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장군의 아들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

오늘의 쉼터 2014. 8. 27. 20:52

제3부 黑龍의 失墜-자각 3

 

 

 

“박계주, 박계주 선생이세요.”

“박계주?”

어디서 들은 듯한 이름인 것 같기도 했고,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인 것 같기도 했다.

여급 김윤희는 박계주의 이름도 모르는 김두한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덧붙였다.

“동생두! 박계주 선생도 모른단 말야? 《순애보》를 쓰신 소설가…….”

“순애보?”

김두한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했을 뿐이었다.

순애보란 말도 언뜻 귀에 들은 것 같기도 했고,

처음 듣는 것 같기도 했기 때문이다.

박계주(朴啓周).

그는 1913년 태생으로 출생지는 간도 용정(龍井)이다.

1929년, 그의 나이 17세 때 이미 〈간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적빈(赤貧)〉이

입선된 바 있었으나, 그후 1938년 〈매일신보〉 현상 장편에 《순애보》가 당선되어

일약 유명해진 소설가다.

《순애보》는 낭만주의적 색채가 짙은 대중 소설이라 할 것이나,

한번 그 소설이 발표되자 그 인기는 절정에 달하여,

문자 그대로 ‘낙양(洛陽)의 지가(紙價)’를 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장편 소설 세 편을 읽은 독자라면 반드시 박계주의 《순애보》를 하나 들어야 할 정도였다. 특히 학생들을 위시한 젊은이들 사이에서 애독되었으나, 젊은 기생들 사이에서도

그 인기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실명한 애인이 몽매에도 잊지 못할 애인과 플랫폼에서 마주치고도

못 알아보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젊은 독자들이 애간장을 태우며 한숨을 추스르고

눈물을 뿌리곤 했었다.

김윤희도 열렬한 애독자의 한 사람이었다.

박계주는 《순애보》로 명성과 돈을 한꺼번에 얻어,

솔직한 표현으로 콧대도 높았으나 자존심도 대단했다.

작지 않은 알맞은 체구에 혈색 좋은 둥근 얼굴의 미남형이어서

소설 이외에도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 소지는 많았다 할 것이다.

국경 도시 만주 땅에서 태어나 자랐고,

이역 땅에서 핍박받는 민족의 비애를 직접 체험했을 뿐만 아니라,

항일 투쟁을 하는 독립 투사에 대한 견문이 많았으므로,

그의 민족 정신은 남다른 바가 있었을 것이다.

《순애보》를 발표한 후,

그는 서울의 박문 출판사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 《박문》의 편집을 맡고 있다가,

김두한과 마주치게 된 1943년 당시에는 월간 잡지인 《삼천리》를 편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박계주의 존재를 김두한이 알 까닭이 없었다.

정진영이 가르쳐준 덕분으로 언문(국문)을 겨우 깨우쳤다고는 하지만

아직 장편 소설을 통독할 정도는 되지 못했다.

그가 아는 소설가와 소설은, 역시 정진영이 대신 읽어준

방인근의 《무쇠탈》뿐이었다 함은 이미 오래전에 소개한 바 있는 대로다.

그는 박계주나 《순애보》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알고 있고,

이를 큰소리로 외쳐댈 수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누이! 그 어른이 무엇 때문에, 왜 화가 나셨지?”

 

실인즉, 이날 박계주는 처음부터 몹시 기분이 상해 있었다.

삼천리사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는 여류 작가 최정희(崔貞熙)와 한바탕 싸움을 했기 때문이다.

편집국장으로 있던 그는 말이 편집국장이지,

박봉에다 편집에 관한 일체의 일을 혼자서 도맡아 하고 있다시피 했다.

삼천리사의 경영주는 저명한 시인인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이었으며,

편집국장 박계주 아래 여기자로 최정희,

이 밖에 서무와 사환 아이가 하나 있을 뿐인 단출한 식구였다.

여기자로 최정희가 있다 했지만, 편집국원으로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다.

그것도 그럴 것이, 당시 최정희는 여류 시인 모윤숙(毛允淑) 등과 더불어

이 땅의 ‘신여성’의 첨단을 걷는 재색을 겸비한 인기 있는 규수 작가였던 것이다.

한갓 여기자로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따분하게 교정이나 보고 있을 성미가 아니었다.

게다가 주지하다시피, 최정희는 후에 파인 김동환의 부인이 될 정도로

사장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있었다.

술집에 노래도 춤도 모르는 화초 기생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그녀는 화초 기자인 셈이었다.

그저 간단한 심부름거리나 도와주었지 커다란 도움은 주지 못했다.

자연 박계주가 1인 3역, 4역 격으로 하찮고 자질구레한 일까지 도맡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분하고 꼼꼼한 성격의 박계주는 아무런 불평도 없이 비단 편집뿐만 아니라

판매 업무 분야에까지 여러 방면으로 일을 잘해 냈다.

맡은 일에 철저해서 때로 일을 못 끝내면 집에까지 갖고 가서 해올 정도였다.

때문에 파인으로부터의 신임은 절대적이었다.

삼천리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만 해도

그는 두루마기를 입은 수수한 옷차림의 얌전한 청년이었다.

술도 전혀 입에 댈 줄을 몰랐다.

어쩌다 술자리에 어울리게 되면 사이다만 마셨다.

“무슨 작가가 그래요? 술도 마실 줄 모르고!”

최정희가 핀잔을 주듯 말하며 사이다에 술을 타 마시게 했다.

그렇게 해서 배운 술이 나중엔 술고래가 되었다.

“최 여사 때문에 술을 배웠다니까…….”

하고, 술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술회하곤 했었다.

그런 만큼 둘은 친밀한 사이였다.

성격이 까다롭고 토라지기도 잘하는 최정희는

자주 파인이나 삼천리사에 불만을 품고, 직장을 옮겨 뛰쳐나갔다.

그럴 때마다 박계주는 최정희에게 옮겨갈 직장에 낼 이력서를 대신 써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이후에도 이력서를 제대로 쓸 줄도 몰랐고, 쓴 일도 없었다.

“워낙 성격이 못돼서, 사흘 후면 쫓겨 올걸 뭐!”

박계주는 그렇게 농담하면서 이력서를 써주는 것이었다.

그 농담이 신기하게 들어맞아서 최정희는 다시 삼천리사로 되돌아오곤 했었다.

파인이나 박계주가 그녀를 말없이 받아들인 것은 물론이다.

이처럼 다정한 박계주와 최정희가 한바탕 다투게 된 것이다.


성격이 대쪽 같아 까다로운 일면이 있다고는 하지만,

최정희는 다정 다감하고 인정이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여인이었다.

이날도 최정희는 거지 아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선 것이다.

길에서 벌벌 떨고 있는 거지 아이가 가엾어서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무리 인정이 많기로 거지 아이를 사무실로 데려오다니,

요즘 같은 각박한 세상에서는 이해조차 되지 않을 일이었다.

“얼마나 추울까! 불이나 쪼이라고 데리고 들어왔어요.”

최정희는 거지 아이에게 난롯불을 쬐게 했다.

그러고는 거지 아이를 사무실에 남겨놓은 채 훌쩍 밖으로 나가버린 것이다.

박계주가 거지 아이를 인계한 꼴이 되었다.

이것도 요즘 사람들로서는 상식 이하의 일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최정희가 거지 아이를 데리고 들어섰을 때,

박계주는 깜짝 놀라서 쳐다보았으나 이맛살을 찌푸리지는 않았다.

자기 책상 바로 옆에 있는 난로에서 불을 쬐게 했을 뿐만 아니라,

최정희가 나간 다음에도 거지 아이를 내쫓지 않았다.

한번 나간 최정희는 함흥차사였다.

점심 시간이 되었다.

박계주는 거지 아이를 남겨놓은 채 혼자 점심을 먹으러 갈 수가 없었다.

그는 소년을 데리고 나왔다.

그러나 차마 냄새나고 더러운 거지 아이를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설 수가 없었다.

식당 주인이나 다른 손님에게 폐가 될 것이 염려되었기 때문이다.

먼저 목욕탕으로 데리고 가서 목욕을 시켰다.

그러는 사이 그는 싸구려지만 두툼한 내복과 겉옷을 사다가 입혔다.

그러고는 화신 백화점 뒷골목 안에 있는 ‘이문 설렁탕’집으로 데리고 가서

함께 설렁탕을 먹었다.

이쯤 했으면 거지 아이를 그대로 돌려보냈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래도 미진했으면 돈 몇 푼 쥐여주고는.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 아이를 데리고 온 것은 최정희인데,

본인의 양해도 없이 마음대로 돌려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다시 아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목욕도 하고 새옷을 입은 데다가 배가 부른 소년은 이제 춥지 않았다.

기분이 좋아진 소년은 난로도 쬐지 않고 이 책상,

 저 책상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책상 위의 것을 만지작거리며 손장난을 하기 시작했다.

“아서. 그런 것 만지면 안 돼!”

그는 소리쳐 나무라지도 않았다.

“나, 오줌 마려워요.”

익숙해진 아이는 응석까지 부렸다.

“자아식.”

박계주는 화장실까지 직접 안내를 했다.

말끔하게 단장된 아이는 여느 아이와 조금도 다름없는 소년이 아닌가.

그 달라진 모습을 보는 것만도 즐거웠던 것이다.

그만큼 인정이 많았지만, 또 아이들을 그토록 아끼고 사랑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박계주도 마침내 화가 나고 말았다.

소년에 대한 화가 아니라, 최정희를 향한 화였다.

거지 아이를 자기에게 맡겨놓은 채 퇴근 시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는 최정희에게 화가 난 것이다.

그러한 그녀가 무책임한 것처럼 생각된 것이다.

‘야, 이제 그만 가봐.’

호주머니에서 몇 닢의 동전이라도 꺼내 쥐여주고 돌려보냈어도 무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시 그럴 수가 없었다.

소년을 데려온 최정희에게 양해도 없이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퇴근 시간도 지났다.

(그래도 좀더 기다려봐야지…….)

그는 창문 밖을 내려다보았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덮여 있었다.

그 어둠 속에 휘황하도록 불을 밝힌 꽃전차가 달려갔다.

서대문 쪽에서 동대문 쪽을 향해 등불 행렬이 끝도 없이, 한도 없이 흐르고 있었다.

만세 소리며 군가의 합창 소리가 높은 4층 꼭대기까지 벌떼가 윙윙거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당시 삼천리사는 종로 2가, 지금의 종로서적과 다과점 고려당 사이의 기독교 빌딩 4층에 있었다).

예의 싱가포르 함락 축하 행렬인 것이다.


(제기랄! 뭐가 좋다고 저 지랄들인 것인가? 조선이 해방이라도 되었단 말인가? 빌어먹을 놈들!)

그렇지 않아도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 박계주의 밸은 마구 뒤틀리기 시작했다.

거기에 뜻밖에도 최정희가 돌아온 것이다.

아마도 사무실에서 갖고 갈 물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어머나! 누구냐 너? 아침의 그애 아냐? 너, 정말 깨끗해졌구나!”

최정희는 거지 소년을 보고 반색을 했다.

목욕을 시키고 깨끗하게 옷까지 사 입힌 박계주에게 고맙다기보다 경탄을 했다.

“어쩜, 여태까지 아이를 데리고 계셨어요?”

그녀는 정말 미안해서 말했다.

그러나 이미 화가 치밀 대로 치밀어 있는 박계주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아니, 무책임하게 아이를 맡겨놓고 이제 돌아오면 어떡해요?”

그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길이 막혀서……, 하지만 불이나 쬐게 하고 돌려보냈으면 될 일이지, 누가 여태까지…….”

최정희는 꼼꼼하다 할까 어리석다 할까,

그러한 박계주에 놀라서 감탄하는 한편, 정말 미안해서 기다랗게 변명을 했다.

그러나 한번 뒤틀린 그의 심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자기 감정을 시위하려는 듯이 문을 쾅 하고 요란하게 닫고는,

발소리도 요란하게 쿵쾅거리며 계단을 뛰어 내려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최정희와 다투게 된 전말이다.

정말 화가 나서 소리치기는 했지만,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그만한 일로 가냘픈 여인에게 소리친 것이 정말 미안했다.

거리에는 여전히 등불 행렬이 계속되고 있었고 꽃전차가 땡땡거리며 질주를 했다.

만세 소리, 군가의 합창. 이를 구경하는 거리의 인파, 또 인파. 그 인파의 소요.

거치적거리는 인파를 헤치고 관철동 골목으로 들어선 박계주의 발길은

저절로 가찌도끼 바로 향했다.

가찌도끼 바는 박계주의 단골 술집은 아니었다.

그러나 언젠가 3차인가 4차로 몹시 취해서 들른 이후 비교적 자주 찾게 되었다.

김윤희와 송채환이라는 여급이 《순애보》의 애독자였고,

그가 《순애보》의 원작자라는 것을 알고 그녀들이 몹시 반겼기 때문이다.

작가란 자기 엿을 사주면 무조건 좋아하는 엿장수 같아서,

자기 소설을 읽었다고 하면 무조건 좋아하는 숙맥 같은 일면이 있다.

박계주도 자기 소설의 애독자라는 그녀들이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소설가로서의 자존심이 워낙 강했던 그는 좋아하는

녀들에게 결코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인기 절정의 작가인데다 미남인 그에게 쏟는

그녀들의 존경심은 절대적이라 할 만했다.

이날 밤, 기분이 워낙 상해 있던 박계주는 어울릴 만한 술벗이 없어서

혼자서 가찌도끼 바를 찾았다.

혼자 찾아가도 그녀들은 그를 반겼고,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해주었기 때문이다.

박계주는 가찌도끼 바가,

낮이면 김두한을 비롯한 주먹패들의 아지트 같은 소굴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김윤희가 김두한과 안동 김씨 동성동본이어서 누이, 아우님 하는

친밀한 사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고, 더구나 송채환이라는 여급이

김두한의 절친한 친구인 김동회의 애인으로,

그와 동거 생활을 하고 있는 사이라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저 손님과 여급, 작가와 독자라는 관계로 함께 어울렸을 뿐이다.

하긴, 김두한을 비롯한 주먹패들이 자주 가찌도끼 바에서 술을 마신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먹패들이 나타나지 않는 술집이 종로에 어디 있단 말인가.

주먹패들이 나타난다 해서 기피했다간, 술을 마실 수 있는 술집이란 종로에 없었다.

주먹패들은 주먹패들끼리 술을 마시고, 일반 주객들은 또 그들끼리 술을 마실 뿐,

아무런 충돌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주먹패들 사이에 엄한 계율(戒律)이 있었기 때문이다.

종로 상인들의 보호자인 것을 자처하고 있는 김두한과 그 패거리들은

일반 고객에게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그것은 두목 김두한의 엄중한 명령이기도 했다.

주먹패들이 일반 고객에게 시비를 걸고 빈번하게 충돌을 했다간,

술집의 장사가 되지 않을 것이 아닌가.

특히 가찌도끼 바는 같은 패거리인 노명준이 경영하고,

상준이 웨이터로 있는 술집인 것이다.

이 술집의 번창을 위해서도 일반 고객에게 시비를 걸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점잖은 사람들도 술에 취하면 망발을 하는 일이 있는 것이다.

혈기왕성한 주먹패들끼리 충돌하는 수도 있지만,

주먹패와 일반 주객들이 맞붙는 경우도 왕왕 있을 수 있었다.

대체로 여자 문제 때문에 붙게 마련인 것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손님이 끼고 앉아서 수작을 부리는 경우 따위다.

이런 경우도 주먹패들은 직접 폭행을 가하는 일은 없었다.

불쾌해진 주먹패가 손님을 째려보는 것이다.

이때 술에 취해 만용이 생긴 주객이 마주 째려보면 ‘뭘 봐?’ 하고 트집을 잡고 붙게 되지만,

이 편에서 눈길을 피하면 더는 손을 쓰지 못했다.

주먹패들에게 그만한 분별이 있었던 시절에, 주먹패와 박계주가 하필이면 맞붙게 된 것이다.