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7

오늘의 쉼터 2014. 8. 27. 20:56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7

 

 

 

파출소 순사가 일정한 시간이 되면 사건이 있건 없건 관내를 한 바퀴 순시하는 것처럼,

김두한은 언제나 오전과 오후 한때, 반드시 종로 일대를 둘러보는 것을 관례로 하고 있었다.

이날도 망치·종로꼬마와 함께 막 오후 순시를 끝내고 가찌도끼 바로 돌아왔다.

마침 김동회가 김무옥과 함께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두한은 자연 그들의 자리에 모여 앉았다.

그러는데 웨이터 상길이 하얀 봉투를 김두한에게 내미는 것이었다.

“편지를 가져온 사람이 저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상길은 입구 쪽을 가리켰다.

김두한은 잠자코 가리킨 쪽을 바라보았다.

입구 쪽 빈 테이블에 학생풍의 젊은이가 김두한을 쳐다보기도 무섭다는 듯

외면을 하고 앉아 있었다.

편지는 월간 삼천리사가 사용하는 봉투에 담겨 있었다.

 박계주가 보낸 것이었다.

그러나 겉봉투만으로는 한문에 까막눈인 김두한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채로 봉투를 뜯었다.

사연은 길지 않았으나 만년필체의 흘려 쓴 글씨가 달필이었고,

군데군데 한문까지 섞여 있어 김두한에게는 역시 난해한 암호문 같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편지는 유식 무식 편에서는 우등생 격에 속하는 김동회에게로 넘어갔다.

김동회는 받아든 편지를 우선 목독(目讀)했다.

그도 흘려 쓴 글씨를 매끄럽게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박계주 선생이 우리를 초대하시겠다는구먼.”

“박계주 선생이 초대를 하신다? 우리를? 어디 큰소리로 읽어봐!”

김두한은 해득한 암호문의 내용이 더 의아하다는 듯 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흘려 쓴 글씨지만 두 번째로 읽는 글에 더듬을 것이 없었다.

김동회는 큰소리로 읽어주었다.

내용인즉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만나보고 싶고,

이것저것 의논하고 싶은 일도 있으니 오늘 저녁에 여러 친구들과 함께 꼭 찾아달라는 것이었다.

섭섭지 않을 만큼의 술상도 차려놓겠다고 첨부해 있었으며,

자택까지 이르는 자세한 약도와 함께 주소가 명기되어 있었다.

(웬일일까?)

하긴 한 며칠 박계주가 종로에 모습을 보이지 않아 궁금하게 여겨 왔던 터였다.

하지만 그저 ‘월경’ 때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잡지사는 여자의 생리처럼 달이면 달마다 한 번씩 무척 바쁜 때가 있다는

말을 박계주로부터 직접 들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젊은이, 알겠어. 우리 서넛이서 꼭 찾아가뵙겠다고 전하시오.

술은 우리가 몇 병 차고 가겠다고 그러시오.”

김두한은 무서워하는 놈 앞에 일부러 다가갈 것도 없다는 듯이

입구 쪽을 향해 커다랗게 소리쳐 주었다.

(어쩐 일일까? 무슨 변고라도 있는 것일까?)

청년이 물러간 다음에야 부쩍 궁금해지며 자세한 사연을 묻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가 없어 약속 시간도 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었다. 

박계주의 집은 돈암동 전차 종점 가까이에 있었다.

지금은 전차도 사라졌고 전차 종점도 없어졌지만,

바로 전차 종점에서 차를 내리자마자 왼편 쪽, 현재 복술가집이 나란히 늘어서 있는

골목 안 멀지 않은 곳의 오른편에 있었다.

크지는 않았지만 작을 것도 없는, 아담한 한식 기와집이었다.

전차에서 내린 김두한과 망치·김무옥·김동회는 잠시 까마득한 미아리고개를 바라보았을 뿐,

머뭇거릴 것도 없이 왼편 골목으로 꺾어들었다.

현재는 구배(勾配)를 사뭇 깎아 얕아졌지만,

당시만 해도 숲이 우거진 미아리고개 위는 까마득하게 바라보일 정도로 높았다.

전차 종점이라고는 하지만 신흥 주택 거리의 골목 안은 쓸쓸하리만큼 한가했다.

박계주의 집은 눈을 감고 가도 될 만큼 쉽게 찾았다.

골목 안이 복잡할 것도 없었지만, 박계주가 잡지 편집자답게 꼼꼼하게

약도를 그려놓았기 때문이다.

김두한과 망치·김무옥·김동회 등 장정 넷은 좌우 두 손에 똑같이 한 되들이 정종(청주)

한 병씩을 들고 있었다.

남의 집, 그것도 박계주의 집을 찾아가면서 빈손으로 갈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예의범절을 지독하게 따지는 위인들도 아닌 것이다.

심부름한 청년에게 말한 대로 약속을 지켜,

자기네들이 마실 만큼의 술병을 차고 간 것이다.

엄밀히 마셔 김두한패가 아닌 김동회가 따라나선 것은 박계주의 편지를 읽어준 덕분이며,

종로꼬마가 빠진 것은 그에게 다른 볼일도 있었지만,

한꺼번에 수뇌급이 종로를 비워놓을 수가 없어서 양보한 것이었다.

조용한 골목 안도 네 장정이 떠들썩하게 들어서자 꽉 메워진 것처럼 보였다.

미리부터 바깥을 내다보며 기다리고 있었던지,

김두한이 주인을 찾기도 전에 먼저 대문이 열리면서 박계주가 모습을 나타냈다.

항라 겹바지저고리의 조선옷 차림이었다.

대님도 매지 않고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린 것이, 평상시의 허드레옷인 듯싶었다.

“어서들 오시오. 먼 길을 오시라 해서…….”

박계주는 커다란 몸집의 김두한을 얼싸안고 맞아들였다.

첫발을 대문 안으로 들여놓으면서 김두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문 안 넓지 않은 앞마당이 눈이 부실 만큼 환하게 단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담하고 화려한 화단도 그랬지만,

계단을 만들어 층층이 아름다운 화분과 분재로 가득 장식되어 있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모두 모두가 마땅히 놓여 있을 자리에 놓여 있고,

자리를 하나 옮겨놓아도 안 될 것 같은 조화미(調和美)를 이룬 정원이었다.

청결하면서도 꼼꼼한 성격의 일면을 엿본 듯한 느낌이었다.

싸움을 생업처럼 삼고, 되는대로 살아가는 주먹패들도

그 정원의 아름다움에 저마다 황홀해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또 한 번 김두한을 놀라게 한 것은,

박계주가 네 장정을 대뜸 안방으로 모시는 일이었다.

“자아, 어서 이리 들어들 오시오.”

아직도 남녀간의 내외가 심한 시절인 것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친구의 집을 방문하면 초인종을 누르는 대신

‘이리 오너라’ 하고 주인을 찾는다.

이 경우 안주인이 직접 나서는 경우는 드물다.

대개 사내아이나 하녀 등이 나온다.

하녀도 여자는 여자인 것이다.

얼굴을 맞대지 않고 문 안에서 대꾸하거나,

문을 열었더라도 대문 뒤에 몸을 숨기고 수줍은 목소리만으로 대응했다.

부부가 나들이를 하는 경우도 아내는 한 발짝 뒤에서 따라왔다.

남녀가 팔짱을 끼고 길을 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시절,

우락부락한 주먹패들을 네 명씩이나 곧바로 안방으로 안내한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파격이 아니었다.

그만큼 박계주가 진취적이고 개방적이면서 대범한 성격의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장정들은 저마다 삐걱삐걱 마룻장을 울리며 안방으로 들어섰다.

마루 위도 그러했지만, 안방에도 책장에 책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고,

그것도 모자라 책장 앞에 책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주먹패들은 쌓여 있는 돈 더미를 쳐다보는 것보다도 더 경의에 찬 눈으로 책 더미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이미 식탁보에 덮인 교자상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식보를 헤치니 아직은 마른안주만 준비되어 있었지만,

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 것으로 예상했던지 은수저가 촘촘히 놓여 있었다.

“웬걸 이렇게 많이 차리셨습니까? 선생님 귀 빠진 날이십니까?”

“아냐, 아냐. 그동안 늘 얻어 마시기만 해서, 한번 대접하고 싶었다뿐이지…….”

박계주는 두 팔을 벌려 주먹패들을 상머리에 다가앉게 했다.

상 위에는 10명분도 더 되는 수저가 놓여 있었지만,

워낙 거대한 몸집의 젊은이들이었기 때문에

그 절반의 인원만으로도 전체의 교자상을 채웠다.

아마 음식도 10명분쯤 장만했겠지만,

이를 처분하기에 곤란할 것은 없었으리라.

김무옥 혼자서 먹어치우라 해도 능히 해치웠을 테니까.

그는 혼자서 설렁탕 곱빼기 다섯 그릇을 앉은자리에서,

보통 사람이 보통의 설렁탕 한 그릇을 먹는 시간에 먹어치우는 대식가였으니까.

그러나 누가 얼마만큼 먹고 마셨는가가 이날의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에 그쳤더라면 처음부터 얘기도 진전시키지 않았을 것이다.

술잔이 몇 순배 돈 다음, 김두한 편에서 먼저 운을 뗀 것이다.

“선생님! 저희들하고 의논하고 싶다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핫핫……. 별것도 아닌 것 갖구 의논을 해볼까 했었는데,

술 몇 잔 들어가니 배포가 커졌는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군, 헛헛.”

그럴수록 내용이 궁금해지는 것은 인지상정이 아닐까.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사실은 말이오.

나, 요즘 신변의 위협을 느껴 당신네들에게 보호 좀 해달라고 부탁해 볼까 했는데…….”

“그까짓 일이라면 누워서 팥죽 먹기로 쉬운 일이지만…….

선생님 같은 인격자가 신변의 위협을 느끼신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뭐, 대단할 것은 없지만 일종의 신경 과민이라고 할까……,

어쩐지 누군가에게 갑자기 습격을 당할 것만 같고……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경찰에라도 붙들려 갈 것만 같은 불안감에

잠도 제대로 잘 수 없는 형편이라니까.”

박계주는 다소 술기가 오른 불콰해진 얼굴로 계면쩍은 듯이 말했다.

다른 사람이 똑같은 말을 했더라면 비굴해 보였을는지도 모르지만,

그 늠름한 풍채 때문인지 오히려 위신이 있는 듯이 보였다.

“그거 큰 병인데요. 그래도, 그렇게 된 무슨 까닭이 있을 게 아닙니까?”

김두한이 염려스러운 듯이 물었다.

“까닭을 캐자면 전혀 없는 것도 아닐 터이지만,

큰소리로 말할 처지도 아니고…….

아무튼 너무 불안해서,

소심하게도 당신들에게 신변 보호를 부탁해 볼까 했었으니까…… 헛헛……

마음 약한 비겁한 놈이라고 비웃지들이나 마시오”

“아닙니다. 선생님처럼 민족 감정이 투철하신 분일수록

그런 위험은 실제로 더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아무 데서나 큰소리로 말씀하시는 것은 조심하시는 것이 좋을 듯싶군요.

지난번에 헌병이나 순사 끄나풀이 엿듣지나 않았을까 하고,

저희들까지 조마조마했었으니까요.”

싱가포르 함락 축하 행진이 있은 날 밤의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남들은 입에 올리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김좌진 장군의 이름을

함부로 외쳐대기까지 하지 않았었는가.

“헛헛.”

“하지만 염려 마십쇼.

누구든 선생님께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도록 보호를 해드릴 테니까요.

오늘 밤부터 당장 댁 주위의 파수를 보라고 아이들에게 일러놓죠.”

김두한은 선선히 장담했다.

“아냐, 아냐. 그렇게 되면 미안해서 내 마음이 더 불편하지.

사실은, 집도 넓고 방도 남겠다,

우리 집에서 함께 기거할 친구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랐었는데……. 헛헛,

그게 신경 과민이란 것이지. 아무 일도 없을 거요. 괜찮아, 괜찮아요.”

박계주는 부채질하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오늘 밤 돌아가서, 선생님을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애가 누가 있을지 생각해 보기로 하죠.

선생님을 가까이 모실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영광일 것을. 안 그렇습니까?

아무 염려 마시고 한잔 드시죠.”

김두한은 커다란 약주잔을 박계주 앞에 내밀었다.

이를 받아드는 박계주의 표정이 밝았다.

하지만 김두한의 말 한마디로 표정이 밝아졌다는 그 자체가 병이 아닐까?

(병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는걸.)

그렇게 생각한 것은 다름 아닌 김동회였다.

“선생님, 아무 걱정 마십쇼.

선생님 모실 적당한 아이가 없다면, 저라도 와서 선생님을 도와드릴 테니까요.”

정말 그런 마음이 있어서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박계주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한 말이었다.

그러나 박계주의 반응은 정말 뜻밖이었다.

“정말 그래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고마울까.”

“그게 좋겠군, 그게 좋겠어. 동회가 선생님을 보살펴드린다면 선생님도 든든하시겠구,

동회도 손해는 없을 거야.”

김두한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서는 것이 아닌가.

“좋아, 좋아.”

“그거 정말 좋은 일이군.”

망치며 김무옥까지 덩달아 손뼉을 치며 거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술김에 영문도 모르고 떠들어댔지만,

김두한은 벌써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내놓고 있었다.

박계주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깊은 신경 과민에 빠져들었는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이유야 어디에 있건 간에 그를 돕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만한 독립 사상을 갖고 있다면 어떤 위험이 뒤따를지도 모르는 일이다.

경찰이 뒤따를지도 모르지만, 악독한 일본 경찰이 자객이라도 풀어 그 생명을 노릴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을 스스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깊은 신경 과민에 빠져들게 된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의 신변 보호를 맡는다는 것은 의리 이상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그저 그의 저택의 파수를 보는 것만으로 그치지 않고 같은 집에

동숙케 한다는 것이 바람직한 일로 여겨졌다.

박계주의 신변을 보호한다는 뜻 이외에, 그를 안심시킴으로써

그의 병을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라면 김동회 이외에 적당한 인물이 누가 있단 말인가.

스승으로 모시기로 한 박계주 선생의 요진보(보디가드)가 아닌가.

조무래기 아이들 중 아무나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힘도 있어야 하지만 다소 머리도 있어야 한다.

그래도 김동회라면 일본말도 할 줄 알고, 말도 통할 만하다.

게다가 김동회는 지금 떠돌이 혼자의 몸이 아니다.

그는 가찌도끼 바의 송채환과 동거중이다.

그것도 뜨내기처럼 여관방에서.

차라리 이 기회에 박계주 집의 건넌방에서라도 살림을 꾸리게 하면

오붓하고 아기자기한 신접살림이 될 것이 아닌가.

(이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아닌가.)

김두한은 벌써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회, 그렇게 해. 내일이라도 당장 짐을 꾸려 송채환 아씨와 와서 살란 말야.”

김두한은 거의 명령에 가깝게 다부지게 말했다.

“그러면 정말 좋겠군.

송채환 아가씨는 나의 좋은 독자이기도 하니까 더욱 좋지.”

박계주는 입까지 커다랗게 벌리며 좋아하고 있었다.

농담이 진담 되고 말이 씨가 된다더니,

깊이 생각 없이 불쑥 내뱉은 말로 김동회는 코너에 몰린 꼴이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코너에 몰릴 정도로 난처한 일만도 아니었다.

돈암동이 종로와 지리적으로 멀다고는 하지만 전차가 있으니

교통이 불편하다 할 것은 없었다.

실제로 여자와의 난생처음의 동거 생활이 여관 신세라는 것은

불편하기 짝이 없는 일이기도 했다.

한번 남들처럼 자리를 잡고 어엿한 신혼 살림의 단꿈도 꾸고 싶었다.

김동회의 마음이 동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