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5

오늘의 쉼터 2014. 8. 27. 20:54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5

 

 

 

민자는 물론 여관방으로 급행했다.

“조그만 가재를 잊지 않고 불러주셔서 고마워요.”

민자는 여관방으로 들어서면서 함박 웃음을 마음껏 흘렸다.

“어서 오슈. 밤늦게 불러서 미안하구먼.”

그때까지 이부자리에 엎드려 《순애보》를 더듬더듬 읽어 내려가고 있던 김두한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맞았다.

어깨 근처의 실밥이 터지기도 하고 군데군데 구멍이 나기도 한 내복 차림이었다.

“어머나! 그럼, 여관방으로 불러들이시면서 밤이 늦지 않으면 어떡해요?

대낮부터 부르시나요? 훗훗…….”

민자는 뽑혀오기라도 한 것처럼 기분이 좋아서 캬들거렸다.

“어서 옷을 벗어.”

“원, 성미도 급하시긴…….”

민자는 곱다란 눈웃음을 지으며 눈을 흘기는 척했다.

“어서 외투를 벗고 앉으란 말여.”

외투를 벗은 민자는 술자리에서 급히 뛰쳐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깨끗한 조선옷 차림이었다.

김두한은 민자의 손을 잡아 옆에 끌어 앉히면서 다짜고짜로 물었다.

“민자 아씨는 《순애보》란 소설을 읽어보셨나?”

“《순애보》요?”

민자는 전혀 예상 밖의 질문이라는 듯,

아니면 묻는 진의를 캐어보려는 듯 김두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응, 박계주의…….”

“그럼요! 요즘, 《순애보》 안 읽은 사람이 있나요? 두 번씩이나 읽었는데…….”

“두 번씩이나? 허어! 그럼 오늘 밤, 세 번째로 읽어줘야겠어.”

김두한은 무턱대고 소설책을 펼쳐놓는 것이었다.

민자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유난히 속눈썹이 긴 눈을 자주 깜박거렸다.

“응, 두 번씩이나 읽으셨다면 처음부터 읽을 것도 없겠군.

 응, 이 대목부터……. ‘인순이는 자기를 인공 호흡시켰다는 말에’

응, 응. 이 대목부터 커다란 목소리로 읽어주셔야겠어.”

김두한은 책갈피를 펼쳐놓고는, 책을 민자 앞으로 디밀었다.

종로 용수가 민자를 부르러 부용으로 간 동안,

더듬더듬 읽은 다음 대목부터 읽으라는 것이었다.

민자는 소설책을 받아들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설마 하니, 소설을 읽어달라기 위해 불렀으리라고는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김두한의 넓은 가슴에 안기고 싶어 달려왔다.

또다시 그의 거구가 주는 중압감·중량감을 가슴 벅차게 느끼고 싶어 달려온 것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소설을 큰소리로 읽으라니,

뭐 누구를 시험하려는가 싶어 얼른 읽어 내려갈 수가 없었다.

“아니, 어서 읽어달라니까…….

나, 오늘 밤 안으로 이 소설책을 떼어야 한단 말요.

그런데 내 눈이…… 보쇼,

이렇게 작아서 어디 빨리 읽을 수가 있어야죠. 으흐흐흐.”

김두한은 실눈이 되어 웃었다.

정말로 작은 그의 눈이 실눈이 되자 숫제 감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웃음기를 거둔 그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자아, 어서, 빨리.”

그 표정이 험악해 보일 만큼 진지하게 변했다.

 

부릅뜬 김두한의 눈은 무서웠다.

주먹을 휘두르는 것만큼 섬뜩했다.

민자는 정말 주먹이 날아 들어오는 것만 같아 고개를 움츠리며 우는 목소리로 말했다.

“성질도 급하시기도 하지. 누가 밖에서 엿들었다간, 뭐 하는 줄 알겠어요.”

그 말에 김두한은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핫핫핫! 알았어, 알았어요. 사실은 말이지……,

내일 박계주 선생을 만나기로 했단 말여.”

“어머나, 박계주 선생을요?”

“그래요. 그런데 선생의 소설도 읽어보지 못하고 어떻게 선생을 만나겠어?

그래서 오늘 밤 안으로 소설을 다 읽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까막눈이나 다름없는 내가

하룻밤 사이에 읽어낼 자신도 없고……,

그래서 민자 아씨에게 부탁하는 건데, 그래도 안 읽어주겠어요?”

김두한은 사실을 털어놓고 차라리 사정을 했다.

그제야 민자는 납득이 간다는 듯 환한 얼굴이 되었다.

“어머나, 박계주 선생을 다 만나시다니.”

부러움 섞인 말과 함께 김두한이 펼쳐놓은 대목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청년의 이 대답을 듣는 인순이는 자기 몸이 알지 못하는

그 남자에게 안겨서 보트 위에 누여졌을 것을 생각하고,

더욱이 인공 호흡을 시키느라고 그 남자의 손이 자기의 팔을 만지고

자기의 젖가슴과 배를 주물렀을 것을 생각하고…….’

비교적 낭랑한 목소리로 거침없이 읽어 내려갔다.

김두한은 팔베개를 하고 누워 눈을 스르르 감고 경청하고 있었다.

너무 진지하게 듣고 있기 때문에 민자도 신이 나서 열심히 읽었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다가 문득 김두한 쪽을 바라보았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있던 김두한은 어느덧 자세를 고쳐,

베개를 베고 반듯하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는 골지 않았지만 깊이 잠들어 있을 때처럼 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어머나, 남에게는 소설을 읽으라 해놓고, 혼자 잠들어버리는 법이 어딨어요!”

민자는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김두한은 눈을 번쩍 떴다.

“잠들다니, 내가 잠들다니! ‘그러나 우리는 나가다가 잡힐 몸,

만일 이 감옥을 무사히 탈출한다고 할지라도 국경을 넘지 못해서 잡히고 말 몸,

비록 잡히지 않는다 해도 용서하십시오.

나는 탈출하고 싶진 않습니다.’ ‘왜요?’ ‘묻지를 말아주십시오.’

문선이는 범죄자를 데리고 탈출하다가 잡힌 계집이라는 누명을 명회에게

씌우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방금 민자가 읽다가 중단했던 그 대목을 김두한은 거의 글자 한 자도 틀리지 않고

줄줄 외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좀더 빨리, 빨리 읽어주시오.

뒤가 궁금하고 답답해서 못 견디겠구먼.”

민자는 김두한의 암기력에 일종의 공포까지 느꼈다.

(무서운 남자! 이 사람이 좀 배우기만 했었던들…….)

그녀는 다시 소설책을 들었다.

자정이 지난 듯, 웅성거리던 거리의 소요 소리도 멈추었다.

지축을 울릴 듯이 들려온 전차의 차바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민자는 계속해서 읽어 내려갔다.

목이 타고 말라붙어,

혀끝이 고열 환자처럼 말려드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그녀는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김두한이 너무나 진지하고 심각하게 듣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두한은 이따금 한숨을 추스르기도 하고 몸이 거북한 듯 뒤채기도 했지만,

그것은 자리가 거북해서가 아니라 소설의 내용이 안타까워서 괴로워하는 것이 분명했다.

민자는 혀끝이 말려들다 못해 혓바닥이 갈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읽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깊은 밤, 젊은 남자와 여자가 같은 여관방에 있다면,

으레 있을 수 있는 일이 그들 사이에는 없었다.

장난기로라도 허리에 손을 감거나 무릎 위라도 쓰다듬을 만하련만,

김두한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는 진지했던 것이다.

그 진지함은 일종의 박력처럼 민자에게 육박해 오는 것이었다.

그 박력에 짓눌려서 그녀는 읽기를 중단할 수가 없었다.

이제 새벽이 가까워온 듯싶었다.

동대문 쪽에서 시내 쪽으로 질주해 오는 첫 전차의 궤도 소리가 울려왔다.

목독(目讀)으로라면 좀더 속도가 빨랐겠지만,

일일이 소리를 내어 읽어야 했으므로 새벽이 가까워도 절반을 겨우 넘겼을 뿐이었다.

두부 장수의 종소리며,

새벽의 골목 안을 누비고 다니는 행상인들의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 이 시간이면 김두한이 자리에서 일어날 무렵이었다.

간밤에 아무리 늦게 자도 술에 취했어도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자신이 아무리 게으름을 피우려 해도, 주변에서 그대로 놓아두지도 않았다.

종로꼬마며 심청, 김무옥 등이 삼청 공원으로 운동을 하러 가기 위해 몰려들기 때문이다.

같은 여관에서 기거하는 종로꼬마와 심청은 간밤에 언제 돌아왔는지 모를 정도로

밤늦게 취해서 돌아온 것이 분명한데, 벌써 일어나서 수선을 떨었다.

“야, 두한이. 무얼 꾸물거리고 있어?”

종로꼬마는 김두한이 민자와 함께 있는 것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것인지,

후닥닥 미닫이를 열어젖히는 것이었다.

두목이 자는 방을 함부로 열어젖힐 수 있는 것은 종로꼬마나 그 밖의 몇몇 참모급들뿐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하지만, 여자와 함께 자는 방문을 느닷없이 열어젖히다니.

아마도 김두한이 여자를 데리고 여관으로 온 일이 없었기 때문에,

전혀 예상을 못 했던 모양이었다.

문을 연 종로꼬마는 흠칫거릴 만큼 놀랐다.

방 안에 여자가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김두한은 반듯하게 누워 있었으나,

여자는 치마저고리를 단정히 입은 채,

옷고름 하나 풀지 않고 무릎을 세운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이다.

꼭 사교(邪敎) 단체의 교주 앞에서의 의식(儀式)만 같았다.

“난 오늘만은 못 가겠어. 《순애보》 소설책을 마저 읽어야만 하니까.”

거의 정오 무렵이 되어서야 소설 읽기를 마쳤다.

목이 쉴 정도로 소설을 읽은 민자는 지칠 대로 지쳐서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그녀를 위로하고 그 성의에 보답할 길은 그것밖에 없다는 듯이,

비로소 그녀의 옷고름을 신랑처럼 풀어주고, 속치마를 헤집었다.

저항도, 이렇다 할 반응도 없는 기진한 여자와 맨바닥에 뒹군다는 것은

또 다른 신선감을 주었다.

그것으로 피로를 느낄 그는 아니었다.

오히려 새벽 운동을 끝낸 다음과 같은 산뜻한 활력을 얻은 기분이었다.

김두한은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날듯한 기분으로 삼천리사로 달려갔다.

《순애보》를 끝까지 통독했으므로,

이제 박계주를 만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듯한 느낌이었다.

밤새워 책을 읽은 피로 같은 건 있지도 않았다.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의 가슴 뻐근한 감동 하나만으로도 피로감 따위는 씻고도 남았다.

그는 4층 삼천리 편집실까지 계단을 두 개씩 밟으며 뛰어올랐다.

 숨 하나 차지 않았다.

박계주는 마침 사무실에 있었다.

비교적 널찍한 방 안에 여러 개의 책상이 있었으나,

그때가 점심 시간이어서인지 박계주와 사환 아이 하나뿐,

편집실 안은 텅 빈 듯 조용했다.

나비 넥타이 차림의 말쑥한 젊은 신사는 한가운데 큰 테이블에 앉아

무슨 서류인가를 들척거리고 있다가,

불쑥 들어서는 김두한을 발견하고 벙싯 웃기부터 했다.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소가 부드러워서인지 오만을 느낄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가 지닌 권위를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김두한은 뚜벅뚜벅 다가가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는 것에 길이 들지 않아서인지,

생나무를 뚝뚝 분지르는 것처럼 딱딱해 보였다.

그러한 그를 박계주는 경계하듯 바라볼 뿐이었다.

“어젯밤에는 저희 아이들이 선생님을 못 알아뵙고 버릇없이 굴어서……. 용서하십쇼.”

“뭘요……, 나도 술이 좀 과했던 것 같소.”

굵직한 목소리의 대답 속에는 아직도 경계의 빛이 풀리지 않아 있었다.

“《순애보》를 읽고 박계주란 소설가가 어떠한 얼굴일까,

어디에서 살고 계실까, 무척 뵙고 싶었는데,

이처럼 지척에 두고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김두한은 자랑스러운 듯이 어깨를 폈다.

《순애보》를 읽었다고 내세울 수 있는 자기 자신이 정말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박계주의 표정에 어려 있던 경계의 빛이 당장 누그러졌다.

무지막지한 주먹계의 두목으로만 알았더니,

《순애보》를 다 읽다니?

그것은 놀라움인 동시에 기쁨이었다.

그러기에 작가란 자기 엿을 사주면 무조건 고마워하는 숙맥이라 하지 않았는가.

“아니, 당신이 《순애보》를 다 읽었단 말요?”

그는 비로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악수를 청하는 손을 내미는 것이었다.

“아, 그럼요. 요즘 세상에 《순애보》 안 읽은 사람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김두한은 환하게 한번 웃고 나서 궁금해서 못 견딜 일부터 묻고 나섰다.

“한데 선생님은 어떻게 우리 아버님, 김좌진 장군을 아시죠?”

박계주는 가찌도끼 바에서 김좌진 장군의 이름을 커다랗게 소리쳤을 때와는 달리,

사환 아이밖에 없는 실내를 조심스러운 듯 둘러보았다.

그리고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이듯이 말하는 것이었다.

“청산리 싸움의 영웅 김좌진 장군을 내가 왜 모르겠소?”

“청산리 싸움이라뇨?”

김두한은 허겁지겁 물었다.

“저런!”

박계주의 입가에 엷은 웃음기가 흘렀다.

사람을 멸시하는 듯한 미소였다.

김두한에게는 그렇게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 멸시도 감수할밖에 없었다.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면서, 청산리 싸움을 모르다니…….”

박계주는 혀를 차듯 말하며, 김두한을 응접실인 옆방으로 데리고 갔다.

청산리(靑山里) 싸움.

1920년 10월,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대한 독립군이,

함경북도 나남(羅南)에서 북상해 온 일본군 제21사단과 시베리아에 출동해 있던 제19사단,

그리고 만철수비대(滿鐵守備隊) 등 3개 사단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적을 교묘히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構) 청산리의 협곡으로 유인하여,

그 10분의 1도 안 되는 병력으로 3개 사단을 섬멸한 대첩이 곧 청산리 싸움이다.

독립군의 희생자는 150명이었던 것에 비해,

일본군은 전사자만도 3300명에 이르렀다는,

전사상 그 유례를 찾기 힘들 만한 신화와도 같은 기적의 승리였다.

하긴 박계주도 청산리 대첩의 전말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출생지가 간도(間道) 용정(龍井)이며,

20여 세 때까지 소·만 국경의 한촌에서 소학교 교편 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청산리 대첩에 대해서는 어른들로부터 들은 얘기가 많았다.

원래 구변이 좋은 그는 이를 구수한 이야기투로 김두한에게 전해 준 것이다.

김두한은 얼굴까지 빨갛게 붉어진 흥분 상태로 박계주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그럼 아버님 김좌진 장군은 지금 어떻게 되셨습니까?”

김두한은 물어뜯을 듯한 사나운 얼굴이 되어 물었다.

박계주는 이에 이내 대답할 수가 없었다.

괴로운 것을 억지로 참는 듯 미간을 찌푸리고 한참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건 나도 분명히는 모르지만……, 일설로는 전사하셨다는 풍문도 있소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구요?”

흥분되어 있던 김두한의 얼굴이 창백하리만큼 푸르죽죽하게 변색이 되었다.

“풍문은 어디까지나 풍문이니까 믿을 수는 없지요.

더구나 청산리 전투 이후, 보복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군이 자객을 풀었기 때문에

독립군에서는 장군이 전사했다고 거짓 정보를 흘렸을지도 모르고…….

게다가 장군의 용맹이 너무 알려졌기 때문에 이를 시샘하는 무리들 중에

장군의 이름을 사칭하는 자도 있어,

전사했다는 장군이 진짜 김좌진 장군이었던 것인지 아닌지 모르는 일이란 말요…….

중요한 것은…….”

박계주는 오랜 시간의 얘기로 입술이 말랐는지 혀끝으로 입술을 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