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4

오늘의 쉼터 2014. 8. 27. 20:53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4

 

 

 

박계주는 양옆에 김윤희와 송채환,

두 여인을 데리고 앉았어도 도무지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하찮은 일로 최정희와 말다툼을 한 것이 몹시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게다가 마치 전쟁이 끝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마치 조선이 광복이라도 된 것처럼 미쳐 날뛰는 거리의 소동은 무엇이란 말인가.

한심스러웠다.

가슴을 치고 싶도록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기분이 언짢은 것에 비해 술은 일찍부터 취했다.

늦은 시간의 빈속인 데다가,

기분이 상한 김에 자기도 모르게 마셔댄 술이 폭주가 된 모양이었다.

알딸딸하게 취했다. 삼천리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전혀 입에 대지 않은 술이었지만,

사이다에 술을 타서 마시며 배운 술이 이 무렵엔 상당한 주량이 되어 있었다.

술을 마시면 누구든 취한다.

술에 취하면 또 누구든 평소의 자기답지 않게 변하게 마련이다.

박계주도 취하면 주사라고까지는 할 수 없었으나 약간의 술버릇이 있었다.

기분이 좋으면 좋아서 다변했지만,

기분이 언짢으면 이죽거린다고 할까 깐족거린다고 할까,

빈정거리기를 잘했다.

머리에 가득 찬 자존과 오기가 술기운을 빌려 삐죽삐죽 비어져 나오는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그 오기와 자존이 삐죽삐죽 비어져 나오는 정도가 아니라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일이 터지고 만 것이다.

바로, 비어 있는 테이블 하나 건너의 옆자리에서는 아까부터 일단의 주먹패들이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술에 취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에 무관심했다.

그쪽을 거들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차츰 술기운이 오르자,

신경을 자극해 왔다.

“무조건 항복, 예스까 노까?”

여드름투성이의 조그만 꼬마가 탁자를 두드리며 상대에게 윽박질렀다.

“대답을 내일 아침까지 기다려주시오.”

“그럼, 그때까지 우리는 계속 포격을 가하겠소!”

앞자리의 멀쑥하게 큰 놈이 눈을 슴벅거리며 고개를 푹 수그린다.

“그래도 좋소? 그래도 무조건 항복을 안 하겠소?

얼른 대답하시오. 무조건 항복, 예스까 노까?”

꼬마는 다시 주먹으로 탁자를 두드려댄다.

눈을 슴벅거리고 있던 장대 같은 녀석이 마침내 대답한다.

“예스!”

그러자 그 자리에 앉아 있던 패거리들이 일제히 박장대소를 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영국의 퍼시발 장군의 항복 장면을 멋대로 살을 붙여 각색까지 하고서는

실연(實演)을 하는 것이었다.

물론 여드름투성이의 꼬마는 종로꼬마였고, 키다리는 장대였다.

종로꼬마는 영락없는 야마시다 장군이었고,

장대는 어김없는 퍼시발 장군의 모습이었는데,

이들은 이것이 재미있어서 마구 웃음을 터뜨리고 떠들어대는 것이었다.

“야, 내일부터 우미관에 붙이자구, 우미관에 붙여!”

“그래, 그래! 틀림없이 손님이 모여들 거야, 왓핫핫!”

슬며시 박계주의 비위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수 있었다.

자존과 오기가 삐죽삐죽 비어져 나왔을 정도였다.

그저 기분 나쁜 듯 주먹패들을 쏘아보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쏘아본다는 자체가 주먹패들에게는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그들의 표현대로 ‘째리는’ 것이 되니까.

거기서 눈길이 맞부딪치기만 하면, ‘뭘 봐?’ 하는 한마디로 터지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먹패들은 자기 자신들에게 열중해 있었기 때문에 박계주가 쏘아보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아, 기분 좋다! 우리, 노래라도 부르자!”

누군가가 술에 취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리고 손뼉을 치고 박자를 맞추면서 찢어질 듯한 커다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보라, 동해의 하늘이 밝고.”

일본의 군가였다.

모든 군가가 그러하듯이 씩씩한 노래였다.

그러자 그의 선창에 따라,

자리를 함께 한 패거리들이 일제히 소리를 모아 합창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침 햇살 높이 빛나면.”

손뼉을 치며 장단을 맞추는가 하면,

그 장단에 맞춰 아래위로 신나게 손을 내휘두르는 자도 있었다.

그 자리의 주먹패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좌석의 주객들마저 여기에 맞춰 목청껏 합창을 하는 것이 아닌가.

“천지의…….”

그때였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박계주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리친 것이다.

“듣기 싫어! 닥치지 못해!”

청천의 벽력 같다는 소리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여럿이 합창하는 목소리를 제어하고도 남았다.

합창 소리가 뚝 그쳤다.

뚝 그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그의 노성은 우렁찼다.

“이 멍청한 놈들아! 뭐가 좋다고 신이 나서 법석들이야!

그래, 부를 노래가 없어 일본 군가를 불러?”

듣기 싫다고 소리칠 때보다는 낮은 목소리였다.

그러나 충분히 중량감이 실린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주먹패들은 그 위엄을 위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디서 굴러먹은 개뼈다귀인지 모를 놈이 기어 들어와서는…….)

자기네들의 흥을 깨게 한 놈이 괘씸할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뭣이 어쩌구 어째!”

민첩한 종로꼬마가 한달음에 달려들었다.

머리 빠진 개고기·장대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안 돼요, 안 돼! 이러시면 안 돼요!

이분은……, 이분은 아주 점잖은 분이시란 말예요.”

김윤희가 필사적으로 박계주를 감싸고 종로꼬마에게 애원을 하지 않았던들

불같은 성미의 그의 주먹이 벌써 날았을 것이었다.

아니, 김두한과 김동회가 때마침 들어서지 않았던들,

사태는 또 어떻게 급변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여기서, 박계주가 김좌진 장군의 이름을 들먹이며 김두한에게 호통을 치게 된

전말은 이미 소개한 대로다.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던 김두한은

박계주가 문 밖으로 나가버리자,

그제야 그가 사라진 사실을 깨달았다.

놓쳐서는 안 될 사람을 놓친 듯싶어 뒤늦게야 허겁지겁 뒤쫓아 나갔다.

그러나 박계주는 이미 인파 속에 몸을 감추어 보이지 않았다.

거리는 싱가포르 함락의 축하 행진과 이를 구경하는 군중으로 온통 들끓고 있었던 것이다.

인파를 헤치고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찾아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는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어깨가 처진 모습으로 가찌도끼 바로 돌아왔다.

아직 추운 겨울 날씨였으나, 그의 이마에는 진물 같은 식은땀까지 뱄다.

김두한이 들어서자, 떠들썩했던 장내가 다시 조용해졌다.

그의 표정이 심각한 정도를 지나, 처절해 보일 만큼 침통했기 때문이다.

주먹패들 가운데에는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자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모르고 있었다.

알고 있는 자들도,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독립 운동의 ‘도’자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삼엄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런데 박계주란 그 사람은 김좌진 장군의 이름을 소리치듯 외쳐대지 않았는가.

다행히 싱가포르 함락의 축제 기분에 들떠 있어서인지,

항상 깔려 있다시피 한 형사나 그 끄나풀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좌진 장군의 존재를 알고 있는 주먹패들은 그 이름을 알고 있음으로 해서,

모르고 있는 자들은 모르고 있는 자들대로 이 이름 한마디만 듣고도 두목 김두한이

엄청난 충격을 받아 쩔쩔매고 있는 사실 하나만 보고서도 숙연해지는 것이었다.

“두한아, 미안하다.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실수를 해서…….”

종로꼬마가 정식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나 김두한은 이에 대꾸도 하지 않고,

비어 있는 김동회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람을 잘못 보기는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박모라는 이름을 듣고서도 그가 누구인지 짐작도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분이 누구시라 했지?”

김두한은 힘없는 목소리로, 맞은편에 앉아 있는 김윤희에게 물었다.

“박계주요.”

“박계주? 뭣 하는 사람이라 했지?”

“소설가요.”

“소설가?”

“《순애보》란 소설을 쓴 유명한 소설가란 말예요.”

김두한은 물론 박계주란 이름을 들어보기도 처음이었지만,

순애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를 만큼 생소했다.

그가 알고 있는 소설가란 방인근뿐이며,

읽어본 것(?)은 언젠가 정진영이 대신 읽어준 《무쇠탈》뿐이지 않은가.

그는 소태를 씹은 듯 입 안이 쓰디썼다.

실내의 분위기는 술집답지 않게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러자 윤희가 분위기를 바로잡으려는 것처럼, 한껏 재담인 셈으로 말했다.

“동생두. 아라시 간주로오(嵐寬壽郞)나 이찌가와 우다에몬(市川右太衛門) 같은

어려운 이름은 알면서 박계주를 모르다니, 창피한 줄 알아야 해요. 후훗훗…….”

아라시 간주로오나 이찌가와 우다에몬은 당시의 일본 검객 영화의 주연급 배우였다.

김두한은 유난히 영화 구경을 좋아해서 일본 검객 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보았다.

일본말은 할 줄도 모르면서, 영화 배우 이름은 다르르하게 외고 있었다.

특히 〈주신꾸라(忠臣藏)〉 같은 재미있는 영화를 보고 온 날의 술좌석에서는

항상 영화 얘기가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일본말 대사를 알아듣지도 못했을 터이면서도 그 줄거리를 훤하게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주연급 배우의 이름을 자기 집 종 이름 부르듯 하며,

신이야 넋이야 떠들어대며 옮기기를 잘했던 것이다.

김윤희가 이를 두고 빈정거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무거운 자리의 분위기를 덜어보려는 속셈으로 지껄이는 것이었다.

“《순애보》 같은 재미있는 우리 소설은 하나도 읽지 않고,

일본 칼싸움 영화만 좋아하는 것도 창피한 일이구요. 안 그래요? 호홋.”

김윤희에게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감히 주먹계의 두목에게 그런 무엄한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누이, 동생 하는

사이의 여자의 특권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말에 김두한은 솔직히 무안함을 느꼈다.

박계주란 소설가가 어떤 소설을 썼는지는 모르지만,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알고 있는 소설가의 소설도 안 읽었다는 것이

큰 창피로 여겨진 것이었다.

“그래, 읽어보지, 읽어봐. 상길아, 너 빨리 책방에 가서 거 뭐, 《순애보》라나?

박계주의 소설책 하나 사와!”

상길이 책을 사 갖고 온 것은 물론이었다.

이날, 김두한은 늦게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남들이 감히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꺼리는 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이름을 서슴없이

소리치면서 힐책한 소설가 박계주를 만났다는 큰 충격 때문이었다.

(내일 당장 박계주란 소설가를 만나뵈러 갈 테다.

그를 만나러 가면서 그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면,

윤희 누이의 말처럼 큰 창피가 아닌가!)

빨리 여관으로 돌아가서 소설을 읽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조양 여관으로 돌아온 김두한은 자리를 펴고, 그 위에 누워서 소설책을 펼쳐들었다.

책갈피를 펴고 천천히 소설을 읽기 시작한 김두한은

그 첫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암담함부터 느꼈다.

이처럼 떠듬거리며 읽어 내려가다간 어느 세월에 이 두꺼운 소설을 다 읽는단 말인가.

정진영이 가르쳐주어서 간신히 언문(국문)을 떼었다고는 하지만,

버젓하게 책을 펴들고 읽어본 일은 없었다.

도저히 읽어낼 가망이 없었다.

“야, 거기 누구 없냐?”

그는 밖에다 대고 커다랗게 소리쳤다.

“네, 부르셨습니까?”

밤새워 교대로 불침번을 서는 똘마니급의 종로 용수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주먹은 보잘것없었으나, 입심이 좋아 ‘말펀치’로 한몫 보았다.

원래는 그저 용수로 통했으나, 같은 이름의 용수가 마포로부터 넘어온 후,

그와 구별하기 위해 종로 용수로 부르는 오랜 심복이었다.

“종로 용수냐? 너, 가서 부용의 민자 아씨를 좀 불러다 줘.”

종로 용수는 정말 뜻밖이었다.

도시, 두목 김두한이 이처럼 일찍 여관으로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지금, 거리는 예의 싱가포르 함락 축제로 돌개물을 휘저어놓은 듯 온통 소용돌이치고 있다.

이런 시간에 두목이 그다지 술에 취하지도 않은 모습으로 돌아온 것부터가 이상했다.

게다가 두목은 성서를 옆에 낀 전도사처럼 술 두꺼운 책을 소중한 듯 옆에 끼고 있었다.

김두한은 원래 책과는 무관한 인물이었다.

그가 책을 읽는 것을 본 일도 없지만, 책을 들고 있는 것조차 본 일이 없었다.

그러한 그가 책을 들고 다니다니!

종로 용수가 두 번째로 의아하게 생각한 일이었다.

그런데 김두한은 부용의 민자 아씨를 여관으로 불러오라지 않는가.

그는 의아하게 생각했다기보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두목이 여자를 여관으로 불러들인 일이 아직껏 한 번도 없었지만,

부하들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킨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네? 민자 아씨를 불러오라구요?”

그는 자기 귀를 의심하는 듯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웬 말이 많아? 불러오라면 불러오지!

나, 지금 몹시 급하니까 되도록 빨리, 당장!”

종로 용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급하다니, 여자가 급하다니? 태양을 삼킨 태몽이라도 꾸었단 말인가?

 갑자기 여자가 급해졌다니!

물론 두목도 펄펄한 남자인 것이다.

여자를 마다할 까닭이 없었다.

실제로 그의 주변에는 여자가 많았고, 여자로부터의 인기도 높았다.

직접 가까이 한 여자도 몇몇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다른 주먹계 ‘형님’들처럼 여자를 밝히는 것 같지 않았다.

동거하는 여자도 없고, 여자를 여관으로 불러들이는 일도 없었다.

그러한 그가 오늘 밤따라, 급하다고 하면서 당장 여자를 불러오라는 것이다.

그것도 지명을 해서.

종로 용수는 정말 깜짝 놀란 듯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어느 영이라고 머뭇거릴 것인가.

당장 부용으로 달려갔다.

민자는 마침 손님방에도 들지 않고,

 대기실에서 다른 여급들과 함께 화투를 치면서 손님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밤은 사람들이 축제 분위기의 거리로 쏟아져 나간 때문인지 손님이 뜸했다.

거기에 종로 용수가 나타난 것이다.

“민자 아씨, 우리 오야지가 수청을 들라 하시는데…….”

“정말?”

“정말이지 않고! 빨리 서둘러! 몹시 급하시대, 핫핫!

하지만 웃을 일이 아니지.

꾸물거리고 있다간 아씨의 다리가 먼저 부러질 테니까, 빨리, 빨리…….”

민자인들 어느 명이라고 거역하겠는가.

부랴부랴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민자의 등뒤에다 대고,

다른 여급들이 시샘하듯 말했다.

“재수 좋은 과부는 자빠져도 요강 뚜껑에 자빠진다더니,

저 조그만 계집애는 운수도 좋지. 물어도 아주 큼지막한 것을 물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