기 때문에 그저 습관적으로 이끌고 갔을 뿐이었다.

남의 이목을 피해 아무도 눈치채지 않게 와달라는 당부가 있었으나,

백주의 종로 거리에서 누구의 이목을 피하고 누구의 눈치를 두려워한단 말인가.

그는 아무 거리낌도 느낄 것 없이 쳐들어가듯 빌딩의 계단을 밟았다.

박계주가 남의 이목을 피해 달라고 당부한 것은,

그저 돈을 꾸어달라기에는 체면이 있어,

 자존심으로 한마디 덧붙인 것이려니만 생각한 것이다.

박계주는 자신이 정해 놓은 약속 시간에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두한이 불쑥 방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랗게 미소지으려다가 뚝 웃음을 그쳐버렸다.

종로꼬마와 망치가 뒤따라 들어서는 것을 보고 곤혹스럽게 여기는 것이 분명했다.

그런 채로 그는 김두한 일행을 별실인 응접실로 안내했다.

김두한이 땅딸막한 키의 두 사나이를 양옆에 두고,

꾸부정한 자세로 서 있는 것을 보고,

박계주는 비로소 빙긋 웃으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또 누가 올 사람은 없소?”

아무도 몰래 혼자 와달라고 당부했는데,

왜 부하들을 거느리고 왔느냐고 빈정거림을 섞어 나무라는 것이 분명했다.

“아무도 없는데요.”

김두한은 곧이곧대로 대답하고,

박계주의 표정이 전과는 달리 좀 심각하고 진지한 것을 읽으면서 자리에 앉았다.

박계주는 무슨 말을 꺼낼 듯 꺼낼 듯하다가도 무엇을 주저하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김두한은 그가 다른 부하들 앞에서 돈을 꾸어달라기가 민망해서

머뭇거리는 것이려니만 생각했다.

“선생님, 아무 걱정 마십쇼.

우리들은 한 몸이나 다름없습니다.

태어난 날은 다르지만, 죽는 날을 함께하자고 맹세한 한 몸인걸요…….

거북하게 생각하실 것이 없습니다. 혹시?”

혹시 돈이 필요해진 것이냐 반문하려다,

그것도 실례일 듯싶어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것도 그렇겠지. 당신네들은 변함없는 친구 사이인 것을.”

박계주는 세 사나이 앞에 똑같이 ‘마꼬’ 담배 한 갑씩을 꺼내 디밀어놓으면서 말했다.

“혹시 아버님 소식이라도 들었소?”

“아뇨.”

김두한은 너무 뜻밖의 질문에 흠칫 놀라면서 대답했다.

“아니, 그저 당신은 친구도 많고,

친구들 가운데서 만주며 중국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은 듯싶어

혹시 무슨 소식이라도 들었나 싶어 물었을 뿐이오.”

그는 담배 한 대를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불도 붙이지 않았다.

김두한도 성냥을 그어 대주지 않았다.

그만큼 그 한마디는 충격적이었다.

바로 이를 노리고 박계주가 그런 질문을 먼저 던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김두한을 얌전하고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면 그 한마디가 가장 효과적이었을 테니까.

그러고 나서 박계주는 말머리를 돌리는 것이었다.


“나, 부탁할 일이 좀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신경(新京: 장춘) 가는 기차표 한 장만 사달라고……,

그래서 불렀는데……. 하긴 그동안 며칠 못 만나서 궁금하기도 했었고…….”

서론이 엄숙할 정도로 진지했던 것에 비해,

부탁이 의외로 간단한 것에 김두한은 싱겁다는 듯이 입술에 탄력이 없는 웃음을 웃었다.

“차표 한 장 사는 걸 갖고 뭘 그러세요? 선생님, 만주에 다녀오시려 합니까?”

“아, 아냐. 다른 사람이 갈 거요.

나 지금, 돈을 가진 게 없어 밤에 줄 테니까,

아무도 모르게 기차표 한 장 사주시오.”

“그까짓 기차표 한 장쯤이야 무얼 그러십니까? 그냥 사드리지요.”

“사람에겐 경우가 있지.

기차표 사다 주는 것만도 고마운데 거저 사달랄 수는 없지.

그러고 말이오…….”

박계주는 잠시 생각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기차표를 산 다음, 이따 밤 8시쯤 이 건물 밖, 왼쪽 골목 안에 전봇대가 있거든…….

그 전봇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중국옷을 입고 수염이 난 어떤 사람이 지나갈 거요.

그러면 두한 씨, 당신은 ‘웬 중국 사람이야?’ 하고 작은 목소리로 혼자 중얼거리란 말요.

그러면 그 중국 사람이 ‘네’ 하고 우리말로 대답하면서, 작은 골목 안쪽으로 들어갈 거요.

그러면 당신은 그를 뒤쫓아가서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

지나가는 척하다가 차표를 전해 주란 말요.”

생각 탓인지 박계주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입술까지 부르르 떨고 있는 것 같았다.

김두한이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간단한 일이었다.

기차표를 사는 것도 그러하지만,

기차표를 전달하는 것도 지극히 수월한 일이었다.

삼천리사 뒷골목 안의 전봇대라고 하면,

그가 기거하는 바로 조양 여관 앞이 아닌가.

아무도 수상히 여기지 않게 사람을 기다릴 수도 있었고,

기차표를 쉽게 전달할 수도 있을 성싶었다.

“그까짓 일이야 뭐…….”

“그러고 말이오.

기차표를 전달한 후,

그 사람 몰래 뒤떨어져 따라가서 그가 기차를 타고 떠나는 것까지 확인하고 와주시오.

난, 당신네들만 믿겠으니까……,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오.”

너무 애절하게 신신당부를 하니까,

아무것도 아닌 일이 사뭇 심각한 일처럼 생각되었고,

그렇게 부탁하는 박계주의 모습이 애걸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가보시오.”

김두한은 덩달아 마음이 급해지고,

공연스레 불안스러워지기까지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그러자 박계주가 다시 그를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아, 잠깐만……, 시간을 알고 가야지.

요즘 해가 길어졌으니까,

7시가 넘어야 어두워질 테니까,

그때 가서 기차표를 끊고,

일을 끝낸 다음 아, 어떡할까?

그래, 나 가찌도끼 바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있을 테니까,

모든 일 실수 없이 하고는 결과를 알려주시오.”

박계주는 김두한의 힘있는 어깨를 꽉 움켜잡듯 하며 당부하는 것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을 장황하게 과장해서 얘기하면 작은 일도 큰일처럼 여겨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언변이 있는 데다가,

사상이 있는 박계주의 말이었기 때문에 더욱 중대성이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김두한도 그러했지만,

종로꼬마 이상욱이나 망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이들은 뭔가 붕붕 뜨는 것 같은 기분으로 흥분이 되어,

서로가 들은 얘기를 비교해 가면서 재확인해 보는 것이었다.

김두한에게 아버지 소식을 들었느냐 물었고,

사사건건 절대 비밀로 하라 했고,

 신경에 가는 기차표는 아무나 살 수 있는데 이를 사달라고 이들에게 부탁했으며,

또 중국옷을 입은 사람이 어떻게 우리말을 알아들을 수 있으며

어떻게 우리말로 대답할 수 있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뒤따라가 기차를 타고 떠날 때까지 지켜봐 달라니,

모두가 의문투성이였다.

솔직히 어떤 음모에 말려들어 가는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김두한은 나름대로 아버지께서 살아 계셔서 어떤 연락을 보낸 것이 아닌지,

아니면 돌아가셔서 소식을 전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으나,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그저 밤이 되기만을 기다릴밖에 없었다.

초조하게 기다린 밤은 왔다.

이제 차표를 사러 갈 시간이 되었다.

김두한은 차표 사는 일을 종로꼬마와 망치에게 맡겼다.

이들이 김두한보다는 얼굴이 덜 알려져 있기 때문에 만약을 대비해서였다.

기차표 한 장을 산다는 단순한 일에 어떤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면,

그만한 대비는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약을 위해 망치까지 딸려 보냈으나 종로꼬마는

아무 일도 없이 쉽게 기차표를 사가지고 왔다.

기차표를 사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간단한 일이었으니까.

종로꼬마로부터 기차표를 받은 김두한은 조양 여관에서 때가 되기를 기다렸다.

8시가 가까워오자 김두한은 종로꼬마와 망치를 골목 양쪽에서 망을 보게 하고는

자신은 예의 전봇대 앞에서 잠시 서성거렸다.

그러자 과연 중국옷 차림의 팔자 수염의 사나이가 어둠 저쪽 편에서 홀연히 나타나

전봇대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웬 중국 사람이야?”

김두한은 박계주가 일러준 대로 나직한 목소리로 혼잣말처럼 말했다.

그러자 중국옷 차림의 사나이가 얼른 대답했다.

“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어둠이 짙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외등 불빛 하나 없는 골목 안은 너무 어두워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발소리를 들으며 쫓아야 할 정도였다.

김두한이 그 사나이의 곁으로 다가가 기차표를 내밀었다.

중국옷의 사나이는 오른손으로 재빨리 받아가지고는 중국인 특유의 팔짱을 끼고,

조선말로 나직이 고맙다는 짧은 인사만을 하고 황급히 골목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김두한이나 종로꼬마, 망치가 씩씩거리며 뒤쫓아가야 할 정도였다.

그는 경성역을 향해 급히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